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12:8절을 보겠습니다. (신 256쪽)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다스리는 자입니다
교회 안에는 반드시 다스리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지위를 가지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영의 일에 있어서 다스리는 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들에게 주신 은혜대로 은사를 주셨습니다.
누가 다스리는 자입니까?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 만이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은 부활을 해서 천국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주님이 우리를 다스릴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그래서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스리는 자를 세우셨습니다. 왜 다스리는 자를 세우셨는가 하면 요한복음의 말씀과 같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주님 만이 교회의 머리가 되고 또 교회의 남편이 됩니다. 그러나 이제 그 일을 복음이 있는 성도들에게 은사로 주셔서 일을 하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모든 은사는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는 영생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을 가지고 은사라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육적으로 사람들을 다스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줄 수 없는 사람은 아니 영생에 대해서 반하는 일을 하게하고 있는 사람은 사실 다스리는 자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영생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면서 다스린다고 하는 사람은 로마서12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 아니라 세상의 이성을 따라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디모데전서에서 감독과 집사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서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말씀을 거의 다 문자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교회를 말씀하고 있지만 거의 이성적인 가정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엘리 대제사장이 있습니다. 그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디모데전서에서 말씀하는 한 아내가 육적으로 부인이라고 하면 사실 엘리 대제사장은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를 대제사장으로 세우면 안 됩니다 그뿐 아니라 사무엘의 아들들 역시 사무엘과 같지 않아서 왕을 세웠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육의 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그렇다고 해서 육을 완전히 무시를 해도 된다는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육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성도입니다 그렇게 육을 보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럴지라도 우선이 되는 것은 영의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를 가르치는 자가 누군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가 사람의 이성을 따라 육적으로 용납이 되는 자인가 아니면 디모데전서에서 말씀하는 감독과 집사의 직분을 보면서 거기에 합당한 자인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나를 가르치는 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있는 사람은 어리석으며 그는 믿음의 비밀을 가질 수 없어서 사망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3장입니다
이미 그리스도편지에 설교로 올려 드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설교를 보시고 나를 다스리는 자가 누군가를 바로 분별을 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내가 또 누군가를 다스려야 할 때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 가를 이 말씀을 통해서 바로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한 아내입니다.
반드시 한 아내여야 합니다. 반드시 주님이 거룩하게 하신 교회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그런 교회가 없습니다. 거의 모든 교회가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는 종교로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모두가 같은 교회에 있습니다.
어느 교회입니까?
그것을 갈라디아에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우리의 어머니라고 하면서 사라를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모여 있는 그 교회를 이제는 주님이 다스릴 수 없어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셔서 다스릴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시대는 그런 교회가 보이지가 않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1:15-16절을 보겠습니다. (신 327쪽)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긍휼
불쌍하고 가엾게 여겨서 도와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말하는 긍휼은 사람의 이성에 볼 때 불쌍하고 가엽게 여겨서 도와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사람의 이성에 따르는 것이며 성경을 그대로 이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단어를 보고 그대로 이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긍휼에 대해서는 많은 말씀을 했습니다.
로마서9장과 11장에서 긍휼이 무엇인가를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는 먼저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긍휼에 대해서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긍휼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이성을 따라 긍휼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입니다
죄인이 긍휼을 입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물론 우리 인생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로 긍휼을 입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는 일방적인 은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자기가 긍휼을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누가 긍휼을 입어야 하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세상의 이성을 따라 가엽고 불쌍한 사람을 보면서 그를 긍휼이 여기고 있고 저 사람을 하나님의 은혜로 긍휼을 입게 해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또 세상에서 사람의 이성에 따르는 악한 자를 보고도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누가 긍휼을 입습니까?
세상에서는 누가 불쌍하고 가엾게 보이고 있습니까? 사실 도덕적인 죄를 진 사람이 그렇게 보입니다. 기독교 안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도소를 찾아다니면서 그들이 지은 죄를 생각하면서 그들을 불쌍하고 가엽게 여기면서 도와주고 있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난하고 불쌍하고 가여운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도 마태복음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시니까 자기 이성을 따라 불쌍하고 가엽게 보이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려고 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긍휼히 여김을 받고 싶어서 그렇게 자기 눈에 보이는 모습을 따라 긍휼히 여기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이 세상의 책이 아닙니다. 그 정도의 긍휼이라면 굳이 성경을 보지 않더라도 불교인도 그리고 천주교인도 아니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도 긍휼히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로마서에서 말씀하는 은사는 그런 것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늘 말씀을 드립니다.
세상을 따라 살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이성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는 오직 영생을 위해서입니다. 그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어리석어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죄인 중에 괴수입니까? 물론 사도 바울은 성경을 영적으로 다 깨달았기 때문에 자기가 율법을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하나도 지키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깨닫기 전에는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의 생각대로라면 사도 바울은 절대로 죄인 중에 괴수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감성적으로 자극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구약의 율법을 보고 실제로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깨닫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는 자기가 다 지켜서 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온 후로 십계명을 보니까 자기가 지킨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율법을 보니까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는 흠이 없었는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니까 모두를 범한 자가 되어서 자기를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인 중에 죄수가 긍휼을 입었습니다.
그냥 죄인이 긍휼을 입은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은 복음이 계시가 된 후에 성경을 보니까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였고 그 괴수가 긍휼을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바리새인으로 있으면 절대로 긍휼을 입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니까 죄인 중에 괴수로서 긍휼을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기독교인입니다
율법을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제가 그들에게 십계명을 이야기를 하면서 우상을 숭배했습니까? 살인을 했습니까?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추상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정확하게 대답을 하는 사람을 아직까지는 만나 보지를 못 했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냥 하는 말로 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성경을 보고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보니까 자기가 살인한 자이고 우상을 숭배한 자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 지금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던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는 절대로 깨달을 수 없는 것을 주님을 만나고 난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실제 살인한 자입니다
실제 우상을 숭배한 자입니다 실제 간음을 한 자입니다 아니 성경에 있는 율법을 하나도 지키지 못한 자입니다 이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립서비스를 하듯이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보니까 자기가 이 모두를 범한 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십계명을 지킨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지키지 못한 계명을 자기들이 지키겠다고 하면서 점점 더 죄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왜 긍휼을 입었다고 하는가를 알아야 하는데 성경을 보면서도 자기들의 이성을 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살인한 자입니다
우상을 숭배한 자입니다 아니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모든 율법을 하나도 지키지 못한 자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도 바울이 긍휼을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긍휼을 입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긍휼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누가 불쌍하고 가여운 자인가를 아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가장 불쌍하고 가여운 자는 주여 주여 하다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비유로 말씀을 하시면서 버림을 받는 자가 많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누구에게 오래 참으셨습니까?
지독한 율법주의자였던 사도 바울에게 오래 참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가지고 있는 율법의 의로 반드시 저주를 받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가여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본입니다
사도 바울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아시기 바랍니다. 그가 세상적으로 가엽고 불쌍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세상 말로 아주 잘 나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출세가 보장이 되어 있는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의 일에 있어서는 불쌍하고 가여움을 받을 사람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긍휼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긍휼을 말씀할 때 대표적인 사람이 누군가 하면 바로 욥입니다 그 역시 율법적으로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자기가 얼마나 율법적으로 완벽하게 살았는가를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의 공평한 저울에 달려 보겠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 욥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의 일입니다
누가 가장 가엽고 불쌍한 자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면서 자기가 얼마나 가난한 자인가를 모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 긍휼을 입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긍휼을 베푸는 자입니다
누구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까? 이 세상의 이성을 따라 불쌍하고 가엽게 보이는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까? 성경을 모르면 자기가 누구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 줄을 모르면서 긍휼을 입어야 하는 자가 도리어 긍휼을 베푼다고 하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주 성실함으로 일을 하면서 자기가 그 은사를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긍휼을 베풀 수 있습니까?
율법을 지키는 자는 긍휼을 입어야 하는 사람이지 긍휼을 베푸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성경을 세상의 이성적 지식으로 보면서 긍휼을 베푼다고 하면서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리고 욥입니다 이 두 사람이 누군가를 우리가 성경을 보면 너무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두 사람이 긍휼을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욥은 고아의 아비가 되고 과부의 눈을 실망케 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더 긍휼히 여기면서 산 사람이지만 그가 도리어 긍휼을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가진 성도입니다
우리가 볼 때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가여운 자가 누구입니까? 세상에서 죄를 짓고 살아가는 사람입니까? 그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어떠한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 주어야 합니다. 누가 긍휼을 입은 자이고 누가 강퍅케 하는 자인가를 성실함으로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야고보서2:12-13절을 보겠습니다. (신 373쪽)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어떻게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까?
긍휼을 베풀라고 하니까 자기가 어떤 행위를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은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 성도 각 사람에게 은혜를 따라 주신 직분입니다 우리는 이 직분을 행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은사를 왜 주셨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나를 나타내기 위해서 은사를 주셨습니까? 은사에 대한 개념 자체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는 것 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리고 구원을 받은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져서 그 역시도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 은사를 주셨습니다.
이 시대 은사입니다
사실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은사와는 전혀 다릅니다. 자기들의 종교에서 나온 샤머니즘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습니다. 지금 이 시대 기독교 안에서 행하고 있는 은사는 전혀 성경적이지도 않고 종교의 샤머니즘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긍휼을 베푸는 자입니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에게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 있습니다. 이 율법대로 행하고 있고 그것을 야고보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가 자유의 율법대로 행하면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심판을 받은 자처럼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은 율법주의자의 눈에는 심판 받을 자처럼 말을 하고 있고 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행하는 것이 긍휼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율법주의자들에게 심판을 받은 자처럼 이야기를 하고 행하는 것이 긍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볼 때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행하는 것을 긍휼을 베푸는 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도 이단이라는 공격을 받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자유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실행을 하면 이 시대 기독교인들의 눈에는 심판을 받을 자처럼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행위를 야고보는 긍휼을 베풀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긍휼입니다
심판을 이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실행을 하게 되면 율법주의자들의 눈에는 심판을 받을 자처럼 보이지만 그런데 그 긍휼로 말미암아 심판을 이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모두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 혼자만이 율법을 안 지키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는 도리어 우리를 긍휼히 여긴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저 심판을 받을 사람과 싸우지 않고 도리어 우리를 잘 가르치려고 하면서 긍휼히 여기라고 말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긍휼을 베푸는 자입니다
사실 즐거움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율법주의자의 눈에는 우리가 심판을 받을 자이기 때문에 즐거움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그들은 어떻게 생각을 하는가 하면 자기들을 미혹해서 심판을 받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누구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까? 교회 안에서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정말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긍휼을 입었는가를 이미 로마서11장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였습니까?
우리도 역시 본성을 따르는 율법주의자였습니다. 우리는 사실 사도 바울이나 욥과 같이 그렇게 율법을 지키지는 못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본성을 따라 살아가고 있었던 율법주의였습니다. 그러나 정말 기적과도 같이 이 시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긍휼을 입은 자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이 일은 설명이 안 되는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은혜를 입은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물론 우리를 가르치는 자 중에서 긍휼을 입은 자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핑계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긍휼을 베푸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자유하는 온전한 율법을 가지고 심판을 받을 자처럼 말을 하고 그렇게 행하면 율법주의자들은 우리를 대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결코 즐거움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긍휼을 베푸는 자가 되어서 긍휼을 입는 자가 있다면 얼마나 즐거운 일이겠습니까?
누가복음15:4-7절을 보겠습니다. (신 121쪽)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긍휼을 베푸는 자입니다
즐거움으로 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누가 누구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본성을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가 교회 안에 있든지 교회 밖에 있든지 다 본성을 따라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즐거움입니다.
왜 즐거움으로 해야 하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양 백 마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를 다시 찾으면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자기가 비록 온 산을 다 헤매며 찾았을 지라도 그 고생한 것보다는 양을 찾은 즐거움이 더 크다는 것은 굳이 양을 안 키워본 사람이라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정말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왜 잃어버린 자가 되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죄를 많이 지어서 잃어버린 자가 되었습니까? 이 죄의 문제는 이미 끝이 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 인생들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고 가실 것을 성경에 미리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잃어버린 자가 되었습니다. 왜 잃어버린 자가 되었는가 하면 죄를 많이 지어서가 아니라 복음을 깨닫지를 못했기 때문에 잃어버린 자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 하나가 회개를 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말씀을 하시니까 마치 도덕적인 죄인을 말씀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회개입니다
누가 회개를 합니까? 이 시대는 누가 회개를 해야 하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도덕적인 죄를 회개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누가복음의 말씀을 보고 거의 모든 목사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도 회개를 하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회개를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무엇을 회개를 해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회개를 하라고 하면서 이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것을 회개하라고 외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목사들의 입에서 지금까지 계속해서 회개를 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주님이 오실 때까지 그들은 회개를 하다가 지옥으로 갈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목사들입니다
자기들이 조금 도덕적으로 깨끗하다 싶으면 회개를 하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잘하고 있는데 어느 일부의 목사들이 잘못하는 도덕적인 문제를 가지고 회개를 하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회개를 알아야 하는데 회개를 모르니까 늘 회개만 외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누가복음의 말씀이 너무도 생생하게 자기들에게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보면 회개를 하지 않아서 그런 죄 가운데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또 진심으로 회개를 하지 않아서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고 있다고 하면서 진심으로 회개를 하면 성령이 도와 주셔서 같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의 말입니까?
다 사람의 말입니다 성경에 어디 그런 말씀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마치 성경에 있는 것과 같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그런 죄를 안 짓고 남이 그런 죄를 지면 그것을 보고 회개를 하라고 하고 있고 진심으로 회개를 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해야 합니다.
왜 즐거움으로 해야 하는가 하면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기 때문에 즐거움으로 해야 합니다. 회개를 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회개입니다
그것은 생명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회개를 한 성도는 영생을 얻을 수 있고 회개를 하지 않은 사람은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회개에 대한 기본조차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를 하면 그가 회개를 해서 구원을 받으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다는 말씀입니다
회개를 했습니까?
그는 하늘에 있는 의인과 같은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지은 죄를 회개를 한다고 해서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회개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하는데 이 시대는 회개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과 같이 도덕적인 죄를 가지고 회개를 하고 있습니다.
욥기42:6절을 보겠습니다. (구 803쪽)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입니다
그는 긍휼을 입은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욥기를 보아서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지은 죄를 전혀 모르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아니 자기에게서 흠이 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도덕적인 죄를 지었습니까?
욥기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적인 죄를 안 지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욥을 소개할 때 순전하고 정직하여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살았는가는 굳이 말씀을 안 드려도 잘 알고 있습니다.
회개입니다
우리가 구약에서부터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회개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구약에 어느 사람도 회개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 않지만 욥기를 통해서 처음으로 회개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욥이 도덕적으로 회개를 할 것이 있었습니까? 그는 우리가 세상에서 알고 있는 도덕으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긍휼을 입었습니다.
그렇게 긍휼을 입고 난 후에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을 따르면 회개를 할 것이 없는 욥이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는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무엇을 회개를 했습니까?
자기가 강퍅하게 율법을 지킨 것을 가지고 회개를 했습니다. 죄를 지어서 회개를 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지킨 그 율법의 의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 것에 대해서 회개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율법을 잘 지킨 욥이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에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를 하고 있습니다.
죄를 회개합니까?
그는 아직 이 세상 초등학문에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 회개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죄를 다 지고 가셨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그들이 세상 죄를 가지고 회개를 하고 있습니다.
회개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는 세상 죄를 가지고 회개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죄에 대해서 뻔뻔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도덕적인 죄의 문제는 이제 끝이 났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를 해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그 일에 대해서 거절을 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면 회개를 해야 합니다.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욥은 자기가 가난한 자를 도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고아의 아비가 되고 과부의 눈을 실망케 아니하였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욥이 육적으로 한 그 행위가 나쁘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데 욥은 자기가 누군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자입니다
욥도 자기가 행한 율법의 의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는 가난한 자였습니다. 자기가 가난한 자이면 예수 그리스도께 꾸어야 하는데 도리어 세상에 있는 과부의 눈을 실망케 아니하였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율법을 가장 잘 지킨 욥이지만 자기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를 몰랐습니다.
욥과 같은 사람입니다
이 시대도 욥과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욥의 생각과 같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욥과 같이 완전히 율법을 지켜서 율법주의가 아니라 단 한 가지를 지킬지라도 그것이 자기의 의가 되고 있는 모든 사람은 욥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율법을 지키는 그들이 회개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도리어 어떻게 말을 하고 있습니까?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회개를 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2000년 전에 지고 가신 세상 죄를 보면서 회개를 하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회개를 해야 합니까?
사실은 이 시대 율법을 지키고 있는 그 사람들이 회개를 해야 하는 죄인입니다 어떤 죄인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주님이 지고 가신 세상 죄를 보면서 회개를 하라고 외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누가 회개를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바뀌겠습니까? 십일조를 하는 사람들에게 회개를 하라고 하고 주일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회개를 하라고 하면 아마도 정신 이상자로 취급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누가 회개를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상합니까?
그들이 볼 때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욥의 결말을 보아서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욥이 도덕적으로 지은 죄를 가지고 회개를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모른 것에 대해서 회개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욥과 같은 사람에게 회개를 하라고 하면 아니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주면 도리어 대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가 베풀고 있는 긍휼로 인하여 죄인 하나가 회개를 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한 영혼이 구원을 받는 그것을 보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편지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데 벽에 대고 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렇게 우리가 모여서 주의 만찬을 나누고 있습니다.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그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성도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그것을 주님께서 누가복음에서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보다 더 잘나서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긍휼을 입었습니다. 어디에 있을 때 긍휼을 입었는가 하면 율법주의에 있을 때 긍휼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율법주의에 있을 때 우리는 분명히 저주를 받았어야 합니다.
아니 율법주의에서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지혜로는 율법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겨주셔서 우리가 지금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하고 있습니다. 저주를 받아서 음부의 고통 중에 있어야 하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심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 성도는 이제 교회 안에서 율법주의에 있는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어야 합니다.
어떻게 긍휼을 베풀어 줍니까?
내가 어떻게 긍휼을 입은 자가 되었는가를 율법주의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긍휼을 베풀어 줌으로 해서 그가 율법주의에서 돌이켜 구원을 받는 성도가 된다면 그보다 더 즐거운 일이 없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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