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방황하는 교인들에게

1강, 믿음의 정의

윤주만목사 2019. 2. 26. 16:39

 

1, 믿음의 정의

 

갈라디아서 3:6-7절을 보겠습니다. (304)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세상 모든 종교는 행위의 종교이지만 기독교만은 믿음의 종교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느냐고 한 마디로 정의를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천국에 가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선지자들을 통해 기록하시고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에서 믿음을 배우려 하기 보다는 행위를 배우고자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그것을 지금 이 시대도 역시 그대로 답습을 하고 있는 것이 바로 교회의 현실입니다

 

교회가 타락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믿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행위에 집착을 하게 되어 있고 그 행위를 따라가다 보면 당연히 마음속에 있는 믿음을 자꾸 사람들은 그것을 행위로 나타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심리는 마음에 있는 것을 보이고자 하며 자기를 의롭게 나타내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인이라 칭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이 말씀은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지면 아브라함과 같이 천국 가는 사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보고 믿음에 대한 바른 정의를 알아보겠습니다. 또한 어떻게 믿는 것이 잘 믿는 것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누구나 잘 믿기를 바라지만 잘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각자의 생각에 따라 자기의 주장이 잘 믿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심지어는 목회자들도 믿음의 정의를 모르기 때문에 이것이 잘 믿는 것이다 저것이 잘 믿는 것이다 라고 각자의 주장을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잘 믿는 것을 말하기를 열심히 새벽기도 나가고 열심히 전도하고 열심을 잘 내고 그리고 교회 안에서 어떤 행위를 잘하면 믿음이 참 좋은 사람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 합니다 또한 자기가 무엇을 조금 잘 하면 마치 믿음이 좋은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주일을 지킵니다.

그리고 시간을 내서 기도를 합니다. 또 은혜롭게 찬송을 부릅니다. 그런 행위들을 기준으로 삼아서 잘 하면 믿음이 좋고 잘 못하면 믿음이 나쁘다고 합니다. 또 죄를 많이 지면 믿음이 나쁘다고 말 합니다. 과연 믿음이 그런 것과 연결 지어서 말할 수 있는가를 이 시간에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의 기초는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면 하나님께 합격될 수 있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기준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럼 아브라함이 어떻게 믿으니까 하나님께서 의인이라고 하셨을까 라는 이 문제를 가지고 믿음의 정의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까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 가운데 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 잘 했습니다. 갈데아우르를 떠나라고 하니까 자기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럼 어떤 일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인이라고 칭하셨고 그 말을 들을 만큼 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이삭을 바쳤을 때입니까? 아니면 순종했을 때입니까?

아마 많은 교인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삭을 바치는 순종을 했을 때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인이라 칭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이 말씀은 그런즉 아브라함과 같이 믿는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과 같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아마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하면 어떻게 내가 감히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질 수 있느냐고 대답 합니다 그렇게 대답을 하는 자체가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것이며 또한 믿음이 없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믿음의 정의를 내리지 못하면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나는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생각 합니다 하늘나라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 가겠습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이 가겠습니까? 당연히 믿음이 있는 사람이 천국에 갈 것이라는 것에 있어서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사실은 믿음을 알지 못합니다.

믿음이 좋다고 하는 그들의 말을 들어 보면 믿음이 아니라 어떤 행위가 좋은 것을 보면서 믿음이 좋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을 진리의 성령의 감동으로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행위를 보면서 아! 믿음이 좋다 나쁘다 라고 말 합니다

 

냉정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스스로가 아브라함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고 나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브라함은 천국가지만 나는 지옥가야 된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 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믿음이 없다고 생각 합니다

 

믿음은 100%입니다

만약 99가지를 믿었는데 단 한 가지를 의심해서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혹시 하는 그런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사실 믿음이 좋다 나쁘다 라고 말하는 것이 맞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다 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맞습니다.

 

믿음은 있는 것과 없는 것입니다

99.99%를 다 믿었어도 0.01%를 안 믿었다면 그는 믿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는데 믿음이 있으면 100%를 다 믿는 것이고 단 0.01%라도 믿지 않으면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아 졌다 나빠졌다 그렇게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에 대한 정의를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르니까 아브라함의 믿음과 내 믿음을 비교를 하게 되고 감히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믿음과 비교하는 자체를 교만한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삭을 바쳤을 때 의인으로 칭했다 순종했을 때 의인으로 여기셨다고 생각 합니다 과연 그 생각이 맞는 가 성경을 통해 확인을 해 보겠습니다. 오늘 믿음에 대한 정의를 아브라함을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믿음이란 단어의 뜻을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사전적인 뜻은 어떤 사실이나 사람을 믿는 마음이라고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또 종교적인 믿음에 대해서는 신의 은총을 강조하는 종교에서 믿음은 신이 직접 주는 내적인 확신이나 사랑의 태도라고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제까지 막연하게 생각했던 믿음이라는 단어를 이 사전적인 뜻을 보면서 조금 윤곽이 잡힐 것이라 생각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무엇을 잘 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이 사전적인 뜻만 보아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은 어떤 사실이나 사람을 믿는 마음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국민은행을 많은 사람들이 이용 합니다 그 은행을 믿으니까 많은 사람이 돈을 예금할 것입니다 그곳에 돈을 예금하는 사람들이 국민은행을 똑같이 믿겠습니까? 아니면 다르게 믿겠습니까?

 

은행에 돈을 예금하고 언제든지 찾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믿을 것입니다 만약 은행이 예금해 놓은 돈을 안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곳에 예금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똑같이 믿고 있기 때문에 돈이 많은 사람이나 돈이 적은 사람이나 그곳에 예금을 하는 것입니다

 

그곳에 예금을 한 사람들의 사람은 악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선한 사람도 있고 거짓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정직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은행을 믿는 것을 죄인이 믿는 것과 의인이 믿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까? 아니 살인자가 은행을 믿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까?

 

예금한 사람이 죄인이냐 의인이냐가 아니고 그 은행을 믿느냐 안 믿느냐는 것입니다 믿음의 정의라고 하는 것은 그 은행에 예금한 사람 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금한 사람 편에 있다면 의로운 사람은 은행을 잘 믿고 죄를 많이 진 사람은 은행을 못 믿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은행에 예금 하는 것은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그 은행을 동일하게 믿는 믿음으로 예금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악한 일을 해서 돈을 벌었다 해도 그 사람이 그래도 그 돈을 안전하게 맡길 수 있는 곳이 은행이기 때문에 예금을 하는 것입니다 비록 자기는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었다 해도 은행을 믿기 때문에 예금을 합니다.

 

믿음이 무엇이냐?

은행에 예금을 믿고 한다는 것은 은행과 나와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은행과의 약속을 믿는 것이지 내가 은행에 대해서 어떤 행위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은행 앞에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행과 나와의 약속을 믿는데 있어 내 생애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고 은행에 내가 예금을 하면 언제든지 돈을 찾을 때 준다는 것이 약속입니다 얼마가 지나면 이자는 얼마를 주고 이런 것을 약속에 의해서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여러분이 저를 믿는 다고 하면 제가 착한 일을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착한 일을 하는 것입니까? 제가 착한 일을 해야 여러분이 저를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반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저를 믿는 다면 제가 약속을 잘 지킨 다는 것입니다

 

제가 매일 사기 친다면 여러분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안 믿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내가 사기 치면 여러분은 저를 못 믿습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데 있어서도 내편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말을 합니까?

교회 안에서 어느 집사가 헌신을 하는 그 행위를 보면서 김 집사님은 믿음이 참 좋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대한 정의가 바로 서 있지 않기 때문에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말을 아무 거리낌이 없이 하고 있습니다.

 

몰론 상대가 잘 하면 나도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마음으로 믿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내가 잘하는 그 행위를 보고 믿음이 좋다 나쁘다 말하는 것은 사실 믿음에 대해서 그 뜻을 전혀 모르고 있다고 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하시고 의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시므로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믿는 것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는 것입니다 믿음은 마음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행위를 보고 믿음이 있다 없다고 말 합니다

믿음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말을 아주 쉽게 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모르니까 문제가 많이 발생 합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의인이라고 하실 때가 이삭을 바쳤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찾아보겠습니다.

 

창세기 15:1-6절을 보겠습니다. (18))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 이니라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 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 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주겠느냐 말씀하시니까 아브람이 대답 합니다 내가 데리고 다니는 엘리에셀이 있는데 이 아이를 상속자로 잘 크게 해 주세요 라고 말하니까 하나님께서 아니다 그 아이는 네 후사가 아니다 네 몸에서 날자가 후사가 되리라고 말씀하시고 밖으로 데리고 나가 하늘을 보이면서 저 하늘의 뭇별과 같이 네 자손이 많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할 때 그 약속을 믿으니까 하나님이 의인이라 여기셨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에 아브람을 의인이라 여기셨다는 말씀은 다른 곳에는 없습니다. 순종을 잘했을 때 그런 말씀 안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별과 같이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약속했을 때 그 약속을 믿으니까 너는 의인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무엇이냐 믿음은 내 생애가 어떻게 변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의심 없이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아브람의 생애가 깨끗했을 지라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을 의심했다면 아브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브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 없이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약속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될 수가 없습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대상의 약속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믿고자 하는 사람이나 어떤 대상이 그 약속을 변함이 없이 행할 수 있을 때 자연스럽게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중에 많이 기도 합니다

하나님 내가 무엇을 계획했으니 이렇게 해 주십시오 또는 돈을 1000만원만 주십시오. 말하며 기도 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내가 복음을 위해 이 일을 하고 싶은데 하나님 내 형편을 아시니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합니다.

 

기도하면 줍니까? 안 줍니까?

믿을 때는 주고 안 믿을 때는 안줍니까?

맡길 때는 줍니까? 그럼 저도 맡겨 볼까요? 10억만 달라고요? 우리는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의심 없이 믿고 구하면 다 준다고 생각 합니다 하지만 의심 없이 믿어도 안 주십니다 하나님이 안 주십니다

 

믿음을 모르면 준다고 말 합니다

무조건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다 주신다고 말을 합니다.

오히려 안 준다고 하면 저 보고 믿음이 없다고 말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에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순교를 당할 때 자기 생명을 위해서 기도를 했겠습니까? 안 했겠습니까?

 

그냥 나이가 들어 죽는 것이라면 기도를 안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자 밥이 되고 화형을 당하는 그런 끔찍한 죽음이 눈앞에서 펼쳐지는데 기도를 안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있는 초대 교회에 순교자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순교하도록 그냥 두셨습니다. 이 기도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안 하는 것을 가지고 기도를 하면 반드시 들어 주신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그들의 마음에는 샤머니즘 적인 신앙이 자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기복주의 사상이 만연을 하면 기도를 하면 반드시 응답을 받는다고 주장을 합니다. 바알이 마음에 자리하고 있으면 기도를 해서 받을 수 있다고 말 합니다 아니 지금 교회 안에는 그런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팔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믿음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도 있고 안주시는 것도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꼭 준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 줄 수도 있고 안줄 수도 있나하면 약속이 없기 때문입니다 약속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틀림없이 주십니다. 그러나 약속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줄 수도 있고 안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믿으면 틀림없이 줍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약속한 것을 이행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 100억이라도 틀림없이 줍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안했는데도 평생을 10억 달라고 기도해도 못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약속을 믿는 것이 믿음 입니다

 

재벌의 회장이 돈이 많이 있습니다.

한번 조금도 의심 없이 찾아가서 내가 하나님 일 좀 하려는데 100만원 줄줄 믿고 왔습니다. 그렇게 말해 보세요. 그럼 어떻게 될까요? 주겠습니까? 안 주겠습니까?

 

아마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재벌의 회장이 오늘 회사로 와라 내가10억 주겠다고 말해서 찾아가면 분명히 줍니다. 약속 없는 것을 나 혼자 믿는 게 믿음이 아니고 먼저 상대방이 약속을 해서 그것을 믿고 가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약속이 안 되어 있는 것을 달라고 하는 것은 생떼를 쓰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을 드리면 좀 정신이 이상한 사람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전혀 약속을 하지도 않았는데 나에게 와서 믿습니다. 하면서 100만원을 달하고 하면 그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겠습니까? 아마 겉으로는 말 안 해도 속으로는 별 미친 사람 다 보겠네 할 것입니다

 

그런 일을 교회 안에서 하고 있습니다.

마치 그것이 믿음이 좋은 것으로 오해를 하면서 아주 생떼를 쓰면서 응답될 때까지 기도를 하라고 하면서 밤을 새우고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믿음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샤머니즘 적인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는 무당이 하고 절에 가면 더 많이 아주 지극 정성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믿음의 정의를 잘 모르다 보니 무조건 기도하다가 안주니까 실망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보니까 그 사람은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왜? 저 사람은 주는데 나는 안 줍니까 원망하면서 실망해 버립니다. 믿음의 정의를 바로 알면 실망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이미 그것을 받을 분복이 주어졌기 때문에 주신 것입니다 그가 기도를 해서 준 것이 아니라 분복이 있었기 때문에 주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그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또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기도를 해서 받았다고 무조건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사단도 얼마든지 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고 혹여 라도 사단의 놀음에 장단을 맞추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실 때 사단은 천하만국을 다 보여 주면서 그것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사단은 천하만국에 있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있지만 실상은 사단이 그 기도를 들어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복주의에 빠지게 하기 위해서 사단은 그런 기도를 들어주고 있습니다. 사실 그런 기도 응답이 내 영혼을 망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기회가 되면 다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 준다고 약속 했는데 모든 사람에게 아들 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브라함만 아들 주는 것입니다 아들 못 낳는 사람 모두에게 아들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이 있을 때 그 약속을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믿음의 정의를 통해서 지금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또한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을 하셨을 때 첫 번째는 그 약속을 믿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계약을 했을 때 1000만원 가지고 있는 사람과 1억 원을 계약했다면 그 사람은 부도가 날수 있습니다. 약속을 아무리 잘 지키려 하지만 그 능력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부도가 날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능력이 안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됩니다.

 

약속은 반드시 그 능력의 한계 내에서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서울역에서 물 한 동이를 가져 오겠다면 하면 여러분이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닷물을 이곳으로 끌어 올린다고 말하면 믿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내가 약속을 지키기가 싫어서가 아니라 제 능력으로는 바다 물을 이곳으로 끌어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달리기를 잘하는 운동선수가 신기록을 세우겠다고 하면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수도 아닌 제가 이번 대회에 출전을 해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겠다고 한다면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그것은 평상시에 내 능력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기를 하지도 않는 사람이 세계 신기록을 세우겠다고 하면 그것은 허황된 이야기입니다 믿기는 커녕 오히려 비웃음거리가 되고 맙니다.

 

약속은 반드시 그 능력 한계 내에서 해야지만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 어떤 것을 약속 했을지라도 능치 못하심이 없기 때문에 다 해 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했다면 어떤 것이라도 이루어 질줄 믿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입니다

이 세상 온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 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능력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능력은 바로 우리가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시고 또 그에게 붙은 우리가 그렇게 될 것을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믿고 있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신 이가 또한 죽은 우리를 부활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하는데 있어 주고 안주고는 누구에게 달려 있습니까?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 했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주신다. 그것은 내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달려 있습니다.

 

주권입니다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이 걸림이 되고 있습니다. 약속, 능력, 어느 정도는 믿을 수 있는데 이 주권 부분에서 사람들이 마음을 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아주 기분 나빠 하기도 합니다. 왜 기분이 나쁘냐면 자기도 생각하는 이성이 있고 또 자기도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이 주권을 믿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사상이 너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믿고 싶어도 못 믿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착한 사람 그리고 의롭게 산 사람이 좋은 대로 간다고 알고 있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천국에 대해서 너무 모르기 때문에 그런 생각에 사로 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권에 대해서 인정을 하기 싫어합니다.

 

특히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납니다.

나 역시 이 주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면 거의 100% 율법주의에 사로 잡혀 있다고 보면 맞습니다. 자기들이 잘 해서 그렇게 잘한 자기들이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잘 해도 구원을 못 받을 수 있다고 하면 아주 기분 나빠합니다. 이 부분 때문에 사실 알미니안 주의가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로마서 9:11-12절을 보겠습니다 (25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이 세상 생각으로는 완전히 엿장수 마음입니다.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택하심을 따라 부르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입니다. 만약 이 믿음이 없다면 그는 믿음이 없는 자라고 규정을 해도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왜 자기는 잘 한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나는 평생 교회에 나와서 온갖 일을 다 했는데 구원을 못 받고 죽을 때 돼서 이제 겨우 교회에 나왔는데 택하심을 따라 구원을 받는다면 평생 그렇게 헌신을 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마음이 상하겠습니까? 사실 이 주권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아주 잘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잘 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보상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고 또 남들이 휴가를 갈 때도 나는 참고 주일을 아주 잘 지켰는데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주권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받아들이지 못 합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자기가 남들보다 더 잘 했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이 주권에 대해서 강한 알레르기 반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선택을 했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이 없다고 생각을 하고 또 그럼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겠네 하면서 주권에 대해서 침해를 하고 있습니다. 정말 성경적으로 말씀을 드린다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선택을 하셨을 때는 그냥 놓아두시지 않을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강도짓만 하다가 사형을 당하는 한편 강도도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믿어야 합니다.

왜 믿어야 하는가 하면 천국의 주인이 누구 것인가를 생각하면 간단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10억 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1억 원을 누구에게 주고 싶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하고 의롭게 산 사람에게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꼭 그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자기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줍니다.

사회에 기부를 한다든지 아니면 학교에 기부를 한다든지 아니면 길가는 거지에게 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도 세상이 인정하는 보통의 상식을 따라 행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의 아버지라고 말씀을 합니다.

고아의 아버지시고 과부의 재판장이고 나그네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 가를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나 역시도 내 마음이 끌리는 사람에게 내가 가진 재산을 주려고 합니다. 역시 하나님께서도 누구의 하나님이신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나는 내 마음대로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겠다면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행하는 의로운 것을 보면 안 됩니다 우리는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을 먼저 인정을 해야 합니다. 내 행위를 보기 때문에 하나님이 불의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먼저 인정을 한다면 절대로 하나님이 불의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 죄인입니다

내가 볼 때 나는 의롭게 산 것 같아도 역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죄인이냐 아니냐 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불의하게 생각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의 눈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 아담은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아담의 허리에 있을 때 함께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에 정녕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그 후에 얼마나 선하게 의롭게 살았는가 하는 문제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 죽어야 합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택하시겠다고 주권을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리브가의 배 속에 있는 에서와 야곱 중에서 왜 야곱을 택하셨는가를 야곱의 고백에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나그네라고 자기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47:9절을 보겠습니다. (75)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왜 야곱을 선택하셨는지 이해가 됩니까?

에서는 이 세상의 주인이었지만 야곱은 자기 스스로가 나그네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계속해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언급을 하신 것은 바로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시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가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마음이 가 있는 불쌍히 여기는 그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이 주권입니다

 

성도는 나그네입니다

그리고 고와이며 과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다 똑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지만 그 중에 마음에 가는 불쌍한 자들에게 손을 내 밀고 계시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내 의를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행위가 보이는 순간 나는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그것을 보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를 못 합니다 왜 이스라엘이 망했는가 하면 바로 자기 행위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수 없었고 자기들이 당연히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자기들의 행위를 보면서 마음에 부자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알미니안 주의는 주권에 대해서 부정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인정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율법주의자들은 절대로 하님의 주권에 대해서 믿지를 못 합니다 율법을 잘 지켜야 하는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되면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그 율법의 의가 별 것이 아닌 것으로 변하기 때문에 더욱 믿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3가지 조건입니다

이 믿음은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 받는 것입니다 내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이 믿음 또한 하나님께서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너희가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믿을 수 있게 감동을 해 주시고 있기 때문에 이 세 가지를 통해서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약속, 능력, 주권을 통해서 내가 믿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내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에 절대 아닙니다.

내가 천국에 가고 싶다고 해서 가지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먼저 인정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믿음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내 스스로 믿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단어를 알면 이 믿음은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금세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 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준다고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안 주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습니다. 시간이 흘러가니까 작은 부인인 하갈에게서 아들을 낳습니다. 그 아들이 13살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아들을 보고 약속을 받았다고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이 또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말씀 하십니다 너에게 자녀를 주겠다고 말씀 하십니다 이렇게 말씀 하실 때 누가 웃었습니까? 사라가 웃었습니까?

 

창세기 17:15-18절을 보겠습니다. (17)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 하나이다

 

지금 아브라함이 웃고 있습니다.

사라가 웃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으며 그것을 성경을 보면서도 깨닫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서도 아브라함이 웃었다는 것은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사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웃었다는 것을 보고도 사라가 웃었다고 생각하면서 무심결에 지나갑니다. 왜 그러냐면 아브라함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한 번도 실수 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겠습니까?

사라가 구십 세인데 어찌 자식을 생산합니까? 이렇게 하나님께 반문하고 있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안 믿는 것입니다 안 믿는 이유는 이스마엘을 자기 노력을 나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안 믿는데 아들을 줘야 할까요? 안줘야 할까요?

 

믿던지 안 믿던지 하나님은 한번 하신 약속을 반드시 행하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믿으면 주고 안 믿으면 안주고 그렇게 생각 합니다 또한 믿다가 흔들리면 못 받는다고 생각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한번 약속한 것은 변치 않고 허락 하시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잘하던 못하던 상관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웃어도 약속을 이행하십니다. 아브라함만 웃은 것이 아닙니다. 사라도 웃었고 두 사람이 다 웃었는데도 하나님은 아들을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이냐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믿음은 약속의 관계입니다 내가 잘못하고 잘하고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약속 관계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면 하나님의 주권으로 행사하신 다는 것입니다 19절에서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말하니까 아니다 네 아내 사라가 정녕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아들을 이삭이라 하라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라고 말씀 하십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하나님 웃기지 마십시오. 라고 할머니가 어떻게 아들을 낳습니까? 반문하니까 하나님께서 아니다 할머니가 아들을 낳는다 말씀 하십니다 이제 왜 그렇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일을 행사 하시는가 아브라함이 믿지를 않는데도 아들을 주시는가 하면 그것은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에 믿음이 무엇이라는 믿음의 정의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정의는 계약관계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집을 가진 사람과 돈을 가진 사람이 계약을 합니다. 돈을 가진 사람이 계약을 마치고 돈을 지불했다면 집을 가진 사람은 집을 넘겨주어야 합니다. 이 계약이 성립되었는데 돈을 가진 사람이 계약과 관계없이 다른 일을 하다가 죄를 범 했습니다 이렇게 죄를 범했을 때 이 계약이 취소되는 것입니까? 이 계약은 계약이고 죄를 범한 것은 죄를 진 것입니다 죄를 진 것으로 인하여 계약이 파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계약에서 아브라함이 죄를 짓는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계약을 파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상황이던지 그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도 아들을 안주고 시간이 또 흘렀습니다.

 

20장에 보면 남방 그랄 이라는 곳에 가게 됩니다.

그곳에 가서 사라를 자기누이라고 속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랄 왕이 사라를 취해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랄 왕에게서 사라를 찾아 돌려보낼 때 그랄 왕이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네가 왜 나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죽을까 해서 그렇게 이야기 했다고 대답 합니다

 

창세기 20:11절을 보겠습니다. (26)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아브라함이 죽을까 해서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대 그랄 왕이 아브라함을 죽이지 않고 사라를 돌려보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깨달았습니다. 사라를 잃어버리지도 않고 아내로 인하여 내가 죽지도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확신이 왔습니다. 아직 이삭이 없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를 헤어지지 않게 하고 또 우리 둘을 통해서 아들을 주실 분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왜냐면? 잃어버린 아내도 찾아 주시니까요

이때 마음이 흔들릴 수 있겠습니까? 흔들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주시기까지 나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 했습니다 이 확신이 왔을 때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이 아들을 주셨습니다. 이해가 되시겠습니까? 왜 아들을 주신다고 하시고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를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아브라함의 생애를 잘 모릅니다.

지금 말씀을 보면서 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는 것을 늦추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약속한 것에 대해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빨리 얻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늦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더 빨리 줄 수도 있는데 그런 확신이 안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확신을 가질 때 까지 기다렸습니다. 기다리시는데 흔들리게도 만들면서 믿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이렇게 흔들리면서 하나님을 더 믿고 신뢰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확신이 왔을 때 하나님은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진짜 우리의 믿음의 조상입니다 믿음의 조상입니다

믿음이 무엇이냐 믿음의 정의를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세워서 아들을 금방 안 준 것은 우리가 아브라함을 보면서 믿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함 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어떤 나의 행동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약속 했는지를 알고 그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는 것이 믿음 입니다

 

그랄 왕에게서 잃어 버렸던 아내를 찾아 주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진짜로 흔들리지가 않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확신할 때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은 이삭입니다 우리나라 말로하면 웃음아 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웃음이라고 지었느냐고 하면 백세 된 가정에 아들을 주어서 즐거워서 이삭이라고 지었다고 말 합니다 그 말도 어느 정도는 맞지만 사라가 웃고 아브라함도 웃고 다 웃으니까 너희들 왜 웃냐 말씀 하시면서 이름을 웃음이라 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그냥 보아 넘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네가 그것을 잘못했다고 지적 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지적해 주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하면 여러 가지 환경을 통해서 지금도 역사하심으로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창세기 18:11-15절을 보겠습니다. (18)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 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서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두려워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 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사라가 안 웃었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아니다 네가 웃었다고 말씀 하십니다 사실은 모르게 속으로 웃은 것인데 하나님이 모르는 줄 알고 안 웃었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지적해 주십니다. 믿음 때문에 그것을 지적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잘못되어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것을 지적해 주십니다.

 

우리가 믿다가도 흔들리면 그 때 하나님은 우리를 지적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이 그것을 깨닫고 견고해 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 마다 자기가 실수 했던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들만 보면 그것이 잊어버리지가 않습니다.

 

그 아들을 그렇게 낳았기 때문에 아들을 볼 때마다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도 마찬 가지입니다 믿음이 흔들려서 넘어졌던 것을 그것이 생각날 때 마다 내가 그때 왜 그렇게 했지 하면서 내가 하나님을 잘못 믿었어, 생각 하면서 같은 다짐을 하게 됩니다 그런 실수로 인하여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다짐을 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셔서 어떤 말을 할지라도 절대로 웃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속의 다짐을 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이제 되짚어 보면 창세기151-6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준다는 약속을 말로만 하셨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보면 나이도 있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힘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때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랜 후에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경수가 끊어진 사람은 태가 죽은 것이므로 의학적으로나 어떤 방법으로는 아들을 낳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불가능한 일이 자신에게 가능한 일로 이루어 졌습니다. 이런 불가능한 것이 가능한 것으로 바뀌었을 때 믿음이 흔들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 가지입니다

여러 가지 환경을 통해서 그리고 삶을 통해서 하나씩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견고해 지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믿음이 점차 구체적으로 내 안에 확신이 들게 됩니다. 그런 패러다임을 하나씩 겪어 나가면서 믿음이 더욱 견고해 지고 있습니다.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담대하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그것을 통해서 믿음이 더욱 견고해 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정말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법들을 통해 사람마다 다르게 또는 같은 모양으로 역사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통해, 예배를 통해, 봉사를 통해, 사랑 등을 통해서 우리가 어느새 믿음이 견고해 지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라가 이삭을 낳고 이 아들이 오래 자라도록 하나님이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서 어떤 말을 하셔도 웃지 않고 믿겠다고 다짐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나타 나셔서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 하십니다

 

? 이삭을 바치라고 하시는지를 보겠습니다.

 

창세기 22:1-2절을 보겠습니다. (22)

그 일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 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그 일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 하십니다

처음에 아들을 준다는 약속을 믿었다가 흔들렸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흔들리고 있는가를 다시 한 번 시험 하십니다 처음에 하나님이 하늘의 뭇별과 같이 네 자손이 많으리라고 말씀하실 때 아브라함이 믿습니다. 하니까 너는 의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에 시간이 흐르니까 어떻게 아들을 낳습니까? 라고 반문 합니다

처음에 완전히 믿었을까요? 안 믿었을까요? 처음 약속하실 때 완전히 믿었습니다. 그런데 주신다고 한 것이 25년이 넘게 흐르니까 안 믿어 진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노력으로 낳은 아들이 이만큼 자랐습니다. 이스마엘은 자기 노력으로 낳은 아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의 노력이 이만큼 자랐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의롭게 살아진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의롭게 살아지면 약속만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내가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내 노력이 이만큼 자라게 되면 내가 해도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의 열심을 마치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나타내려 하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자기 노력으로 낳은 것이지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자기 노력에 의해 이스마엘이 자라는 것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되냐면 하나님이 주신다고 하셨어도 할머니에게서 낳는 것이 아니고 내가 젊은 사람을 취해서 낳게 된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들을 주신다고 하셔도 백세 된 자가 어떻게 아들을 낳습니까? 사라가 구십 세인데 어떻게 아들을 낳습니까? 반문을 합니다.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질문입니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복음을 가르쳐 줘도 안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 자기가 해보니까 됩니다. 지금 자기가 열심을 내니까 새벽기도회도 나가고 모든 모임 또 은혜 받으러 많이 다닙니다. 그리고 봉사도 하고 헌신도 합니다. 그렇게 해 보니까 실재로 되니까 이렇게 반문 합니다

 

어떻게 믿어서만 되냐고 열심을 내고 노력을 해야 된다고 말 합니다

그러면서 믿음도 있고 행위도 있어야 그것이 바른 믿음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또한 믿음은 약속을 믿는 것이라 설교를 하면 그럼 행동을 아무렇게나 해도 좋습니까? 반문을 합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행동을 아무렇게나 하라고 하겠습니까?

사실 행위를 잘해 보려고 해도 안 되는 사람은 그런 말이 안 나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잘되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믿어서만 되냐고 심지어 공격을 합니다. 이단이라고 까지 말합니다. ? 내 행위가 이만큼 자랐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행위가 이만큼 자라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내 행위가 눈에 보이기 시작을 하게 되는 순간에 믿음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서 이스마엘이라는 율법의 의가 보이는 순간 내 노력에 의해 되어진 것이 보이게 되는 순간 믿음은 저만치 사라진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삭을 바친 것이 순종 입니까? 믿음입니까?

하나님께서 네 아들이삭을 모리아 땅으로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순종 입니까?

 

이문제가 해결이 안 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순종이란 뜻은 말한 것이 그대로 하는 것을 말 합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번제로 드린 것 같이 순종하라고 말 합니다 너희도 아브라함과 같이 순종하라 이렇게 사람의 생각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것이 진짜 믿음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교회 안에는 이삭을 드린 것을 순종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고 믿음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고 믿고 순종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일 많은 사람이 믿고 순종이라고 말 합니다 물론 믿고 순종이란 말이 전혀 틀린 말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세워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 입니다

 

말씀대로 하면 순종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순종이 아니고 믿음 입니다

이삭을 낳기 전에 아브라함은 그랄 왕에게 사라를 빼앗겼다가 하나님께서 찾아 주십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약속을 성취시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라를 통해 분명히 아들을 주실 것이 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 나는 이삭을 낳기 전에는 절대로 안 죽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삭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이삭이 낳기 전인데 자신이 죽을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죽지 않고 사라를 다시 찾아올 때 자신은 이삭을 낳기 전에는 절대로 안 죽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은 그를 다시 살려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기 전에 죽을 수 없는 것같이 이삭도 야곱을 낳기 전에 죽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왜? 이삭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게 많게 해주신다고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이라고 명령 하셨지만 이삭이 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이삭을 통해 하늘의 별과 같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많아지려면 절대로 이삭이 죽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삭이 죽으면 하나님이 다시 살려내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삭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아브라함이 하는 것이고 이삭을 통해서 네 자손을 주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이삭이 그냥 죽는 다면 하나님은 거짓말 장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셔야 하기 때문에 이삭을 살려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 약속을 성취 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자기가 이삭을 죽여도 하나님이 살리실 줄 믿었습니다. 이삭을 살리실 줄 확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은 죽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을 한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안 죽을 것을 확신했으며 설령 자기가 번제로 드릴지라도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라도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습니다.

 

히브리서 11:17-19절을 보겠습니다. (365)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 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 이니라

 

순종으로 드렸다고 안하고 믿음으로 드렸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믿음은 약속이 있어야 하는데 17절에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다 라고 말씀 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하늘의 뭇별과 같으리라는 이 약속을 이삭을 통해서 주시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삭을 통해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므로 이삭이 죽지 않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19절 말씀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을 생각한지라 이것을 믿었으므로 다시 살리신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죽였다가 다시 살리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어차피 살아야 한다면 죽은 줄 믿고 살리신 줄 믿고 돌아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문제는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다음에 행함이 있는 믿음이나 야고보서 강해를 통해 자세히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의 정의는 약속을 확실히 믿는 것입니다

 

로마서 4:19-22절을 보겠습니다. (244)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 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그가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았다고 말씀 합니다 그럼 약속을 의심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 됩니다. 믿음이 있는 것은 약속을 의심치 않는 것이고 믿음이 없는 것은 약속을 의심하는 것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이 있다면 신앙생활을 열심히 잘하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의심하면서도 신앙생활은 열심히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런 사람을 보고 믿음이 좋다고 말 합니다 믿음은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는 것이 믿음이 있는 것이지 열심내고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는 어떤 일들을 잘하는 그런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 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약속한 것을 확신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을 저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럼 아브라함만 확신하면 믿음 있는 사람입니까? 우리도 약속한 것을 확신하면 믿음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약속에 대해서 확신을 하게 되면 믿음이 있는 성도입니다

 

23절에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아브라함이 약속한 것을 의심치 않아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았으면 우리도 약속한 것을 의심치 않으면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약속한 것을 의심치 않으면 의인이라고 해주실 것 아닙니까? 아브라함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이 차이가 나겠습니까? 같습니까?

 

베드로후서 1:1절을 보겠습니다. (284)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믿음은 동일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나 사도 바울의 믿음이나 또 지금 이 시대 내가 믿는 믿음이나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초대 교회의 믿음의 선진들도 예수를 믿어서 천국에 갔고 또 지금 나 역시도 예수를 믿어서 천국에 갑니다. 믿음은 그런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가를 정의를 내려 주신 것이지 아브라함의 믿음이나 내 믿음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또한 사도들의 믿음이나 내 믿음이 조금도 다를 수 없습니다. 물론 행위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믿는 믿음은 조금도 다를 수 없습니다.

 

성경은 동일한 믿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 내가 믿음이 떨어졌어! 이런 말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번 받은 믿음은 다시 떨어질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처음 믿었던 그 믿음으로 믿음의 조상으로 세움을 입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한번 믿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그 믿음은 영원히 지속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 주셔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다만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열심을 했을 뿐이지 그에게는 처음부터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지금은 믿음이 떨어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믿음은 절대로 떨어질 수도 또 약해 질 수도 없다는 것을 믿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믿습니까?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하셨습니까?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을 준다고 약속하셔서 그것을 믿어서 의로 여기셨다면 우리에게는 무엇을 약속하셨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천국 보내주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요한일서 2:25절을 보겠습니다. (390)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 이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의심치 않을 때 우리는 받은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았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은 것을 확신한다면 우리도 의인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영원한 생명은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받았으므로 그 은혜에 빚진 자로서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이 세상에서 잘 사용하는 것이 축복받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열심과 믿음을 구분 못하는 신앙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행위와 믿음을 구분을 못하고 있습니다. 내 행동은 늘 변할 수 있습니다 잘할 때도 있고 못할 때도 있습니다. 어떻게 일평생 잘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잘하면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믿음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열심을 잘 내면 믿음이 좋고 열심이 좀 떨어지면 믿음이 없다고 말 합니다 행위를 조금 잘 하면 믿음이 좋고 행위가 나쁘면 믿음이 없다고 말 합니다. 그것은 믿음이 변한 게 아니라 열심이 조금 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행위가 조금 나빠진 것입니다 내가 열심을 좀 못 내더라도 믿음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내 열심이 잠시 주춤하는 것이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행위와 믿음은 다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2절을 보겠습니다. (305)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지금 이 시대 율법주의에 너무 빠져 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믿음이 좋은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교회 안에서 삼가 지키고 있는 율법의 행위를 보면서 자기가 그 행위를 하는 것을 보면서 믿음이 좋다고 말하기도 하고 그 율법의 행위를 못하면 믿음이 나빠졌다고 말 합니다

 

너무 어리석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는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고 못하는 것은 그 율법의 행위가 변한 것이지 믿음이 변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는데도 삼가 지키고 있는 율법의 행위를 보면서 믿음이 좋다고 말 합니다 그것은 율법의 행위가 좋은 것이지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마음에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행위는 나를 통해 삼가 지키고 있습니다. 믿음과 율법을 혼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사람의 믿음을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와 감히 비교를 하고 또 그것을 통해 믿음을 보이려는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믿음은 너무 귀한 것입니다

그 귀한 것을 변질 시키려 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사람들은 잘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물론 잘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신앙인들 100명에게 물어보세요? 모두가 사도바울처럼 아니면 요셉처럼 살고 싶다고 할 것입니다 누군들 그렇게 안 살고 싶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에는 거지 나사로도 있고 세금을 착취한 삭개오도 있고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마리아도 있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맞이하는 한편 강도도 있습니다. 그렇게 아무렇게나 살라고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안 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정말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데도 연약해서 안 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씀으로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주신 믿음은 세상 어느 것과 바꿀 수 없을 만큼 고귀한 것입니다

 

유다서 1:20절을 보겠습니다. (398)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믿음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지극히 거룩한 믿음이라고 유다서는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또 믿기 싫다고 해서 안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자들에게 주시는 믿음이기에 이 믿음이 지극히 거룩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우리 보다 더 나아서 믿음의 조상으로 택하신 것이 아니라 지극히 거룩한 믿음에 대해서 정의를 내려 주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믿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역시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지금 내가 믿는 믿음 또한 하나님이 주신 지극히 거룩한 믿음입니다.

 

믿음을 싸구려 취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혹자들은 믿음을 아주 싸구려 취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닌 율법의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극히 거룩한 믿음의 비밀을 모르기 때문에 믿음을 싸구려 취급을 하고 있습니다.

 

이 지극히 거룩한 믿음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 믿음을 가르쳐 주시고 있고 아브라함이 어떻게 믿음이 견고해 졌는가를 성경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렇게 아브라함과 같이 늘 믿음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를 확증하면서 믿음의 기초위에 서려고 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종교는 너희가 변해서 오라는 것이지만 우리 주님은 너희는 진토이니까 못하는 체질이니까 내가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3:22절 말씀과 같이 차별이 없는 은혜입니다 믿음은 오직 약속을 의심치 않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의인이라고 칭할 때 그가 무엇을 잘해서 의인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의심치 않고 믿었으므로 의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으면 하나님께서 의인이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7절에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면 너희도 천국 간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제 여러분의 믿음과 아브라함의 믿음이 똑같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이 주님오시는 날까지 요동치 않기를 믿습니다. 이 세상사는 동안 주님만을 바라보고 헌신하는 삶이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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