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너희는 귀를 기울리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성령에 대하여

제2강/의에 대하여

윤주만목사 2017. 9. 25. 09:28


의에 대하여

  

 

요한복음16:7-10절을 보겠습니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 지 못함이요

 

저번에는 죄에 대하여를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모두 이루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살아나셔서 승천하신 후에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보혜사 성령님께서 오셔서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보혜사가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하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가르쳐 책망을 하느냐면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책망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알고 있다면 굳이 성령이 오셔서 세상에 대해 책망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기초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령론의 가장 기초가 되는 죄에 대해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에 대해서 바르게 서 있지를 못하면 성경 전체를 바르게 볼 수 있는 눈이 없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기초는 성령론에 있어서 너무도 중요하고 또 성경을 보는 시각을 이 기초에 두고 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지식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성경을 보려고 하다가는 망하는 길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의 지식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반 도덕적인 상식은 같을지라도 진리에 있어서만은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먼저 이해를 하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진리에 있어서만은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영의 일입니다.

그것을 육의 지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상을 가지고 보려고 한다는 자체가 어리석은 일입니다 내가 생각을 하고 있는 것과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은 너무도 큰 차이가 있고 괴리감이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도무지 믿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못 믿는다고 탓할 수 없습니다.

사실 교회에 나온 사람들도 믿지를 못하고 있는데 세상 사람들이야 말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못 믿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일입니다 그들에게 죄를 용서를 빌지도 않았는데 용서가 된다는 것이 어떻게 이해가 되겠습니까? 그것을 이해하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문제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천국에 가기 위해서 영혼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 교회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아직도 세상의 지식을 그대로 자기 사상에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지만 이 세상의 사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죄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이 죄에 대해서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고 또 마음에서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에게는 아직도 세상의 지식이 그대로 있어 거기서 벗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패러다임입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이 세상의 지식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한번 쯤 망치로 얻어맞는 것 같은 패러다임이 있어야 아! 이것이 진리 구나 하면서 그마나 조금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왔지만 그런 경험이 없이 그저 이 세상의 지식을 가지고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육은 이차원입니다.

그러나 영은 사실 우리가 몇 차원이 되는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다만 성경을 통해서 아주 조금 그것도 겨우 구원에 대해서 약간의 이해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 인생들이 너무 쉽게 성경을 보려고 하고 있고 또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왜 오십니까?

만약 세상의 지식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성령은 절대로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일반 세상적인 지식으로 충분히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지혜를 깨달아 알 수 있는데 굳이 성령이 오셔서 무엇을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분명한 것은 성령이 오셔서 세상에서 잘못 알고 있는 영의 일에 대해서 깨닫게 해 주셔야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충돌합니다.

세상의 지식과 성령이 가르쳐 주고 있는 진리는 서로 충돌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책망을 하신다고 말씀을 합니다. 좋은 말로 책망을 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공격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알고 있는 것이 잘못 되었다고 공격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은 법을 어기면 죄라고 말하고 법을 잘 지키면 의라고 말 합니다.

또한 법을 못 지켜 죄를 지면 심판을 받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보혜사가 오셔서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식을 그대로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책망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죄에 대하여 지난주에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요한복음168절에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신 다는 말씀은 너희가 잘못알고 있으니 바로 잡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죄에 대하여 세상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법을 어기면 죄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성령께서 오셔서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가르쳐 주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세상의 지식이 아닙니다.

죄냐 의냐 심판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옥 갈 죄냐 천국 갈 의냐 또한 천국가지 못해 심판을 받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본문 말씀들은 구원에 관한 문제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지옥 가는 죄는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이 기초에서 흔들리면 그는 성령이 아직 임재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단정을 지어도 무방합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가르쳐 주시는 가장 기초적인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성령이 아직 오시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정의를 내려 주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서 반대를 하거나 그것이 흔들려 버리면 그 사람은 죄에 대해여 모르는 사람이요 또 성령이 그 안에 임재하지 않는 사람이요 아직도 세상 지식으로 살아가고 있고 세상 지식을 가지고 성경을 보고 전하는 사람입니다.

 

흔들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행위에 대한 문제는 조금 흔들려도 됩니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거짓말 하지 말라는 말씀을 거짓말해도 된다고 말해도 사실 구원을 받는데 있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기초가 되는 말씀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을 흔들어 버리는 순간 구원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 의는 무엇입니까?

세상적인 기준의 의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의가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또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렇게 의를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성령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2:13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다고 해서 다 그것이 진리에 맞는 말씀이라고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사실은 진리와 반대가 되는 말씀들도 기록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러냐면 진리를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그 반대 되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복음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보면 사실 성도들이 당황스럽습니다. 이제 까지 복음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 맞고 또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고 분명히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데 로마서에서는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복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아주 고역적인 말씀입니다.

내가 강하게 복음을 전하다가도 이런 말씀을 보면 또 상대가 이런 말씀을 가지고 와서 이야기를 하면 할 말이 없어집니다. 사실 성경에는 이런 반대 되는 말씀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이 진리에 반하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복음을 전하면 공격을 받습니다.

믿기만 하면 의롭다 하심을 얻고 천국을 갈수 있다고 전하는 사람들에게 듣기만 하는 것이 의인이 아니고 행해야 의인이라고 공격을 합니다. 사실 이 말씀 그대로 라면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이 말씀이 심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3:19-20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로마서 2장에서 율법에 대해 말씀하고 3장에 그 결론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입을 막고 모든 사람에게 심판을 가져오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율법 앞에서는 어떤 사람도 입을 막고 대답하지 못하고 심판을 받는 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복음에 반대가 되는 말씀이 사실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잘못 보고 있을 뿐입니다.

만약 복음에 반대가 되는 말씀이 있다면 그것을 그 말씀만 보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왜 이런 말씀을 기록했는가를 성경 전체를 보면서 그 말씀을 복음에 위배되지 않게 해석을 해야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있는 성도라 말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213절에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행하는 자라야 의인이라고 말씀하면서 320절에는 율법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연결된 말씀으로서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행하는 자라야 의인인 것은 맞는데 율법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213절의 말씀은 분명히 맞지만 그러나 율법으로는 이 세상에서 아직 한 사람도 의롭다 함을 받은 육체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가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율법으로 행해서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럼 로마서 213절의 말씀은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 함을 얻으라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기준으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을 만큼 온전하게 흠도 점도 없이 행한 사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럼 이 말씀이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면 행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그런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을 행해서 의롭다함을 받으라고 하는 사람은 성령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율법을 행해서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그렇게 말하는 자체가 무엇입니까?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에 오르는 것입니다. 사실은 성경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사상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지금 교회 안에서 그런 사상에 미혹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자기가 율법을 지켜야 의로워 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들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부처의 사상을 믿고 따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상식으로는 분명히 율법을 행하는 자가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맞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도덕법을 어기고 살아간다면 당연히 손가락질을 받을 것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상식으로는 맞지만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과는 대치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또한 알고 있어야 진리를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216절에서도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로마서 320절과 똑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의 말씀이나 율법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하셨는데 율법으로 의로워 지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성경은 율법으로 의로워 질수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지금 교회 안에 있는 다수는 율법으로 의로워 질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정의를 하고 있는데도 이 세상 사람들의 사상이 그대로 남아 있어 율법으로 의로워 질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5:4절을 보겠습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율법으로 의로워 질 수 있습니까?

성경의 정의입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 다수의 교인들이 이 율법을 지키면서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자 하고 있습니다.

 

지금 성령론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내가 율법을 잘 지킬 수 있습니까? 성령이 오셔서 도와주시면 율법을 잘 지킬 수 있습니까? 나는 율법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없는데 성령이 감동을 해 주시면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성경과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막연하게 그럴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내가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순간에 나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는 것이 성경말씀입니다 내 육체에서 율법의 한 모양이라도 나타내고자 그것이 의로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에 그는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그런데도 이 시대 다수의 사람들은 성령을 받으면 성령이 율법을 잘 지킬 수 있게 도와준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없는 말씀을 자기들이 상상해서 만들어 가지고 아무 거리낌이 없이 사용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까?

성령을 받으면 율법을 잘 지키게 도와 주셔서 의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말씀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성령을 너무 막연하게 생각을 하고 성령에 대해서 모르다 보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고 있고 목사들이 그렇게 주장을 하면 그것을 듣는 교인들은 거의 맹목적으로 성경에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망입니다.

그런 생각 자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 모두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삶이라고요?

제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어 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 어디에 구원받은 성도가 율법을 잘 지키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 합니까? 율법을 잘 지켜서 의롭게 살아야 한다고 말 합니까? 사실 그런 생각이 이 세상의 사상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부처가 된다는 뜻입니다.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하는 자체가 부처가 되겠다고 하는 것임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너희는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은 성도가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살아가야 한다는 이상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도덕적으로 의롭게 살지 말라고 드리는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정말 의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방법이 율법이 아니라 이 세상의 제도와 법에 의해서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의 제도와 법에는 이미 성경에 있는 도덕법이 다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왜 그토록 율법을 주장합니까?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 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교회라는 것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 이고 또 하나는 도덕적인 법을 이용을 해서 다른 자기들에게 필요한 법을 살려서 자기들의 배를 채우려고 하고 또 교인들을 구속하게 위해서입니다. 사실 그것이 아니라면 법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종교인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 종교인이 되는 순간 망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아세라가 그랬고 지금의 음녀가 바로 교인들을 종교인들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세라에 미혹이 되었고 지금은 큰 음녀에게 미혹이 되어서 종교인이 되고 있는데도 그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그 가운데 임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눈이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4:15절을 보면,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율법에 미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내가 지키고 있는 몇 가지 율법은 나를 의롭게 나타나게 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십일조를 안 내는 세상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너무도 의롭습니다. 주일을 안 지키고 자기들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는 세상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분명히 의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마치 신기루와 같은 착시 현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지키고 있는 율법의 행위가 지금은 분명히 내 눈에 의롭게 보이는 것은 뚜렷합니다. 사실 매주 놀러 가는 사람들에 비하면 자기가 주일날 나와서 예배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으면서 십일조를 내는 것이 얼마나 대답합니까?

 

십일조입니다.

누가 감히 그것을 낼 수 있다는 말 입니까? 사실 이 세상 사람들의 의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혹시 있을지 몰라도 자기의 수익의 십분의 일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쓴다면 아마도 대단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너무 의롭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롭다 함을 못 얻으면 어떻게 됩니까? 율법이 있는 곳에서는 진노만 있을 뿐입니다 내가 의로워 지려고 한 그 율법의 행위가 신기루가 걷히고 나면 진노만 남는다는 말씀입니다.

 

진노를 안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율법이 없어야 합니다. 내게서 율법의 한 모양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진노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들이 구원을 받은 성도라 하면서 성도는 율법을 잘 지켜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자체가 진노를 받겠다고 자청하는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에게서 율법의 한 모양이라도 있다면 버리시기 바랍니다. 차라리 예수를 안 믿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와 상관이 없는 아주 예쁜 여자가 있습니다. 이 두 여자가 있는데 누가 다른 남자를 만나면 분노를 하겠습니까?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라 해도 다른 남자를 만나든 말든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다른 남자를 만나도 하나도 질투가 안 일어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하면서 그래서 그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여자가 다른 남자를 만나면 어떻겠습니까? 그 남자는 아마도 질투를 하고 화가 나서 그 여자를 가만히 두지를 않을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바로 이렇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과 세상 사람의 차이입니다. 세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 여자가 아무리 예쁘고 착해도 예수 그리스도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다릅니다. 자기가 예수를 사랑한다고 고백을 하고 또 그렇게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습니다.

차라리 세상 여자가 낫지 교회 안에 있으면서 다른 남자를 만났다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노를 사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키고 있는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하는 그 행위가 바로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율법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로마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율법을 두 남편으로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오직 진노만 있을 뿐입니다 교회에는 나와서 정말 사람들로 부터는 의롭다 함을 받고 있지만 하나님으로부터는 질투를 받아서 진노를 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율법 생각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으로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습니까?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의에 대하여 가르쳐 주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의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 하시리라는 말씀은 세상 사람들은 율법을 잘 지키면 의로워 질줄 알고 있다는 것이고 성경은 분명히 율법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생각과 성령의 감동은 분명히 서로 대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의로워 질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6:10절을 보겠습니다.

의에 대하여 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참으로 이상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의가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을 의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보혜사 성령께서는 그것이 의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라가는 것이 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무 황당하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이 의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대다수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이런 의가 있느냐고 하면서 반문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성경을 많이 읽은 사람도 이런 말씀이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냥 지나칩니다.

너무도 중요한 말씀인데도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사실 성령론에 있어서 이 기초를 모르면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인데도 그것을 모르고 있고 생각도 하려고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를 나와 수십 년을 신앙생활을 하면 뭐 합니까?

 

진리에 대해서 기초가 없습니다.

그저 교회에 나와서 도덕적으로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 마치 의로운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런 생각이 사단이 사로잡고 있는 것인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고 진리에 대해서 사모하는 마음도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성령론에 있어 가장 기초가 되는 이 말씀을 모르고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다른 것은 조금 몰라도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기초가 되는 말씀을 모르면 안 됩니다. 너무 어려운 그리고 분명하지도 않은 예언 적인 말씀을 아는 것으로 마치 자기가 진리에 서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것도 바로 아는 것이 아닌데도 사단이 눈을 가려 버리면 그렇게 됩니다.

 

참으로 이해가 안 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올라가시는 것이 우리의 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여기에는 깊은 성경의 진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의를 알아야 진짜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세상에 대해서 책망을 하시는 이 의에 대해서 모른다면 그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고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가시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 가시는 것이 우리에게는 의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 지식으로는 황당하지만 어찌 되었든 성경에서 이것이 의라고 말씀을 하니까 우리는 이 의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 앞에 무엇 하러 가셨는지를 보겠습니다.

 

사도행전7:55절을 보겠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스데반집사가 순교를 합니다.

마지막 설교 단 한 번의 설교를 하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고 말씀합니다. 스데반 집사는 이 설교를 하고 난 후에 이스라엘에 의해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합니다. 이때 사실 사도 바울로 곁에 서 있었고 스데반 집사가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히브리서6:19-20절을 보면,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대제사장이 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하나님 우편에 서신 이유는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휘장 안으로 들어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휘장은 저의 육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성막론에서 이 휘장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씀을 드리겠지만 성경은 이 휘장을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막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것이 바로 이 휘장입니다. 이 휘장 안에는 아무나 들어가면 죽습니다. 반드시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물론 성소 안에도 일반 백성이 들어갈 수 없지만 특히 이 휘장 안에는 반드시 대제사장만이 들어갑니다.

 

히브리서8:1-4절을 보겠습니다.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대제사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가신 것이 의라고 하는 말씀은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면 대제사장이 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늘에 올라가셔서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서 가셨습니다.

 

이 땅의 대 제사장은 누가 되었습니까?

이 세상은 율법을 쫒아 제사 드리는 제사장이 있기 때문에 제사장이 될 수가 없습니다. 왜 반드시 하늘에 올라가셔야 하느냐면 이 세상에서는 예수님은 제사장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성막은 하늘에 있는 것을 땅에 세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는 제사장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레위 지파가 아니기 때문에 제사장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율법에는 레위 자손만 제사장을 세울 수 있는데 예수님은 레위 지파가 아니기 때문에 제사장이 될 수가 없습니다. 레위 자파 자손 중에서도 아론의 자손이 대제사장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왜 하늘에 올라 가셨는가를 조금 이해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땅에서는 제사장이 될 수 없기 때문에 하늘에 올라 가셔서 제사장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지자로 그리고 왕으로 또 대제사장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지난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세상의 장막은 하늘에 있는 장막의 모형과 그림자라고 말씀합니다.

하늘에 있는 장막을 표본으로 해서 이 세상에 있는 장막은 율법을 쫓아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모세가 하늘의 있는 장막을 보고 그대로 성막을 이 세상에 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 주시고 모세가 그것을 광야에서 그대로 세웠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을 표본으로 해서 세운 것이 땅에 있는 장막입니다.

이 세상에 세운 장막은 몰론 하늘의 것을 보고 한 것이지만 사람이 세운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사실 하늘에 있는 것을 보고 세운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성막을 만든 것은 하늘에 있는 참 장막의 그림자였습니다.

 

히브리서8:5절을 보겠습니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하늘에 있는 것을 모세에게 보여주고 그대로 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닌 진짜 성소에 들어가셨다는 말씀입니다 대제사장이 되셔서 들어 가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모형과 그림자를 보고 사실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림자를 통해서 실체를 보았어야 하는데 이스라엘은 그림자를 실체로 보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 했습니다.

 

그림자입니다.

성경은 그림자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어떻게 보면 불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림자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림자를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더욱 율법주의에 빠졌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지금은 우리가 실체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림자와 실체 사이에서 혼동을 하고 있습니다. 실체를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이스라엘과 같은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예수를 본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예수가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같이 역시 이들도 예수를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림자를 그림자로 보지 않고 자꾸 실체로 보다 보니까 성경을 잘못 해석을 해서 믿음을 가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성막을 보면서도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렇다 해도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대제사장이 들어가는 곳은 지성소입니다.

지성소는 첫째 칸이 아니라 둘째 칸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휘장을 사이에 두고 첫 째 칸은 성소고 휘장 안으로 들어가면 지성소가 있습니다. 성막에 대해서는 나중에 하나하나 기구들에 대해서 성막론 때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서9:7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 일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것이라”

 

대제사장은 일 년 일 차례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가셔서 대제사장으로 지성소에 들어 가셨습니다. 이 지성소에는 피 없이는 못 들어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피 없이는 못 들어가느냐면 지성소에는 십계명이 들어 있는 법궤가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피 값을 주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바로 지성소입니다.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무엇을 하러 들어갑니까?

성소에서는 매일 제사를 드리지만 지성소에는 일 년 한차례 대제사장이 들어갑니다. 들어 갈 때는 성소에 있는 번제단의 모든 피와 새 양을 잡은 피를 가지고 들어가서 법궤 앞에서 쏟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제사를 드릴 때 대제사장이 했던 일입니다.

 

그러면서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대제사장이 법궤 앞에서 피를 쏟으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 제사를 받으 십니다.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시는 순간에 제사 드리는 백성들의 죄가 한꺼번에 없어지는 것입니다 지난번 속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지만 이스라엘의 모든 죄가 한꺼번에 없어지는 것입니다 .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백성들의 죄가 백성들의 노력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의 제사로 없어지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죄를 안 지으려고 선해지려고 노력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의 제사로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 속죄에 대해서 모르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이 속죄를 믿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깨끗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자기들이 율법으로 의로워 져서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 년 일 차례 대제사장이 속죄 제사를 드림으로 해서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속죄를 받아서 깨끗해진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제사로 인하여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그 피를 하나님께서 받으심으로 없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 제사 드린다는 말씀입니다. 그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스라엘이 성막에서 제사를 드렸던 것은 하늘에 있는 참 장막을 보고 그렇게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로마서8:34절을 보면,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되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십니다. 백성들의 죄는 대제사장의 제사가 끝이 날 때 그 제사로 인하여 백성들의 죄가 없어집니다. 이스라엘이 일 년 일 차례 대제사장이 휘장 안으로 들어가 속죄소에서 제사를 드린 것은 하늘의 그림자입니다.

 

그 실체를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불행하게도 제사를 드리면서도 하늘의 참 장막을 보지 못했는데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실체를 보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올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 믿음이 우리의 의가 된다는 것을 성령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역사입니다.

휘장에 피를 뿌리고 단에 피를 쏟습니다. 대제사장이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이 받으시면 성소안의 피가 깨끗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지성소에는 오직 깨끗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가 믿음으로 담대하게 휘장 안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셨다는 증거로 그 안에 뿌려졌던 피가 깨끗하게 없어집니다.

뿌려진 피는 백성들의 죄 입니다 제사가 받아들여지는 순간에 백성들의 죄는 없어진다는 상징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만든 장막에서 그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히브리서의 말씀과 같이 하늘의 참 장막을 보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달리시고 죽을 때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휘장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없어 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어짐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직까지 휘장이 그대로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는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죄의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어느 누구도 휘장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자기 육체로 그 휘장을 찢으심으로 우리가 담대하게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 되어서 제사를 드림으로 우리의 죄가 없어지는 것이지 내가 빌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내가 용서를 빌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자기가 용서를 빌어서 죄를 사함을 받을 수 있지만 성령은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구약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이 신약에 와서는 자기가 고백을 하는 회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도 그렇게 해야 죄를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올라 가셔서 대제사장으로 우리의 죄를 위해서 간구를 하시기 때문에 속죄가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셔도 안 되고 하늘에 올라 가셔서 참 장막에서 대제사장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를 해 주셔야지 영적인 이스라엘인 성도들의 죄가 없어지고 깨끗해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가 죄를 안 져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없어지는 것입니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함이요 라는 말씀은 하늘에 올라가셔서 대제사장이 되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간구하심으로 내 죄가 없어지고 죄가 없어짐으로 해서 의롭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전에는 두 개의 기둥이 있습니다.

하나는 보아스요. 하나는 야긴 입니다. 우편기둥에서는 대제사장을 기름 붓고 좌편 기둥에서는 왕을 기름 붓 습니다. 실제 이스라엘의 성전에 이 두 기둥이 있어서 왕을 세울 때는 좌편에서 기름을 붓고 제사장을 세울 때는 우편에서 기름을 부었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는 것은 대제사장이 되셨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로워지는 것은 율법으로 행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의로워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나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율법을 잘 지켜서 의로워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올라 가셔서 대제사장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심으로 우리가 의로워 진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율법이 성행을 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있는 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의를 모르면 이 세상 사람들과 같이 자기들의 행위로 의로워 지려고 노력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위가 어떠하다는 것을 너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행위는 더럽습니다.

 

이사야61:10절을 보면,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구원의 옷, 의의 겉옷으로 우리를 입혀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사실 이 의의 겉옷을 모르면 구원의 감격이 없습니다. 내가 지금 어떤 옷을 입고 있는 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 옷이 어떤 옷인가를 아는 성도만이 크게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옷이 어떠하기에 구원의 옷, 의의 겉옷으로 입혀주시는 지를 보겠습니다.

 

이사야64:6걸을 보겠습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우리의 의의 옷은 다 더러운 옷 같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의는 어디에서 온 의입니까? 율법에서 온 의입니다. 사람들은 율법을 잘 지켜서 의를 이루려고 하는데 우리의 의는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운 옷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사람도 자기의 의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깨끗한 옷을 못 입었습니다.

 

이 의의 싸움입니다.

사실 진리는 우리의 의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의 의와의 싸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싸움에서 지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이 싸움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은 사실 성령이 그 가운데 임재 하시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지금 교회는 자기들의 더러운 의를 가지고 자랑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를 버리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내 의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면서 자랑하는 사람은 이미 이 싸움에서 지고 있는 사람이고 성령께서 책망하시는 소리를 못 듣고 있는 사람입니다

 

성령께서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보혜사 성령께서는 그 더러운 옷 입고 어떻게 하나님께 가려고 하느냐 책망하신다는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의로워 질수 없으니까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신 것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행위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은데 하나님께서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입혀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옷을 입기를 거절을 하고 자기들의 행위로 깨끗한 옷을 입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본 모습은 검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신부가 단장한 것처럼 보물로 단장해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신부 화장을 하니까 예쁘게 보이는 것입니다. 신부가 화장하는 것처럼 우리의 본래 모습은 더럽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깨끗하게 예쁘게 단장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옷으로 우리를 입혀서 깨끗하게 만들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적으로 얻은 옷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입혀 주시는 믿음의 옷입니다 우리가 율법적으로 행한 의의 옷은 더러운 옷 같지만 이 옷을 입혀 주시면 깨끗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남편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단장 시켜가지고 예쁜 처녀라고 받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에서는 나는 너의 남편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도는 신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받아 주시는데 그냥 받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겉옷으로 내게 덧입히시며 신랑이 사모를 쓰고 신부가 자기보물로 단장한 것 같이 해서 우리를 받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육체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그렇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신부의 보물은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극히 귀한 진주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이사야59:9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공평이 우리에게서 멀고 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두움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 행하므로

 

사람들의 행동은 공평도 없고 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공평도 없고 의도 없는 우리지만 하나님께서는 의의 겉옷을 입혀서 우리를 깨끗한 것으로 받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의의 겉옷은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실제 우리가 입는 옷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새롭게 탄생이 되는 영혼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공평과 의는 또한 자기들의 기준에 맞추어 놓은 것 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저 아프리카 사람과 미국 사람과의 공평과 의는 많은 차이를 나타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그런 의와 공평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이사야1:27절을 보겠습니다.

시온은 공평으로 구속이 되고 그 귀정한 자는 의로 구속이 되리라

 

의로 구속이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의는 우리의 육체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새롭게 탄생이 되는 영이 이렇게 의로 구속이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는 더럽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육체도 더럽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우리 속에 새롭게 탄생이 되는 영은 깨끗합니다. 그것은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듯이 아담에게서 하와가 탄생된 것 같이 하와는 아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탄생이 된다는 말씀은 우리 영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과 육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아담으로 탄생된 우리 육체는 어떻게 해도 더럽습니다. 이 육체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안 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두 번째 아담으로 오셔서 우리 안에 새로운 하와를 탄생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안에 탄생된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서 살 수 있을 만큼 깨끗하다는 말씀입니다.

 

영의 비밀입니다.

그러나 이 비밀을 모르면 이 세상 사람들과 같이 자기 육체를 깨끗하게 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사실 이 세상의 상식으로는 이 영의 비밀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어떻게 믿어집니까? 그러나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이 책망의 소리를 받아들이고 믿게 되어 있습니다.

 

가장 기초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에서 많은 것을 안다고 해도 성령께서 책망하시는 이 말씀이 믿어지지가 않으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령론이 왜 중요하느냐면 이 세상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이것이 믿어져야 합니다.

 

이사야32:17절을 보겠습니다.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우리는 의가 없기 때문에 영원한 평강과 안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율법적인 의로는 영원한 평안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룬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아무리 율법적으로 깨끗하게 산 사람이라도 늘 그 마음에서는 정죄를 받고 있기 때문에 불안합니다. 사실 율법주의 마음에는 늘 내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존재를 하고 있습니다.

 

안전이 있습니까?

우리가 율법적으로 아무리 의롭게 산다 해도 모든 사람에게는 안전이 보장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사망에 이른다는 것은 율법적인 의로는 안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의는 하나님께서 입혀 주시는 의기 때문에 그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강과 안전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심으로 우리 죄가 속죄를 받고 우리 속에 깨끗한 영이 탄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 영은 깨끗하기 때문에 평강이 오고 또 사망에서 안전합니다.

 

절대 죽을 수 없습니다.

내 안에 있는 영이 죽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혹시 예수님이 죽으면 내 안에 탄생된 영도 죽을 수 있을지 몰라도 그럴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의입니다. 이 의는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 의를 누가 이 세상의 지식으로 받아드리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율법의 의로는 전혀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의로만 천국 갈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 보좌에서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심으로 천국 가는 의를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그림자로 보여주신 것이 이스라엘의 성막이고 제사법입니다.

대제사장이 되어서 기도하신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베드로와 가룟유다가 있었습니다. 둘 다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가룟유다도 배반하고 베드로도 배반 했습니다. 그 후에 가룟유다는 자살해서 죽고 베드로는 돌아와서 주님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베드로에게 네가 닭 울기 전에 나를 3번 부인할 것이요 사단이 너를 밀 까부르듯이 넘어뜨리려 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돌이킨 후에 네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두 사람 다 뉘우쳤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사람은 그를 위하여 기도 해주시고 한사람은 기도를 안 해 주었습니다. 기도를 해준 사람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서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안 해준 가룟유다는 영원히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너무도 중요한 말씀입니다.

대제사장이 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 다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넘어지고 쓰러져도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일으킴을 당하여 구원받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같이 설령 주님을 부인하는 일을 했다 할지라도 우리를 끝까지 붙들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의 간증을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4:4절을 보면,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자기를 책망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깨끗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사도바울이 자기는 자책할 것이 없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는 한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판단 할 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 합니다 주님만이 판단하실 것입니다. 내가 자책할 것이 없지만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판단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기쁘게 받으시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빌립보서3:9절을 보겠습니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두 가지 의를 말씀합니다.

하나는 율법에서 난의요 하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의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주신 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도 역시 사도바울과 같이 이 의를 가져야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의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보혜사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지는 의 말고는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이 우리의 의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의 의를 주장하면 성령을 통해서 책망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께서 가지고 계신 생각과 일치 되어야 성령께서 거하실수 있습니다. 성령을 거슬러서 생각한다면 성령으로부터 책망을 받고 성령께서 같이 거하실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책망을 하시는데도 받아들이지를 않으면 성령이 함께 거하실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말씀하시는 의는 율법적인 의가 아니고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 올라가셔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셔서 죄가 없어지는 의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생각하고 있는 의를 성령은 책망을 하시고 진짜 의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3:6절을 보겠습니다.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의문은 죽이는 것입니다.

의문은 율법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영은 살리는 것이라는 말씀은 믿음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문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자체가 스스로를 죽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고린도후서3:7-11절을 보겠습니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율법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서는 의를 얻을 수 없고 율법은 죽이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살린다는 말씀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율법의 기능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고 살리는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율법을 버릴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3:11절을 보겠습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사람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말씀합니다.

율법으로는 왜 의롭게 되지를 못하느냐면 율법을 다 지켜야 하나님 앞에서 온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아직까지 한 사람도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이 없습니다.

 

히브리서10:10절을 보겠습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우리가 의를 얻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몸을 드린 것으로 얻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얻었습니다. 이 거룩함은 내가 무엇을 잘 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3:23-24절을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값없이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된 것입니다.

값없이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성소와 지성소가 있습니다.

성소에서는 매일 제사를 드리지만 지성소는 1년에 한번 제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 이십니다. 매일 매일 회개 하면서 율법에 따라 죄를 회개 하는 사람은 아직 지성소에 들어오지를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매일 매일 잘해서 회개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대제사장의 제사 한번으로 우리는 거룩함을 얻었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대제사장이 되셨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구원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믿어야 하는데 매일 매일 성화되어서 얻어진다고 하는 사람은 성화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불가능 합니다. 그 사람은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아서 만들어 질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쫒아 가면 나머지 내 문제는 자연히 나도 모르게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이렇게 하라 하는 하나님이 성도에게 요구 하시는 것을 포기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을 너무 주장하다 보면 본질이 가려진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입니다.

모든 수단을 다 써 보았지만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 가를 제하시고 정한 관을 씌우시고 의의 옷을 입히셔야만 합니다. 우리는 율법적으로 안 되니까 예수를 믿음으로 천국으로 데려가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 감사한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이 있어야 주장을 하지 내가 한 것이 하나도 없기에 주장 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더러운 옷을 입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의 의로서 이루려는 사람들에게서 그 옷을 벗기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혀야하는 것이 이 복음을 받는 사람들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이전까지 내가 의로워 지려고 나를 고치려고 그런 기도를 했지만 이제는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복음 안으로 들어오게 할 수 있을까를 기도해야 합니다. 자기만 알고 있고 가지고 있는 연약한 것을 고치려고 노력한다고 고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복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고 살다보면 하나님께서 그런 것들은 자연적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 고쳐 주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 다른 것은 안 해 주시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려 하기보다는 자기의 연약한 것을 고치려 노력한다면 그것은 하면 할수록 더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참된 의는 하나님께서 벗기시고 입혀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한 의가 참된 의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의를 우리는 가져야 합니다.

 

성격 안 고쳐집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기 위해서 자제를 시켜주시고 고쳐주시면 가능하겠지요. 베드로는 자기 성격대로 사명 감당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고쳐지는 것입니다. 설령 안 고쳐지면 어떻습니까? 내 그런 연약함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 아닙니까?

 

그런 것 너무 애쓰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성격대로 연약함으로 이 세상에서 살지 마시고 성격대로 연약함으로 복음 안에서 일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 진리의 기초가 잡히면 그때부터는 스스로 성경을 읽어도 말씀이 깨달아 집니다. 성령께서 내안에 계심으로 알게 해 주십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는 의는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셔서 하나님 우편 보좌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심으로 우리 죄가 제하여지고 깨끗한 의의 옷이 입혀지는 것이 성도의 의입니다.

이 복음의 은혜를 받은 성도는 주님 오실 날까지 이 복음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질수 있도록 더욱 헌신하시는 삶이 되셔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런 성도가 되어서 하늘에서 더 큰 축복을 누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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