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요1서2:25)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엡5:32)

요한복음 강해

123-2강,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윤주만목사 2022. 3. 14. 15:18

사도행전2:7절을 보겠습니다. (신 188쪽)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영의 일입니다. 

성경을 육의 일로 보지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실제 있었던 육적인 사건을 제가 부정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 주님께서는 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의 눈을 뜨게 하셨고 그가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고 나서 밝은 눈으로 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 실제 사건 속에서 우리는 영의 일을 알아야 합니다. 영의 일을 알지 못하고 그저 주님이 오셔서 하나님이시니까 이 세상에 오셔서 눈을 뜨게 하셨다고 하면 안 됩니다. 소경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으로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대표성입니다. 

성경은 어느 한 사람을 대표를 해서 우리 인생들을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을 대표로 해서 우리 인생들의 영적인 상태를 육체가 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셔서 밝은 눈으로 보게 하신 것은 우리가 영의 생명에 있어서 밝은 눈으로 보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소경이 밝은 눈으로 봅니다. 

그리고 이 소경은 늘 성전에서 구걸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전에 다니던 사람들은 이 사람을 늘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소경으로 구걸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밝은 눈으로 오니까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은 정말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섭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늘 일정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서 다르다는 것을 성경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선지자를 세울 때도 늘 다르게 세우시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0여명의 저자가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다 다르게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의미를 알면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성령을 받아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있는 성도들은 알고 있습니다. 

 

밝은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소경으로 구걸을 하던 그가 밝은 눈으로 보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보아서 잘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실제 소경으로 있던 사람이 밝은 눈으로 보면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밝은 눈으로 보는 것 자체로 그의 행동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나면서부터 소경입니다. 

그가 눈을 뜨고 이제 밝은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제 뒤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생명의 빛에 비췸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그가 유대인들과의 대화를 보아도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입니다. 

자기가 보았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섭입관이라고도 하고 있습니다. 첫인상이라고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전에 보았던 것이 이미 머릿속에서 각인이 되어 있고 그것을 다시 바꾼다는 것이 쉽게 않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육체의 일도 그렇습니다. 

소경이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늘 성전에서 구걸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밝은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실 그를 바로 알아본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유대인들이 그 사람이다 아니 비슷하다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오시는 것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이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사람들은 갈릴리에서 어부로 살던 사람들인데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제자들을 보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듣고 다 놀랐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입니다. 

사실 이 시대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 유명한 신학교를 나왔다고 하고 있고 미국에 유학을 가서 박사 학위를 받아 왔다고 하면서 대형 교회에 종교인으로 있는 사람들을 보면 어느 누구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종교는 그들을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그런 외적인 것을 보고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종교라는 것이 그렇게 외적으로 보이는 것을 보고 인정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입니다 

주님이 부활을 하신 후입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에게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제사장이 있었고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할 수 있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종파가 있었고 그들은 나름대로 당시 인정을 받고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제자들은 갈릴리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은 우리나라로 하면 서울이고 갈릴리는 어느 어촌 마을이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리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갈릴리 사람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이라고 하면서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 인생의 생각으로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당시 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 인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을 세우시고 그들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고 있고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이 놀라 기이히 여겼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초기교회입니다. 

그래도 주님께서 제자들을 많이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에 성령이 120여 문도에게 왔습니다. 그럼으로 해서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도들이 죽은 후에는 종교가 되고 말았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모르겠습니다. 

종교가 된 후에는 성도들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를 않기 때문에 저 역시도 어떻게 말씀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류에서 어떤 사람에게 성령을 보내 주신 것이 아니라 전혀 뜻밖에 사람에게 성령을 보내주셨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주류가 아니라 어디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고 그들이 복음을 전하고 교제를 하니까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종교에서는 그들을 이단으로 정죄를 하고 죽이는 일을 서슴치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소경이 밝은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성령을 받아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당시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리고 눈을 뜨고 보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와 같은 말을 하고 있고 제자들에게는 이 말하는 사람이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고 하면서 폄하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우리는 늘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께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라도 늘 인도하심을 받기를 원해야 합니다. 물론 성령이 오신 성도는 성령이 인도를 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소경을 보더라도 그가 밝은 눈으로 보는 것을 알아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 3장에서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을 하면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어떻다는 것을 말씀을 했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과 같이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모릅니다. 

교회라는 세상은 복음을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라는 세상에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진짜 소경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눈을 뜨게 해서 밝은 눈으로 보게 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진짜 그 사람인가를 모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그가 내가 소경이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잘 모릅니다. 

그러나 본인은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도 진리를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저 사람이 성령을 받았는가 안 받았는가를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니 믿음으로 내 안에 성령이 오셨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9:10절을 보겠습니다. (신 161쪽)

“저희가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소경입니다.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소경으로 태어났고 또 성전에서 구걸을 하면서 살아갔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오셔서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으로 보내서 씻으라 하시니 그가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 

사실 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이 눈을 뜬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금 이 시대 의학이 발달을 해서 눈을 뜰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2000년 전이고 의학이라고 해 보아야 거의 민간요법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민간요법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효과가 있다고 해도 소경이 눈을 뜰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모르는 민간요법이 있어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이성적 상식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에서 역사를 하실 때마다 표적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엘리야도 그렇고 엘리사도 그렇고 때로는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표적을 하나님께서 나타내시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다 영의 일을 비유로 해서 그런 표적을 나타내시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도 다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그 병을 고치시기 위해서 표적을 보이신 것은 절대 아니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성전입니다.

그곳에서 소경이 걸인으로 살았던 것을 지나다니던 사람들은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사람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 같으면 유대인들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지만 자기들이 알고 있는 소경이고 그가 성전에서 걸인으로 살았기 때문에 말을 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아니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기적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 육체는 헛것 같고 지나가는 그림자 같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육체가 잠시 고침을 받은 것을 가지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저 소경이 눈을 뜬 것만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소경이 눈을 떴다고 해도 역시 죽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보면서 놀라고 있습니다. 

 

물론 놀랄 일은 맞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죽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영생을 한다면 그것은 정말 놀랄 일이고 우리는 만약에 내 육체에 비슷한 병이 있다면 반드시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표적을 보이신 것은 우리 인생들의 영적인 상태를 비유로 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눈을 뜬 것입니까?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밝은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믿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영의 생명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그저 육체의 눈을 뜨고 밝은 눈으로 보는 것만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중풍 병자가 고침을 받습니까? 

문둥병이 고침을 받습니까? 소경이 눈을 뜨고 있습니까?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있습니까?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설령 그런 일이 있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죄를 범하고 있다면 그저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입니다.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할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런 병자를 고치시는 것을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 일을 하셨다고 해서 대단하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이 소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참 빛을 보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묻고 있습니다. 

지금도 놀랄 일입니다. 아니 지금과 같으면 교회 안에서 간증을 하고 그랬을 것입니다. 이 시대 종교 같으면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눈을 떴다고 하면 아마도 교회마다 다니면서 간증을 하고 그러면서 살 것이 분명합니다. 

 

육체의 일입니까? 

우리가 죽었다가 산다 해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일을 가지고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주님께서 하신 일을 제가 부정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주님은 분명히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그가 분명히 밝은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일을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마음만 먹는다면 무엇을 못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 전체가 소경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눈을 주님이 뜨게 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고 이 일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묻고 있습니다.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사실 인생들로서는 너무도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그러나 영의 생명을 생각을 하고 있고 그것을 바라고 믿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실제 눈을 뜬 것 보다는 그가 밝은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가 눈을 뜬 것이 더 중요하고 알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9:11절을 보겠습니다. (신 161쪽)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가 대답하였다. "예수라는 사람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였소.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소."”

 

소경입니다. 

그가 나면서부터 소경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그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가 나면서부터 소경이라는 것을 그리고 걸인으로 살았던 것을 아는 사람들이 묻고 있습니다.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소경에게 사람들이 묻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소경의 눈입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유대인들은 그를 아는 사람들은 소경의 눈이 떠진 것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육체적으로 그것도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기적을 보았기 때문에 소경에서 묻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육체에 나타나는 표적입니다. 그것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왜 주님께서 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을 통해서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리고 주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지만 유대인들은 믿지 않고 있습니다. 

 

왜 믿지 않고 있습니까? 

그들은 소경이 되어서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진짜 소경의 눈을 뜨게 함으로 해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보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밝은 눈으로 보아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묻고 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자기가 당한 일을 그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그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정확합니다.

주님께서 자기에게 행하신 그대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더하거나 덜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소경을 통해서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그것은 생명에 대해서 볼 수 있게 하셨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표적이라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밝은 눈으로 보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전에 그를 알고 있던 사람들이 그에게 묻고 있습니다. 이 기적과도 같은 일을 알고 싶어서 묻고 있습니다. 이 소경은 자기가 당한 일을 그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밝은 눈입니다. 

잠언의 말씀에서 눈이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에 대해서 마음을 기쁘게 하는가 하면 생명에 대해서 마음을 기쁘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소경을 통해서 주님은 빛을 보게 하시고 있고 그는 주님이 하신 일을 그대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습니까? 

이 소경은 주님이 말씀을 하신 그대로 자기가 실로암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 우리에게도 씻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이 어떻게 씻어야 하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우리는 나면서부터 소경이기 때문에 실로암에 가서 그러니까 보냄을 받은 자로서 씻어야 밝은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디도서3:5절을 보겠습니다. (신 349쪽)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가 행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자비하심을 따라 거듭나게 씻어주심과 성령으로 새롭게 해 주심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는 소경입니다. 

영의 일이 있어서는 인생은 다 소경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가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만이 소경이 아니라 이방인인 우리 역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을 보고 있지만 생명의 빛을 보지 못하고 어두움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릅니다.

유대인들도 자기들의 영적인 상태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 역시 모르면서도 신약 성경을 보면서 유대인들은 몰랐어도 자기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서 믿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이야기인 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이 시대 종교인 중에 이 태초에 있는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니 이제까지 이방의 종교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고 어느 누구도 글로 남겨 놓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입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 생명에 대해서 유대인들에게 가르치시는 것을 그대로 성경에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8장까지 보아서 잘 알고 있지만 유대인들은 주님께서 말씀을 하시는 생명에 대해서 전혀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이 신약 성경을 안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하고 있는 말씀인가를 잘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 성경을 보고 있는 우리 이방인들에게 주님께서는 말씀을 하고 계시고 우리 이방인들이 종교가 되어서 생명에 대해서 전혀 모를 것을 미리 아시기 때문에 말씀을 하셨고 사도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성경에 기록했습니다. 

 

인생들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깨닫고 나서는 우리 인생들이 얼마나 영의 일에 있어서 무지한가를 깨닫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종교를 만들어 놓고 그 종교 안에서 사람들에게 열심을 내게 만들고 있어서 그들이 더욱 많은 사람들을 종교 안으로 끌어 들이고 있고 그들의 열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종교 안에서 기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행사가 악합니다. 

어느 세상의 행사가 악한가 하면 종교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그들의 행위가 악하다고 주님께서 증거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소경이 되어 있는 인생들은 자기들의 행사가 왜 악한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싶은 마음에 한 때는 정말 종교 안에서 열심을 내면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행사가 다 악하다고 것을 깨닫고 나니까 정말 하나님께서 저를 진리로 인도하신 것은 기가 막힐 웅덩이에서 건져 주신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종교 안에서 얼마나 많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의 행위가 얼마나 악하다는 것도 모르고 있고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을 율법으로 생각을 하지 않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행위라고 하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저는 놀랍기만 합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유대인들과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는 것을 이제는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시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과 같이 그렇게 어두움에 다니면서 죄를 범하는 진노의 자식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가 이 세상에 유명한 자들보다 지혜가 있습니까? 그들보다 하나님에 대해서 정말 사모하는 마음을 가졌습니까? 저는 정말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그저 소경이 되어서 종교의 거대한 힘에 끌려가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제 가지를 꺾어서 본성을 거스르는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여 주심으로서 지금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있고 참 빛을 봄으로서 생명의 빛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저 역시도 이 소경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심으로서 제 눈을 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씻을 수 있는 자가 되어서 이제 밝은 눈으로 성경을 보고 있고 생명의 빛을 보고 있습니다. 

 

씻어야 합니다.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해서 제가 그렇게 되어서 이 시대 복음을 볼 수 있는 밝은 눈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이 생명의 빛을 보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상상할 수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씻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지혜나 능력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해 주셨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씻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씻을 수 있습니까? 물론 이 소경에게는 실로암으로 가서 씻으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밝은 눈으로 왔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디도서는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가 행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자비하심을 따라 거듭나게 씻어주심과 성령으로 새롭게 해 주심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입니까?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기 전에를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다고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인생입니다. 

그것에서 스스로를 돌이킬 수 있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안 되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지금 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는 기적을 보여 주시고 있고 우리가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아 중생의 씻음을 얻는 일이 그렇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본성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면서 열심을 내고 있는 이스라엘이 지키고 있는 율법의 행위가 악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도 요한복음 7장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내가 세상의 행사가 악하다고 증거를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을 보고 있지만 소경이 되어서 깨닫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주님께서 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심으로 해서 표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악입니다. 

성경은 이 악에 대해서 정말 많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악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많이 나오고 있는가를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을 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은 다 악을 행했어도 자기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악을 행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왜 이 소경에게 침을 땅에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을 하시고 이 소경이 주님의 말씀에 따라 씻음으로 해서 밝은 눈으로 오게 하셨습니까? 유대인들이 다 율법주의에 빠져 있어서 참 빛을 볼 수 없는 소경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소경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어두움에 다니고 있습니다.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말씀을 하면서 나를 믿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들은 율법을 지키느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율법의 행위를 하는 것을 소경이라고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종교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래도 비유적으로 말씀을 하는 것을 들었으니까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이 시대는 율법에 대해서 어느 정도 밝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의 행위가 악하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인생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종교 안에서 지키고 있는 율법의 행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을 반대를 하는 행위라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은 폐하여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제사법과 시민법만 폐하여 진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모든 문자로 기록이 되어 있는 율법이 다 폐하여졌습니다. 왜 폐하여 졌는가 하면 율법을 반포하실 때부터 우리 인생들에게 이 율법을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지만 이스라엘이 스스로 자기들이 다 지켜 행하겠다고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빛이 있으라 하셨습니다. 그 빛을 보이시기 위해서 율법을 반포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다 완전케 하심으로서 그것이 빛이 되었고 우리는 그 빛을 보고 믿음으로 영생을 얻은 자가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이방의 사도로 세우심을 받은 자입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의 대부분을 기록했다는 것을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했습니까? 도리어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유대로부터 온 거짓 형제가 율법을 지키게 하는 것을 보고 다른 복음이라고 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라고 하고 있습니까? 

복음이 아니라 다른 복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주님께서는 죄를 범하는 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범죄하는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똑똑하다고 하는 신학자들이 성경을 보고 있지만 다 소경이 되어서 율법에 대해서 바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씻으시기 바랍니다. 

무엇으로 씻어야 하는가 하면 말씀으로 씻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소경은 실로암 못에 가서 물로 씻었습니다. 그러나 이 물이 의미를 하고 있는 것이 바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모두가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사도 바울도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다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말씀을 하고 있지만 소경인 인생들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밝은 눈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내 눈을 씻어서 밝은 눈으로 보아야 예수 그리스도가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씻은 자인가 아니면 씻지 않은 자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밝은 눈을 가진 사람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소경이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예수라 하는 사람이 자기에게 말씀을 하는 그대로 행했는데 그래서 실로암으로 가서 씻었는데 밝은 눈으로 보게 되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해서 밝은 눈으로 보게 하심으로 유대인들에게 증거가 되고 있지만 그들은 영의 일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씻은 사람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받아 믿는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한 성도는 이제 더 이상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도 율법주의에 빠져 버렸고 이방의 종교도 초기 교회가 지나가자마자 종교가 세워지고 나서 율법주의로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인생으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시면 우리는 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빛을 볼 수 있게 되고 이제는 더 이상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은 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모두가 소경만 있고 그들은 씻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요한복음9:12절을 보겠습니다. (신 161쪽)

“저희가 가로되 그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눈을 뜨게 된 사람에게 묻기를 "그 사람이 어디에 있소?" 하니, 그는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을 지으시고 우리 인생들이 있게 하신 것은 바로 이 태초에 있는 생명을 주기 위해서 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태초의 생명을 주기 위해서 빛이 있게 하셨고 그 빛이 바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루신 구속의 일이며 그것에는 율법을 완전케 하신 것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종교인들은 모두가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일을 그들은 믿지를 않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일을 알아야 믿을 수 있는데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유대인들과 같이 성경을 문자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완전케 하심으로 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겠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 자기들이 지키겠다고 하나님과 언약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소경입니다. 

우리 인생은 다 영의 일에 있어서는 나면서부터 소경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세상에서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인생들이 자기들의 이성적 지식으로 성경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고 그런 그들이 도리어 악만 행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소경이 밝은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를 아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있습니다. 그가 어디 있느냐고 묻고 있고 소경은 자기도 어디 있는 줄을 모른다고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찾는 이유는 이제 뒤에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안식일에 이 소경의 눈을 뜨게 했기 때문입니다. next 1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