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의로움이 되리라
신명기24:10-13절을 보면
“무릇 네 이웃에게 꾸어 줄 때에 네가 그 집에 들어가서 전집물을 취하지 말고 너는 밖에 섰고 네게 꾸는 자가 전집물을 가지고 나와서 네게 줄 것이며 그가 가난한 자여든 너는 그의 전집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해 질 때에 그 전집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릴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의로움이 되리라”
예수 그리스도
지금 한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 가운데서 분명히 한국 교회는 보이는 외적으로는 엄청난 부흥을 이룬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 외적인 모습을 보고 마치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신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고 다 기독교라는 종교에 빠져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믿음을 모르고 그저 종교에 빠져서 기독교라는 한 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인들의 모습이라고 보면 맞습니다. 이스라엘이 유대교인 것과 같이 이 시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입니다
종교인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자기 영혼을 사망으로 끌고 가는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무엇이 종요인 줄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라는 종교 안에서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한국 기독교는 종교가 되어 있고 그 종교라는 틀 안에서 사람들은 종교에 묶여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고 있습니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줄을 모르다 보니까 자기가 기독교인이 되어서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그것을 보면서 믿는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믿음은 마치 불교에서 부처를 믿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세상 모든 종교는 행위의 종교입니다
오직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믿음의 비밀을 주셔서 믿을 수 있게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들의 종교적인 행위를 보고 그것을 믿음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문자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행위들을 하면서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 더욱 열심을 내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들입니다
성경을 왜 기록하셨습니까?
그것은 단 한 가지 우리가 성경을 보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고 성경을 기록하셨습니다. 이것이 가장 기본입니다 그러나 이 기본에서 너무 흔들리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기초가 흔들리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사람들은 기초를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그것은 교회 나와서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정말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지만 이 시대는 믿음의 비밀을 모르기 때문에 교회에 나와서 자기가 하고 있는 행위들을 보면서 그것을 보고 믿음이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행위들을 더욱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교회는 자꾸 일을 만들고 있습니다. 너무도 많은 일을 하다 보니까 도무지 사람들이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교인들을 그 종교의 포승에 묶어 놓고 빠져 나가지를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일을 주면서 그 일을 하면서 그들이 만족감을 느끼게 해 주면서 늘 새로운 일을 만들고 있습니다.
일을 합니다.
너무 많은 일을 하다 보니까 도무지 믿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실 일이 많다는 것 자체가 믿음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일이 있는지를 모르고 그저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다고 하니까 아무 생각도 없이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성이 없는 짐승과 같이 교회가 이 일을 하라고 하면서 그것이 성경적인가를 생각하지도 않고 시키는 대로 하고 있습니다.
새벽 예배가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수요 예배가 어디 있습니까? 금요 철야 예배가 어디 있습니까? 구역 예배가 어디 있습니까? 정말 냉정하게 이런 것들이 성경에 있는가를 한번이라도 생각을 해본 사람이 있습니까? 제가 예배 자체를 하지 말라고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찾으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경에 없습니다.
그런 일을 하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저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를 이단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아닌 것은 분명히 아닌 것입니다 그런 예배에 대해서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을 해서 타당성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다 사람이 만든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 그렇게 내가 하려고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이유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는 성도라면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있습니다. 제가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도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기 생명까지도 아까워하지 않고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방법의 문제입니다
이 시대는 자기가 해야 하는 일과 주님이 하셔야 하는 일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을 모르고 주님이 하셔야 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그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주님이 하셔야 하는 일을 내가 하고 있다면 그는 정말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렇게 주님이 하셔야 하는 일을 자기가 하고 있고 그것이 얼마나 악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5:17절을 보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율법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율법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이 율법에 대해서 바르게 정립을 하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 개혁이 있고 난 후에 칼뱅이나 웨슬레나 개혁자들의 글을 보면 정말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그들의 글이 이 시대 사람들이 율법에 대해서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가를 결정짓고 있다 해도 별로 틀린 말이 아닙니다.
칼뱅의 오대강령이 있습니다.
저는 이 강령이 성경의 기초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을 하지 않고 있고 제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도 다 이 강령을 기초로 해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리서를 보면 칼뱅도 웨슬레도 율법에 대해서 바르게 정립을 해 놓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 분들을 폄하하고자 이 글을 쓰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 문제는 생명과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하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저를 교만하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주님 앞에 겸손한 자입니다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하면 누가 교만하고 누가 겸손한 자인가를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거의 모든 신앙 서적들을 보면 율법에 대해서 지켜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율법이 폐해졌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로만 폐해졌다고 하지 실제 그들은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을 율법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고 이 시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율법에 대해서 바로 정립을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 누가 지켜야 합니까?
성경적으로 하면 이 율법에 대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피로 언약을 맺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율법을 못 지킨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바로 성막을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했지만 이스라엘은 오히려 더욱 율법주의에 빠져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도 그들이 이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 이방인들이 율법을 지키겠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자기들과 언약을 하지도 않은 율법을 지키겠다고 주장을 하고 있고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합니까?
그것은 성경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율법이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 그것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고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고 또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한 말씀을 보면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회사의 사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원이 있습니다. 사원이 해야 하는 일이 있고 사장이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진행을 하는데 있어 그것을 결정해서 결제를 하는 일은 사장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원이 자기 마음대로 이 일은 좋은 것 같으니까 사장에게 결재도 안 맡고 자기가 한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사원이 누구입니까?
정말로 교만한 자입니다 설령 그 일이 잘 돼서 많은 이익을 남긴다 할지라도 이 사원은 교만한 자입니다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을 모르고 사장이 해야 하는 일을 자기 마음대로 결재를 하고 했다면 이 사원은 나중에 사장으로부터 분명히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어쩌다 한 번 쯤은 성공을 했을지 몰라도 계속해서 사장이 있는데도 자기가 결정을 해서 일을 하면 사장이 나중에는 기분이 상하게 되어 있고 그 사원을 가만히 두지를 않습니다.
바로 이와 같습니다.
성경을 보고 내가 해야 하는 일과 주님이 해야 하는 일을 분별을 못하게 되면 이 사원과 같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다고 해서 다 내가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을 있고 주님이 하셔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사람들은 그것이 분별이 안 되고 있습니다.
사원이 사장의 일을 계속하면 어떻게 됩니까?
사장이 언젠가는 분명히 진노를 하게 되어 있고 그 사원은 자기 분수를 모르기 때문에 내어 쫓김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바로 이와 같이 자기가 해야 하는 일과 예수님께서 하셔야 하는 일을 분별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악이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주님이 하셔야 하는 일을 자기들이 하고 있습니다.
악한 자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인들은 그런 악을 행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그 악에 대해서 더욱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자기가 어떤 악을 행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종교에 빠져 종교에 포승으로 묶여서 꼼짝을 못하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율법 누가 지킵니까?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에서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오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반포하셨습니다. 그 율법을 인생은 어느 누구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무도 못 지킵니다.
그 율법을 완성케 하려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율법은 누가 지켜야 하는가 하면 바로 예수님께서 율법을 지키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닫는 것이고 율법을 지키시는 분은 예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완성케 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인들은 자기들이 이 율법을 지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자기들이 스스로 이 율법을 지키겠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악한 일인가를 모르고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몇 가지 율법의 행위를 보고 자기가 대단히 믿음이 좋은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가 없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키셔야 하는 율법을 자기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악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 악을 행하느라 잠을 못 자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으면 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율법에 빠져 도무지 믿지를 않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교회 안에 있는 것을 보고 믿음이 있다고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는데도 믿지를 않고 자기들이 또 그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한 몸입니다
머리가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으면 몸도 다 이룬 것입니다 그것을 믿지를 않으니까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케 하셨다는 것을 믿는 성도는 절대로 자기가 또 다시 율법을 지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들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 있는 행위들이 얼마나 악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얼마나 악합니까?
죄인이 율법을 지키겠다고 하는 자체가 악한 일입니다. 죄인은 이미 율법을 지킬 명분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의인이라야 율법을 지키고 말고 하는 것이지 죄인이 무슨 명분으로 율법을 지키겠다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성경을 모르다 보니까 이 율법의 행위에 빠져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행하고 있는 새벽 예배, 수요 예배, 금요 철야 예배, 구역 예배 등 그런 행위들이 율법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악한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는 주님이 하신 일을 믿는 그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완성케 하셔서 우리로 율법에서 자유하게 해 주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악을 행하는 일에 열심을 내면서 악을 더 많이 쌓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분명히 주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내가 지키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그것을 모르고 자기들이 주님이 되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고 그것이 얼마나 큰 악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무릇 네 이웃에게 꾸어 줄 때에 네가 그 집에 들어가서 전집물을 취하지 말고”
사람이 사는 세상입니다
늘 이 세상에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자는 모든 것을 풍족하게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가난한 자는 한 끼 식사를 못할 정도로 가난해 져서 남의 집에 가서 식량을 꾸거나 아니면 돈을 꾸어서 당장 식사를 해결을 하고 있습니다.
그 율법입니다
네 이웃에게 꾸어 줄 때 그 집에 들어가서 전집물을 취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립니다. 가난한 네 이웃이 네게 와서 무엇을 꾸고자 할 때 그 집에 들어가서 네 스스로 담보물을 취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지만 예전에는 전당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돈을 빌리고자 하면 자기에게 있는 물건을 가지고 가서 그 값에 해당하는 돈을 빌려 썼습니다.
지금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이웃에게 돈을 빌려야 합니다. 그럴 때 네 이웃이 너에게 꾸고자 할 때 네 이웃의 집에 들어가서 담보물을 취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법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은 사람이 빚을 지면 결국에는 경매에 붙이게 되고 경매를 하게 되면 담보물들을 팔지 못하게 딱지를 붙이고 있습니다.
집에까지 들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꾸어 주는데 담보물을 잡는데 네가 집에 들어가서 담보물을 취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과 시대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 시대의 전집물이라는 하는 것은 뒤에서 언급이 되겠지만 겉옷이 전집물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옷이 귀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옷이 귀했습니다. 그래서 그 옷을 담보물로 해서 식량을 꾸어서 먹었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지금과 같이 보석 같은 것이 많았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는 옷이 가장 귀했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나아만 장군의 말씀을 보면 겉옷을 10벌을 예물로 준비해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겉옷을 가지러 집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말씀을 합니다.
옷이라는 것은 영적으로 구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가 네게 꾸고자 할 때 겉옷을 담보물로 줄 때 네가 그 집에 들어가서 담보물을 취하지 말고 밖에서 기다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는 줄은 저도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어찌 되었든 율법에 네 이웃이 네게 꾸고자 할 때 겉옷을 담보물로 할 때 그 집에 들어가지 말고 밖에서 기다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실제 이스라엘에서는 이렇게 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겉옷을 누가 담보물로 잡겠습니까? 더구나 남에게 꾸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겉옷이 좋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 겉옷은 구원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상식으로 성경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너는 밖에 섰고 네게 꾸는 자가 전집물을 가지고 나와서 네게 줄 것이며”
너는 밖에 서 있으라고 말씀을 합니다.
그러면 네게 꾸고자 하는 자가 전집물을 가지고 와서 네게 줄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담보물을 있어야 꿀 수 있습니다. 지금도 누구에게 꾸려면 대부분 담보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물론 신용으로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담보를 요구합니다.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이웃의 집에 들어갈 때는 평안을 빌어 주어야 하는데 지금 이웃이 평안하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 꾸려고 하고 있고 또 전집물을 잡으려고 하고 있다는 것은 그에게 결코 평안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꾸는 일입니다
남에게 꾸고자 하는 집은 평안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그 집에 평안을 빌어 주려면 그에게 거저 주어야지 전집물을 잡아서는 안 됩니다. 전집물을 잡기 위해서는 그래서 율법에 집에 들어가지 말고 밖에서 기다리라고 율법에 정해 놓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웃에 집에 들어갈 때는 그 집의 평안을 빌어 주어야 합니다.
옷을 담보로 맡기고 있습니다.
육적인 것을 꾸기 위해서 옷을 담보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꾸는 것은 거의 대분이 식량 때문에 꾸는 것입니다 식량이 없어서 꾸고 있는데 그 이웃이 네게 와서 꾸고자 할 때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 전집물을 잡고자 할 때는 그 집에 들어가지 말고 밖에서 기다리다가 전집물을 주면 그것을 받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식량이 없습니다.
육적인 양식을 통해서 영적인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꿀 때는 그가 가난하기 때문에 꾸고 있는 것입니다 육적으로 식량이 없어서 꾸고자 할 때 이스라엘에서는 그 땅에서 겉옷이 귀하기 때문에 그 옷을 전집물로 해서 꾸어 주었습니다. 이 옷은 구원을 상징하는 것이고 식량이 없어 꾸고자 하는 집은 자기 구원의 옷까지 맡겨야 하는 형편입니다
이스라엘의 육적인 율법입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이 율법을 왜 이렇게 정해 놓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도 역시 이 율법과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이 시대도 역시 양식이 없어 꾸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가 가난한 자여든 너는 그의 전집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그가 가난한 자입니다
식량이 없어 꿀 때는 다 가난한 자입니다 오죽 하면 먹을 식량이 없어서 꾸겠습니까? 그가 가난한 자이거든 이라는 말씀은 꾸는 사람은 다 가난한다는 것을 전제로 이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당장 먹을 것이 없어서 부자에게 가서 꾸고 있습니다.
꾸는 사람은 전집물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지방의 풍습이나 기후를 잘 알고 이 말씀을 먼저 육적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지금도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습니다. 물론 영하의 기온으로 내려가는 것은 아니지만 사막의 기후라는 것이 낮에는 굉장히 덥다가도 밤에는 한기를 느낄 정도 춥습니다. 예전에 뉴스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대만만 해도 기온이 영상 18도 이하로 내려가면 사람이 얼어 죽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마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겨울과 여름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든 것을 갖추고 살지만 대만만 해도 겨울이 없기 때문에 기온이 그렇게 내려가면 사람들이 추워서 견디지를 못한다고 말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이 대만에 갈 때는 반드시 전기장판을 사 가지고 가야 한다고 말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나라는 난방 시설 자체가 안 되어 있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난방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던 때입니다 그들은 낮에는 더위를 가리기 위해서 옷이 필요했고 밤에는 추우니까 그 겉옷을 덮고 잠을 잤던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겉옷을 덮고 자지 않으면 잘못하면 얼어 죽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겉옷이라는 것은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물론 영적으로는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먹을 것이 없어서 꾸고자 할 때 전집물을 잡고자 하면 이 율법대로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가난하면 전집물을 가지고 자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말씀은 누구와 누구를 가르쳐서 하는 말씀인가를 우리가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가난합니다.
그리고 부자는 딱 한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인생들과의 관계를 율법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해서 양식이 없습니다. 생명의 양식을 먹으려면 부자인 예수님에게 가서 꾸어야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해 주시겠다는 것을 율법으로 정해 주셨습니다.
가난해서 전집물을 잡혀야 합니다.
우리 구원의 옷을 빼앗길 정도로 가난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은 생명의 양식을 먹지 못해서 배가 고파서 부자에게 가서 꾸어서 먹어야 하는데 그때 전집물을 맡겨야 합니다. 구원의 옷을 맡기고 양식을 꾸어서 먹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세상 사람들이 가난해서 양식을 꾸어서 먹을 때 그 진집물을 가지고 자지 않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난해서 구원의 옷까지 빼앗길 정도가 되었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먹을 양식을 꾸어 주시고 우리가 가난하기 때문에 그 전집물을 가지고 자지 않고 우리에게 도로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육의 일을 통해서 우리의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난해서 부자에게 가서 꿀 때 부자가 전집물을 잡을 때를 율법으로 정해 놓으셨습니다. 역시 이 시대 우리가 가난해서 양식을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양식을 먹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구원의 옷을 전집물로 내어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가난해서 양식이 없습니다.
생명의 양식이 없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비유로 그렇게 가난한 사람은 전집물을 자기가 꾸고자 하는 자에게 맡겨야 하는데 율법에 가난한 자가 꾸거든 그 전집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해 질 때에 그 전집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릴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의로움이 되리라”
해 질 때에 그 전집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주라고 말씀합니다.
해 질 때가 언제입니까? 물론 하루가 지나갈 때 해가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해가 질 때가 있습니다. 바로 종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가난해서 양식을 꾸어 먹고 있을 때 이 말씀은 우리는 빚진 자라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해질 때에 반드시 전집물을 돌려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돌려주는 것입니까? 우리 주님께서 우리가 가난해서 빚을 져서 구원의 옷을 빼앗겨 있는 상태에 있을 때 주님은 부자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양식을 먹이고 또한 구원의 겉옷까지도 다시 돌려주신다는 것을 율법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해질 때입니다
하루해가 질 때도 있습니다. 또한 개인의 죽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종말의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해가 지면 얼어 죽을 수 있으니까 그 전집물을 돌려주어서 그가 따뜻하게 덥고 잘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렇게 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이렇게 해 주실 것을 미리 율법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난해서 생명의 양식을 못 먹어서 구원의 옷을 전집물로 빼앗길 때 주님께서 부자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다시 전집물을 돌려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해서 구원의 옷을 빼앗겼습니다.
양식이 없어서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집물을 다시 돌려주시라고 율법에 정해 놓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가 가난해서 양식이 없어서 구원의 옷을 빼앗겼는데 주님께서 부자로 이 세상에서 오셔서 전집물을 다시 돌려주어서 우리가 덮고 잘 수 있게 해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22:11-13절을 보면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가난해서 빼앗긴 전집물을 다시 돌려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이 전집물을 다시 받기를 거절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옷을 그냥 받아 입으면 되는데 입지를 않고 있습니다.
예복을 주시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일을 해서 갚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가난해서 그것을 다시 찾을 수 없습니다. 그저 처분만 바라고 있는데 부자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집물을 다시 돌려주시고 있습니다. 혼인 잔치를 통해서 우리에게 옷을 입혀 주고 있지만 사람들이 그 옷 입기를 거절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이렇게 미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집물을 다시 돌려주실 것을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받지를 않고 있습니다.
내가 꾼 것을 갚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난하기 때문에 다시 돌려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자기에게서 전집물이 빼앗겨진 것을 모르고 있고 또 주님이 거저 예복을 입혀 주시겠다고 하는데도 그것을 거절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옷을 입고 자면 너를 축복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전집물을 우리가 다시 찾을 수 없는데 주님께서 가난한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다시 돌려 주셨습니다.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감사합니다. 당연히 그 은혜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자기가 가난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고 전집물을 빼앗겼다는 것도 모르고 있고 또 주님이 다시 주시고 있든 데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의로움이 되리라
누가 의롭습니까? 이 세상에서 의로우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우리가 잃어버린 구원의 옷을 다시 입혀 주시는 것이 주님의 의로움이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완성케 하셨습니다. 이렇게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신 주님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시고 있습니다.
주님은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습니다.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이런 율법들을 다 지키셨습니다. 우리가 가난해서 전집물을 빼앗겼는데도 주님께서는 그것을 해가 지기 전에 다시 돌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의에 옷을 다시 입고 잘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율법 누가 지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키시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도 있지만 이렇게 주님께서는 율법을 지켜주셔서 율법을 완성케 하셔서 우리가 빼앗긴 전집물을 다시 돌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완성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난해서 전집물을 맡겨야 했는데 주님께서 해가 지기 전에 다시 돌려 주셔서 우리가 그 옷을 입고 있습니다. 이 옷을 입고 있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성도입니다 주님이 다시 주시는 옷을 입고 구원을 받아 천국에서 모든 축복을 누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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