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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윤주만목사 2016. 2. 2. 07:3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시편13:1-6절을 보면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

 

다윗의 시입니다

저도 매일 지혜의 시 한편을 쓰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저는 다윗만한 영성가가 없다고 늘 생각을 하고 있고 정말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성도라면 다윗과 같이 시를 쓰면서 내 신앙을 늘 점검하고 또 그 은혜를 구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많이 읽은 성경은 시편입니다

제가 정확히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시편은 100번을 더 읽으면서 많은 묵상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시편을 그만큼 많이 읽었느냐 하면 제가 힘들고 괴로울 때 시편은 참으로 많은 위로를 주기에 충분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시를 쓰고 있습니다.

제가 쓰고 있는 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표현할 수 있고 내가 얼마나 주님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가를 표현하는 그것이 가장 깊은 영성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실제 그런 영성을 통해 제 믿음이 더욱 견고해 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제가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바로 지혜의 시를 써서 주님을 찬양하는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에서 시가 사라졌고 시를 쓰려고도 하지 않고 시를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성이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왜 시편이 다른 성경에 비해 가장 분량이 많은 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같이 시를 쓰는 성도를 기뻐하시고 그 시를 통해 찬양 받으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외형을 추구하다 보니까 시가 사라졌고 영성이 이상한 쪽으로만 발전을 하는 기형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시는 메타포가 있어야 합니다.

의미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글을 잘 쓰고 어휘 구사를 잘 하는 시인만이 쓰는 것이 아니라 그 전체적인 내용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담겨 있고 그것이 표현되고 있다면 저는 좋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신앙 시와 지혜의 시는 다릅니다.

시를 쓰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들의 시를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한 자기의 고백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의 시는 내 고백보다도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또 나에게 어떤 은혜를 주시고 있는 가를 표현해야 합니다.

 

시편 13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체적인 시의 내용을 보면 중심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윗 자신이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 무엇을 했느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어떤 은혜를 주시고 있는 가를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 자신을 한 없이 나약하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신앙시를 쓰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 자신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것같이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어떻게 했다는 내용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상한 심령이 아니라 오히려 교만한 마음이라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기회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지혜의 시에 대해서 강의를 하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카데미를 열어서 복음을 전하고 지혜의 시에 대해서 가르쳐 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런 훈련을 하게 되면 성경을 보는 시각이 바뀌게 되고 다윗과 같이 깊은 영성으로 주님과 시로써 교제하는 성도가 될 수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지혜의 시를 쓰려면 먼저 성경에서 구속사를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바로 알지 못하면 절대로 지혜의 시를 쓸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인과 같이 시를 잘 쓰나 못 쓰냐는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어떻게 감추어 줄 수 있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시편은 전체적으로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영성이 있는 성도라면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있는 성도라면 당연히 써야 하는 시를 이 시대는 포기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통신이 너무 발달을 해서 편지를 안 쓰지만 제가 어렸을 때만해도 편지로 써서 의사 전달을 했습니다.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여자들은 그런 말을 합니다. 남자들이 사랑에 대해서 너무 표현을 안 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왜 자기가 그토록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주님에 대해서는 전혀 자기가 받고 있는 사랑과 은혜를 표현하지 않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다 알고 있으니까 굳이 표현을 할 필요가 없다고요?

 

그럼 예배는 왜 합니까?

기도는 왜 하고 찬양은 왜 하고 주님께서 내 마음을 다 알고 있는데 굳이 그런 것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최소한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예전에는 편지로 표현을 했다면 지금은 문자 메시지로 젊은 세대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가장 기뻐하시겠습니까?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은 거의 자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내 자녀가 무엇을 했을 때 가장 기쁩니까? 그가 돈을 많이 벌어서 효도를 해 주면 기쁩니까? 그가 사회의 저명 인사가 되어서 인정을 받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기쁩니까?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직 기쁨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저도 아들을 하나 키우고 있지만 가장 기쁠 때는 제가 내 아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아들을 통해 고백을 받을 때가 가장 기쁩니다. 가장 슬픈 부모는 아들이 부모가 사랑을 해 주는 줄을 모르고 그것에 대해서 부정하는 아들을 기르는 부모입니다

 

아빠가 나에게 무엇을 해 주었어?

아빠가 나를 정말 나를 사랑하고 있어? 하는 그 말을 듣는 부모는 가장 슬픕니다. 또 나는 아들에게 모든 정성과 사랑을 다 쏟아 주고 있는데 아들이 자기 혼자서 자란 것 같이 부모에게 감사하지 않는다면 그 부모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자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을 다 주어서 자기 아들 까지 내 주어서 나를 구원하시고자 사랑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서 고마워하지도 않고 그것에 대해서 표현을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물질로는 잘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헌금은 교회에 아주 듬뿍 갖다 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아들이 물질로 효도를 하겠다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저 의무감에 물질로 부모를 공경하려는 아들을 기쁘겠습니까?

 

하나님은 질투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으면 그런 말씀을 하겠습니까?

자기 아들 까지 이 세상에 보내 속죄 제물이 되게 하셨을 정도로 사랑을 확증해 주시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서 표현을 안 하고 있다면 그는 성도가 아닙니다. 그저 표현을 한다고 하는 것이 자기가 드리는 헌금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합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저 우주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겨우 몇 푼의 헌금을 내면서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표현을 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의무감으로 행하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표현을 하시기 바랍니다.

수천조 원을 가지고 있는 부자에게 고맙다고 천만 원을 사례 한다면 그 부자가 기뻐하겠습니까? 그 부자는 그런 것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부자를 통해 자기가 어떤 은혜를 받았는가 이야기 해 주는 것을 더 기뻐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인들은 티끌보다 못한 재물을 가지고 표현을 하고자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신을 보면서 사랑을 알고 은혜를 안다고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다윗의 처지입니다

다윗이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 가를 이 말씀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말 암담한 처지에서 지금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끝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이 들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분명히 깨닫기 바랍니다.

다윗은 육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그것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영적인 고통이 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기 바랍니다. 이 시대를 보면 주님을 만났다고 하고 응답을 받았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부족해서 그런지 몰라도 저는 아직 기도 응답을 받지 못했고 (교인들이 말하는 무엇이 이루어진) 또 음성을 듣지도 못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 번도 제 믿음에 대해서 의심을 가지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더욱 견고해 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정말 다윗의 지금 심정과 같은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언제까지 나를 버리시고 언제까지 주의 얼굴을 돌리고 있으시나이까? 하는 고백이 나에게서도 나와야 하고 그런 가운데서 믿음을 의지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다윗을 통해 내가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는 가를 깨닫기 바랍니다.

지금 비록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 같아도 또 영영히 그 얼굴을 돌리 신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이 말씀의 결론입니다 그것을 알기에 다윗은 마지막 절에 하나님을 찬송하고 자기를 후대해 주심에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암담합니다.

앞에 안 보이고 정말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있는 가 의심이 들어도 우리는 다윗과 같이 믿음이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너무 하나님의 음성도 잘 듣고 하나님이 자기를 돕고 있다고 그것을 간증하면서 자랑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거듭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정말 지금 교인들이 자랑하는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은 적도 없고 정말 수개월 동안 기도만을 하면서 살았어도 음성조차 듣지 못하고 내 마음에 감동조차 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주님이 주신 믿음에 대해서 저는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굳이 그런 것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고 있고 응답을 음성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믿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그 외에 더 이상을 갖고자 한다면 그것은 제 욕심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지금도 솔직히 저는 다윗 보다 더 한 육적으로 암담한 세월을 보내고 있지만 제 믿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있고 또 다른 사람들과 같이 그런 것을 받으려고 구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셨습니까?

나에게서 하나님의 도움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까?

그럴지라도 주님은 나를 돕고 있고 내 영혼을 구원해 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의 것을 바라지만 하늘에 속한 사람은 이미 다 받았기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다윗도 자기가 다 받은 것을 알고 암담한 처지에 있지만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다윗은 죄 때문에 이 시를 썼습니다.

자기 죄를 인하여 사단에게 조롱이 된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자기 육체가 연약해서 사단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패배자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가를 탄식하고 있습니다. 영혼이 구원을 받으려고 하다 보니까 자기 죄가 보여서 하나님을 향해 호소를 하고 있습니다.

 

그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모두 없애셨습니다.

죄를 이기지 못하는 자기 자신의 육체를 보면서 사단으로부터 조롱을 당하고 있다고 하면서 언제까지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숨기고 있으시나이까 하면서 호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 다윗의 호소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제는 그 원수가 죄를 가지고 우리를 조롱하지 못 합니다

그런데도 아직 교회 안에서는 죄의 문제가 해결이 안 되어서 조롱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안타깝기만 합니다. 스스로 정죄에 빠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다윗과 같이 그림자를 보면서 호소를 하고 있다면 그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얼마나 호소하고 있습니까?

이 시대 교인들은 자기가 교회 안에 들어 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치 구원을 받은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육적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고 그는 유다 지파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기름을 부음 받아 왕으로 살아가지만 그는 그의 영혼에 대해서 얼마나 간절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윗 보다 낫 습니까?

다윗 보다 더 깊은 영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런데도 너무도 태평하기만 하고 자기 영혼에 대해서는 기도 한 번도 안하고 겨우 자기 육체의 문제를 위해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입에 바른 발로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다고 구하는 그것도 다 육체의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진정 내 영혼을 위해 애통하고 내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호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과 같은 하나님의 친 백성인 그도 정말 자기 스스로를 볼 때 사단에 의해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그 은혜를 호소하고 있는데 이 시대는 구원에 대해서 너무도 태평하기만 합니다. 교회 안에서 점점 구원론이 사라지고 있고 그저 현세에 복과 현세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눈이 떠 있습니까?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눈이 떠 있습니까?

불행하게도 성경은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지 않고 있고 거의 모든 사람이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를 못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자기 눈이 떠 있다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성경을 모르겠습니까?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을 잘 믿은 사람입니까?

그런 다윗도 자기 눈에 감겨 진리를 분별하지 못할까봐 그래서 사망에 이를까봐 하나님께 호소를 하고 있는데 이 시대는 자기 영혼에 대해서 너무도 안심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배짱인 줄 모르겠습니다.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사단이 얼마나 지혜로운가를 깨닫기 바랍니다.

다윗과 같이 믿음이 있는 성도도 자기가 사단에 의해서 질까봐 그것에 대해서 근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믿음이 요동할까봐서 늘 근심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사단을 이겼습니까?

참으로 한심한 것은 죄를 안 짓는 자기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율법을 지키는 자기 모습을 보면서 또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자기 모습을 보면서 사단에게서 이기고 있다고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 모습으로는 원수를 이긴 것이 아닙니다. 혹시라도 그런 자기 모습을 보고 이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는 사단에게 조롱을 당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요한복음16:33절을 보면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누가 이깁니까?

내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기신 것을 내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내가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많은 교인들은 자기 스스로 이기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이기는 모습에 취해서 사단의 깊은 함정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단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사단은 영적인 존재이고 우리는 육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기신 그것을 내가 믿음으로 가져와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사단을 이기고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긴다고 기뻐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기뻐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사단은 더욱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기신 그것을 안 믿고 자기가 이기려고 하는데 사단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그런데 교회에서 그것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사단이 기뻐하는 그 일을 서로 칭찬을 하면서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다윗은 암담합니다,

그러나 그는 현실을 보기 보다는 자기 육체를 보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현실 세계에서는 구원을 기뻐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이 아닌 천국으로의 구원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주의 구원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는 그 말씀입니다 마음으로 믿으니까 천국이 보이고 그것을 기뻐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원수가 나를 사망으로 끌러 가는 것 같을 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고 기뻐할 수 있는 다윗의 믿음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영성이 사라졌습니다.

그저 현실 세계에서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고 자기 육체의 모습에 취해 영혼의 문제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혼을 사모하기 보다는 자기 육체의 문제를 가지고 밤새 울면서 기도를 하고 있고 또 그 문제를 가지고 근심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기뻐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구원의 기쁨 보다는 자기들의 육체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고 있고 그런 모습이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도우시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이미 구원에 대해서 그 의미조차 잃어버리고 있다고 보아야 맞을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사모가 없고 간절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단들이 구원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설득력을 가지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이 맞는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자기들의 구원론으로 미혹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구원론에 대해서 확신이 없으니까 사람들이 그런 이단의 사상에 쉽게 미혹이 되고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

 

언제 하나님을 찬송 했습니까?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잊으셨다고 생각할 때 그리고 주의 얼굴이 자기에게서 숨겨졌다고 생각할 때 그때에 믿음이 요동하지 않고 주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응답을 받아서 찬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잊으신 것 같은 처지에 있을 때 주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시를 쓰세요.

내가 가장 힘들 때 이런 지혜의 시를 쓰다 보면 정말 암담한 처지에서도 믿음이 요동하지 않고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있다는 찬양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습관이 내 몸에 배여 있고 내 영혼이 그렇게 깨어 있을 때 구원에 대한 확신이 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무척 힘이 듭니다.

그러나 그런 처지가 저로 하여금 지혜의 시를 쓰게 하고 있고 또 그런 환경 속에서도 믿음이 요동치 않고 더욱 견고해 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성이며 이렇게 주님을 사모하는 시를 쓰는 성도를 성령께서 감동을 해 주시면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여 주실 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다윗과 같은 영성가가 되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에서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씀을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다윗을 통해 다 이루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나를 통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다면 깊은 영성 지혜의 시를 써서 믿음을 더욱 견고히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