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은 믿음으로 38강
로마서5:4절을 보겠습니다. (신 245쪽)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인내를 하시기 바랍니다.
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애매히 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환난이 인내를 낳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는 환난으로 인하여 더욱 인내할 수 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천국을 가기까지는 정말 광야와 같은 삶이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그곳은 축복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이 시대는 교회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기복주의가 들어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 세상에서 복을 받는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어서 이러한 복을 받았다는 간증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어서 복을 받았습니까?
물론 구약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예표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복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 그 말씀을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초대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이 세상에서 복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까?
사도들이 복을 받았습니까?
그렇다고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복을 받았습니까? 복이 아니라 도리어 세상에서 고난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말을 하고 있고 그 대표적인 것이 십일조를 함으로 해서 복을 받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느 사도가 성도들로부터 십일조를 받았습니까? 신약에 와서 어느 사도가 받았다는 말씀이 있습니까? 초대교회에서는 십일조를 내지도 않았고 또 이 세상에 복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세상의 복을 받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그 복이 저주로 온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그것은 광야 40년 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모형으로 가나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가나안에 들어가기 까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불과 15일 정도면 들어갈 수 있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광야에서 40년간을 인내하면서 살았습니다.
교회는 축복의 장소가 아닙니다.
천국을 바라보면서 인내를 해야 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교회가 축복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너무 부자가 되어서 그 돈을 주체를 하지 못할 정도가 되니까 그것을 자기들의 생각에 좋은 일에 쓰겠다고 하면서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개 같은 자의 소득을 십일조로 받아서 선교를 하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회입니다
어떻게 합니까?
자기들이 한 행위를 가지고 마음껏 자랑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넘치는 돈으로 가난한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고 또 거기를 다녀와서 자기들이 한 행위를 가지고 자랑을 하면서 마음에서는 한껏 부자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인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넘치는 부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있어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사실 그런 돈이 어디 있습니까? 초대 교회를 보아도 사도들이 얼마나 어렵게 이방에 복음을 전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지금과 같이 십일조를 받고 선교헌금을 받고 예배 때마다 여러 가지 명목으로 헌금을 받았다면 사도들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초대교회에 성도들은 그렇게 부자가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구원을 받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런 인내가 아닙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받는 인내를 말씀하는 것이지 세상에서 종교 활동을 하는 그런 인내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 교인들은 너무 불쌍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인내합니까?
솔직히 교회에서 요구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그들은 정말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고 누릴 수 있는 것 안 누리고 다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인간적으로 인내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주님이 오실 때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게 된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되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인내가 아닙니다.
그것을 인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까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믿음으로 의로 여기심을 받아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탄생이 되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을 굳세게 세우기까지는 많은 미혹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입니다
보기에 얼마나 좋습니까? 지금과 같이 근사한 예배당이 있고 그 안에는 성가대가 있고 또 여러 가지 사람을 감동시키기 좋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사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리고 그런 일들이 사람에 이성에 옳게 보이고 또 종교는 그렇게 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이 있다고 칭찬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편지를 보면 그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잘한 행위를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아니 법대로 잘하고 싶어 하고 있고 그것을 칭찬 받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런 것을 인내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은 일입니다
야고보서1:3-4절을 보겠습니다. (신 371쪽)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시험이 옵니다.
율법은 늘 우리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은 것을 믿는 일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사람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해가 안 되는 그것이 우리 안에서 역사함으로서 이 시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반드시 시련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구원을 받는 것을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 구원을 받는 일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마치 이것을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도리어 어떻습니까?
그것이 우리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그 행함이 있는 믿음을 말씀하기 위해서 야고보는 처음부터 시험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고 그런 행함이 있는 믿음이 시련을 오게 하고 있고 그 시련에서 인내를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율법을 버리는 행함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버리는 행함을 가지게 되면 시험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율법주의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이 말씀이 잘 이해가 되지 않을지라도 여러 가지 시험으로 우리를 시련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육체입니다
끊임이 없이 시험을 해 오고 있습니다. 그 시험을 끝까지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말 내 지체를 잘라 버리는 것과 같은 시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시험이 나에게 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쉽습니까?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쉽습니까? 물론 온전히 율법을 다 지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정해서 지킬 수 있는 율법을 지키는 일은 쉽습니다. 율법을 아예 지키지 않는 것보다는 쉽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어서 율법을 하나도 지키지 않는 것은 마치 시련이 오는 것과 같이 어렵습니다.
인내를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지체는 끊임이 없는 정욕으로 나를 견디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험을 이기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그 인내가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인내를 말씀하는 것은 구원에 대한 인내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중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환난이 있고 그 환난이 인내를 만들고 인내가 연단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연단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시험으로 우리를 연단하고 있고 시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인내를 온전히 이룸으로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없으면 이 시험에서 이기지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좋습니까?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좋습니까? 교회를 지어 놓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가대가 있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좋습니까? 그런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까? 물어보는 제가 더 이상합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말하나 마나입니다.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여러분에게 때로는 시련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야 합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을 때까지 우리는 온전히 이루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율법에 대해서 수도 없이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어떠한 시험이 와도 이제는 그것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까지도 내 안에 있는 성령이 역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야고보가 누구에게 이 서신을 보내고 있습니까?
흩어져 있는 유대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입니다 그들이 조상 대대로 율법을 지켜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이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당시 시대 상황을 잘 이해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회당이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모입니다. 그 안에는 율법주의자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야고보가 이 서신을 보내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다가 어느 날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이겠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지 말아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회당에서 율법주의자가 많으면 엄청나게 시련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에서 인내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여러 가지 시험이 있습니다. 아마도 경험을 하신 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편지에 나오기 전에 교회에서 나올 때 그들이 여러 가지 말로 시험을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있는 가운데서 율법을 지키지 않을 때는 엄청나게 시험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시험을 해서 안 넘어 오면 이제 시련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편지도 역시 그럴 수 있습니다 제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은 누구도 장담하지 못 합니다 그런 일이 있는데 여기에서 누군가 율법주의로 돌아서서 그가 말씀을 전하고 있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처음에는 시험을 하지만 나중에는 시련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인내입니다
저는 성도님들을 믿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여기를 거쳐 지나간 사람들은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교제하고 있는 지금 이 자라에 있는 성도님들은 이제 더 이상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나 야고보가 전했던 초대교회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몰랐고 실제 그렇게 되었습니다.
골로새서3:5절을 보겠습니다. (신 327쪽)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연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인내는 연단을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세상을 사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도 세상입니다 교회가 세상이 아니라는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불교의 사상이 그대로 들어와서 성경에서 세상이라고 말씀을 하면 마치 교회 밖을 말씀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인내는 연단을 이룹니다.
어떻게 연단을 해야 합니까? 땅에 있는 지체를 죽여야 합니다. 정말 교회에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6절에서 이것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입니다
말씀을 보면 도무지 무슨 말씀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을 성경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땅에 있는 지체가 무엇입니까? 내가 땅에 있는 지체입니다 내 육체가 땅에 있는 지체입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내 육체가 땅에 있는 지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 지체를 죽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내 육체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노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육체 그리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의 욕심이 무엇입니까? 율법을 잘 지키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이 욕심이라는 말씀입니다
연단입니다
내 지체를 죽이기까지 여러분이 연단을 받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반드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죽이라고 하면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너무 살아 있습니다. 그 지체를 주체를 하지 못해서 욕심에 사로 잡혀서 온갖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내를 하는 성도만이 연단을 받습니다.
땅에 있는 내 지체를 죽이기까지 연단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더 살리라고 조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 지체가 살아서 하고 있는 행위를 간증이라고 하고 있고 또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말씀을 하는데 듣지를 않고 있습니다.
목사입니까?
그가 유명한 목사입니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목사들을 보면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기보다는 땅에 있는 지체로 욕심을 부리게 만들고 있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시기 바랍니다.
지체가 죽었으면 율법을 지켜서는 안 됩니다 죽은 시체가 무슨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자기 지체를 죽이지 않고 율법을 지키고 있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믿음이 있다면 이러한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인내로 자기 지체를 죽이는 연단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자기 지체를 죽이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말로는 참 잘하고 있습니다. 자기 육체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은 참 잘하고 있습니다. 전혀 죽이지 않고 있는 사람이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말로 자기가 어떻게 지체를 죽였는가를 이야기를 하는데 실제로는 도리어 지체를 더 살리고 있습니다.
죽었습니다.
그 죽는 자가 무엇을 합니까? 여러분이 어떠한 행위를 하고 있다면 그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지 않은 사람입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인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예배를 드립니까?
그 예배를 드리면서 찬송가를 부르고 있습니까?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교회에서 여러 가지 헌금을 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해야 하는 마땅한 일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지체가 살아 있기 때문에 하고 있습니다. 제가 예배를 하는 것 까지도 반대를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십일조를 내고 있습니다.
주일이라는 날에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여러 가지 예배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교회에 교인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서 전도를 하고 있습니다. 또 십여 가지가 넘는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하고 있습니까?
땅에 있는 지체가 살아서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땅에 있는 지체가 죽었다면 그러한 행위들을 하지 않습니다. 아니 못 합니다 인내가 연단을 이룬다는 말씀을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기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지 못 합니다 아니 죽이는 순간에 시련이 찾아오고 그 교회에 더 이상 나가지도 못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연단에서 이겨내지 못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을 겁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라
지금 기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행위들을 하지 않고 있습니까? 이 가운데 한 가지라도 안 하고 있는 교회는 없습니다. 다 하고 있으면서도 성경을 모르니까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지 않고 교회 안에서 이러한 일들을 다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내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기를 위해서 인내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땅에 있는 지체는 이것을 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 땅에 있는 지체가 살아 있어서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고 그 행위가 믿음을 막고 있습니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거짓말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 여러분은 속고 있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지 않고 그 지체로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당연히 환난을 받고 인내를 하고 있고 그 인내가 연단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하고 있다는 그 모든 율법의 행위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지 못해서 하고 있는 악한 행위며 그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여러분에게 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연단이 있어야 하는데 이 시대는 복음을 듣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먼저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그 복음을 듣는 성도가 믿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믿음이 있는 성도는 율법의 행위에 속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그렇게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영이 있는 성도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이러한 일이 믿어지는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을 이루지 않았다면 이 은혜를 우리가 믿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은혜에 들어감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면 환난이 온다는 말씀입니다 그 환난이 인내를 하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인내가 내 지체를 죽이는 연단을 하게 해서 그 지체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이러한 영의 일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아서 성경 말씀을 보고는 있지만 소경과 다름이 없습니다.
잠언17:3절을 보겠습니다. (구 929쪽)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은입니다
그리고 금입니다 실제 도가니는 은을 연단해서 은을 나오게 하고 있고 풀무는 금을 연단해서 금이 나오게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은은 믿음을 비유로 하고 있고 금은 생명을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마음을 연단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연단합니다.
이상한 이야기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마음을 어떻게 연단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 마음에 무엇이 있습니까?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어떻게 연단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믿음에 굳세게 서게 하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입니다.
마음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사람들은 믿는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믿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편지에 있는 성도님들이 마음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렇게 마음으로 믿기까지 하루아침에 내가 믿겠다고 해서 믿어졌습니까?
아닙니다.
연단을 했습니다. 정말 많은 연단을 받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동일한 믿음으로 서기 까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 하셨습니다. 믿음이 하루아침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수많은 갈등이 있었고 정말 내가 믿는 것이 맞는가 하는 의구심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셔서 우리가 이제 마음으로 믿고 있습니다.
연단을 받았습니다.
마치 도가니에서 은을 연단한 것과 같이 풀무에서 금을 연단한 것과 같이 우리 마음을 연단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연단을 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제 율법의 행위에 속하지 않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새사람이 지으심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냥 믿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가 믿어지기까지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로 믿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연단하시는가 하면 우리가 마음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있는 성도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의 마음을 연단하시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연단하시고 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연단 받은 성도는 이제 자기 지체를 죽이고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경륜을 마음으로 믿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그 믿음이 있어서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1:7절을 보겠습니다. (신 377쪽)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우리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얼마나 귀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믿음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믿음이 아무에게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니 믿음이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 하면 불로 연단하면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계속해서 이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믿음에 대해서 말씀합니까?
금보다 더 귀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가 있는 금보다 더 귀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시련을 받고 있습니다. 연단을 받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냥 믿으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시련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시련입니까?
우리를 무엇에서 연단을 하고 있습니까? 사람의 이성으로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백번 옳습니다. 저 역시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이성으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옳습니다. 제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입니다
저도 이렇게까지 율법에 대해서 말씀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답답하기만 합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제 이성으로도 백번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옳은데 성경이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 믿음이 율법에 대해서 바로 이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불로 연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내 지체는 끊임이 없이 율법을 지키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이 믿음으로 율법에 대해서 이렇게 연단을 받고 있습니다. 정말 사람의 이성으로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시 돌아보고 또 돌아보게 만들 정도로 우리를 시련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생의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영생의 문제가 아니라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사람의 이성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도 믿고 율법도 잘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너무도 좋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율법을 지키는 자는 그 의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고 죽는 문제입니다
구원에 대해서 이렇게 연단을 받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에 대해서 우리가 환난을 당하고 그 환난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받게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이룬 성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 영이 있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제까지 영의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삶이 아니라 영혼 구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있는 성도는 환난을 당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환난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생을 이렇게 받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경을 다 육의 일로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디도서1:2절을 보겠습니다. (신 348쪽)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연단입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께서 연단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불로 이겨낼 믿음을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디에서 인내를 해서 연단을 하는가 하면 우리 지체에서 인내를 하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 의를 죽이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입니다
태생적으로 의롭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누가 죄인으로 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인생은 다 의롭게 살고자 합니다. 처음부터 죄인으로 살고 싶어 한다는 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 사람이 일부러 알면서도 죄를 지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실상은 더 악한 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을 봅니다.
그러면 사람은 정신을 차리지 못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의롭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 중에 율법을 안 지키는 사람이 없는 것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성경의 정의입니다
율법을 정말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한 가지를 지키면 모든 율법을 다 지켜야 하는 의무가 주어지고 그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율법의 기능을 모르고 자기가 하나님의 성도로서 조금 더 의롭게 살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성경은 율법을 지키면 진노를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싸움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 율법으로는 저주를 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셔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해서 의로 여기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영을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탄생이 되게 하는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고 싶어 합니다.
율법으로는 죽는데도 지키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사람의 이성입니다 이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우리는 환난을 받고 있고 그 환난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로 알고 있다고 사도 바울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소망이 무엇에 대한 소망인가 하면 영생의 소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연단이 소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영생이 소망을 이루는데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영생의 소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영생을 성도가 어떻게 이루는 가를 사도 바울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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