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복음과 율법

2강, 이는 첫째 부활이라 ​​​​

윤주만목사 2018. 3. 21. 20:45


요한계시록20:4-6절을 보겠습니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내세입니다

우리는 내세에 대해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인들을 보면 내세를 아주 구체적으로 그리고 사실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내세에 대해서 다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 비유를 너무도 잘 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천국입니다.

그곳은 우리 사람에게 설명이 안 되는 곳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천국에 대해서는 성경도 별로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비유를 하면서 같더라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뭐와 같은 것이지 그렇다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는가 하면 이 내세를 사람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을 하게 하시고 그것을 성경에서 보고 믿음으로 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고 또 그것으로 내세를 믿을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그것을 이해를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아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내세는 그냥 같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사람의 이성으로 이해가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다른 말씀들과 같이 비유로 말씀을 했고 그것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내세의 일은 성경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말씀을 하고 있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다른 말씀 같으면 구약에서 그리고 신약에서 찾을 수 있게 기록해 놓았는데 내세의 일만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먼저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입니다

물론 비유의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세를 실제로 말씀을 할 때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각각에 하는 말이 서로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대로 상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세의 일은 절대로 마음대로 상상을 하면 안 됩니다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경계를 서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마음대로 상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상상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상상이 상상을 키워서 나중에는 감당하지 못할 것을 생각을 하면서 그것이 마치 실제가 되는 것과 같이 행동을 하게 됩니다.

쉽게 말씀을 드립니다.

칠흑과도 같은 밤입니다. 그런 날에는 거의 그림자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자라는 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어서 수시로 변하고 있습니다. 그럼 때로는 그림자가 사람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실제는 그림자인데 상상을 하다보면 사람으로 보인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됩니까?

나중에는 진짜 사람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실제는 나무와 같은 물체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인데 그것이 사람으로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실제 자기 눈으로 똑바로 보아야 하는데 상상을 하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 실탄을 가지고 경계를 서고 있는 군인들에게는 상상을 하지 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세의 일도 그렇습니다. 사람은 어떤 글을 보면 그 글을 보면서 여러 가지로 상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상들이 이 시대 요한계시록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혼란을 겪게 만들고 있습니다. 더구나 내세의 일이다보니까 주장하면서 큰 목소리를 내면 그만인 경우가 다반사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물론 내세의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단 한 가지라도 성경에서 잘못 해석을 하게 되면 그것이 스스로를 올무에 걸리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성경을 다 알 수는 없다는 것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모르면 어떻게 합니까?

차라리 모른다고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사실 우리 인생은 아무리 성령이 오셨다 해도 성경을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마치 모든 성경을 다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절대로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입니다

반드시 진리로 인도함을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 있어서 주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구원에 있어서는 진리로 인도함을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꼭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면 그 말씀에 대해서 모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정말 주의 깊게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가능한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때까지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성령이 나에게 오셨어도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성경을 많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더욱 든든히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 마음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은 성도입니다 제가 이것을 의심하고자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한 일을 이제는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붙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이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요한계시록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순서대로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이 시대 많은 목사들이 요한계시록을 거의 순서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환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우리가 꿈을 꾸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꿈 입니다

순서가 있습니까? 우리가 꿈을 꾸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때는 정말 이 꿈이 무슨 꿈인가 할 정도로 뒤죽박죽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어느 때는 순서대로 꿈을 꿉니다. 그러나 어느 때는 마치 순간 이동을 하는 것과 같이 전혀 다른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와 같습니다.

우리가 꿈을 꾸는 것과 같이 사도 요한에게 환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내세의 일은 순서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그렇다는 말씀이 아니라 어느 것은 순서대로 환상을 보았고 어느 것은 전혀 순서와 상관이 없이 환상을 보았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도 마찬가지입니다

1-3절까지는 전혀 다른 환상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4절 초반입니다 5-6절까지가 전혀 다른 환상입니다 또 7-10절까지가 다른 환상이고 11절이 다른 환상이고 12-15절이 그렇습니다. 먼저 이렇게 환상을 보는 것에 대해서 정리를 하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환상을 보고 서로 연결이 되어 있는 것으로 보게 되고 이상하게 해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1-3절입니다.

그리고 다른 환상을 4절 초반부를 보았습니다. 4절 중반부터 6절까지 보았습니다. 1-3절에 연결을 해서 7-10절까지 환상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11절을 보고 있습니다. 12-15절까지 다른 환상을 보고 있습니다. 제가 보는 성경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요한계시록을 사람들이 더 어렵게 보고 있습니다.

 

또 내가 보니

이 말씀을 하고 있으면 전혀 다른 환상이라는 것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합니다. 4절 같은 경우에는 한 절 안에서 또 내가 보니 가 두 번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환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장절이라는 것은 신학자들이 후대에 사람들이 성경을 보기 쉽게 붙인 것임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3:21절을 보겠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보좌입니다

심판의 보조라고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에게 환상으로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김입니다

그것을 요한일서에서는 우리의 이김은 믿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주님이 보좌에 앉으신 것과 같이 보좌에 앉게 해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 앚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세입니다

저도 모릅니다. 우리가 보좌에 어떻게 앉을 수 있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내세는 전혀 모릅니다. 보좌가 있다는 말씀을 보고 우리는 보좌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3장에서 말씀을 하는 것과 같이 보좌에 앉는다고 하니까 우리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보좌들입니다

그것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앉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가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는 것과 같이 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로 알아야 합니다. 그 이상을 생각하면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세의 일입니다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 이상을 마음대로 상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세의 일을 볼 때는 정말 이것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음대로 상상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덧 붙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내세에 들어가서는 그렇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20장 4절의 말씀이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여기 앉은 자들이 누군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3장의 말씀을 보면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가 아닌가 생각을 해 봅니다.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사실 이 말씀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겨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좌에 앉아서 심판을 하고 안 하고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은 것이 중요합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심판하는 권세가 무엇이 중요합니까?

성경을 볼 때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알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반드시 이겨서 구원을 받은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중요하지 않은 것에 너무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6:9절을 보겠습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요한일서 5:8절을 보겠습니다.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또 내가 보니

이제 중요합니다. 누가 구원을 받는 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구원을 받은 사람이 누군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알아야 나도 구원을 받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들의 영혼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증거입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가 있는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목 베임을 받은 자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목 베임을 받은 자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입니까?

저는 우리는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순교를 당할 일이 거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사실 우리에게 해당이 되는 말씀이아니라 초대교회에 성도들에게 해당이 되는 말씀입니다 실제 그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목 베임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지는 알아야 합니다.

사실 이런 말씀을 가지고 이용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인입니다

이미 설교를 올려 드렸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말씀을 보고 종말의 때라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일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의 증거입니다

예수를 누가 증거를 해 주고 있습니까? 요한복음에서 보혜사 그가 오시면 나에 대해서 증거 하실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말씀은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를 해 주시고 있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셋이 되어서 하나가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성경 구절입니다

요한일서의 성경 말씀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삼위일체의 타당성을 이여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가장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의인화인 것 같습니다. 분명히 사도 요한은 의인화를 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데 마치 이것을 삼위일체나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구원에 관계가 있는 것은 의인화를 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성령에 대해서는 의인화를 하고 있습니다. 왜 의인화를 하고 있는가 하면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의인화를 하고 있습니다.

성령입니다

그리고 물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의미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피입니다.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를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말씀을 함으로 해서 이 셋이 하나가 되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증거하는 이가

다른 번역에서는 증거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 역시 이것에 동의를 하고 있습니다.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인화를 해서 말씀을 한다고 해서 그것 역시 틀리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의 증거입니다

성령이 오십니다. 그리고 그가 오심으로 해서 우리가 감동을 받아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보고 있습니다. 이 셋이 하나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삼위일체를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라는 종교가 생기면서부터 아타나시우스에 의해서 삼위일체라는 신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이 삼위일체를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전도서의 말씀도 이미 설교로 올려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입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이 말씀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죽임을 당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이것이 첫째 부활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 수많은 성도들이 이것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 14절을 보겠습니다.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13:16절을 보겠습니다.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짐승과 우상입니다

이 짐승과 우상에 대해서도 설교로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스도편지를 보시는 분들이 어느 특정 설교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편지의 모든 설교는 다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가능한 모든 설교를 보아야 합니다.

영생입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립니다. 영생에 대한 기초적인 말씀입니다. 아니 이 말씀을 무시하고는 어느 누구도 영생을 얻을 수 없다고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는 100개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사람은 1000개를 알고 있습니다.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까? 당연히 성령에서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1000개를 알아서 믿는 사람입니다

설교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편지에 있는 말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쌓이고 쌓임으로 해서 여러분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무시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 거짓이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스도편지는 모든 설교를 이제까지 다 기록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짐승입니다

이 짐승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종교가 되어 있는 교회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교가 하나의 짐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의 교회가 기독교라는 짐승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기분이 나쁠지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짐승입니다

그 짐승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면 우상을 만들어서 섬기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우상이 무엇인가는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짐승은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게 만들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을 마치 우상을 섬기듯이 지키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것을 사도 요한은 환상으로 보고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마와 오른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서 천년 동안 왕 노릇 하니 이는 첫째 부활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표입니다

사람의 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마와 손에 그 표를 받지 아니한 사람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지키는 율법의 행위와 그리고 그 영광을 통틀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행위와 영광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이는 첫째 부활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성도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영광을 나타내지도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는 거의 짐승에게 경배를 하고 있고 그 표를 받아서 매매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매매에 대해서도 그리스도편지에 설교말씀으로 올려져 있습니다.

우상숭배입니다

절대로 우상 숭배를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해당이 되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른 손과 이마에 표를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 수는 사람의 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행위를 함으로 해서 은혜를 은혜 되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교회 안에 있는 일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을 교회와 세상으로 보면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시대 많은 목사들이 요한계시록을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로 보고 있습니다. 성경은 교회 안에 있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 부활입니다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나머지가 누구입니까? 교회 안에 있지만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사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짐승이 만들어 놓은 우상에게 경배를 하는 사람을 말씀을 하고 있고 이마나 손에 표를 받은 사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렇습니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다가 순교를 당한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과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를 하고 이마나 손에 표를 받아서 매매를 하는 사람들이 천년이 차기 까지 살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살지 못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들은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단 한 가지라도 율법을 지키는 자들은 살지를 못 합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겁도 없이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 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부활입니다

사람들의 상상이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첫째 부활이라고 말씀을 하니까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둘째 부활이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디에도 둘째 부활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활은 한번입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20장 7절부터의 말씀을 부활이라고 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제 생각으로는 부활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성경은 그것을 부활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부활입니다

우리는 이 부활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육체가 다시 사는 것을 부활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가 다시 사는 것은 부활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사는 것은 육체의 부활이 아니라 영의 부활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44절을 보겠습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부활에 대해서 명확하게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활은 육의 몸이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육의 몸은 심는 역할만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부활에 대해서 너무 오해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육의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만약에 이것이 맞는다면 그것은 신체의 부활이 맞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지 않고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삽니다.

그런데 육의 몸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령한 몸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입니다 물론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내세의 일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에 혹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육의 몸이 다시 삽니다.

그것은 부활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이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의 몸이 있습니다. 그런데 육의 몸으로 다시 산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에 다시 사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부활이 될 수 없습니다.

부활입니다

분명히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다시 사는가 하면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활에 대해서 명확하게 정의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첫째 부활에 대해서 모르고 있습니다.

첫째 부활입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이 첫째 부활에 참예를 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둘째 부활에 대해서 전혀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는 반드시 첫째 부활에 참예를 해야 합니다.

둘째 부활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부활이라는 것은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둘째 부활이 있다면 그도 역시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이기 때문에 죽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부활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신체의 부활을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것이 첫째 부활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 부활에 대해서 마음대로 상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 상상이 이 세상 종교와 같이 신체의 부활을 주장하고 있고 심지어는 둘째 부활이 있는 것으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 부활입니다

우리 성도는 반드시 이 부활에 참예를 해야 합니다. 이 부활에 참예를 하려면 율법을 지켜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두려움이 없이 우상 숭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우상 숭배가 율법을 지키는 행위라는 것을 성경을 보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복이 있고 거룩합니다.

첫째 부활에 참예를 하는 자는 신령한 몸으로 부활을 하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첫째 부활을 하는 자들에게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둘째 사망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4-15절의 말씀입니다 반드시 첫째 부활에 참예를 하는 성도만이 이 둘째 사망을 당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둘째 사망에 대해서도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런 것은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둘째 사망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반드시 한번 죽습니다. 아니 성도는 한번 죽는 것이 정해져 있습니다. 육체는 반드시 그렇게 죽습니다. 육체는 그렇게 죽는 것으로 신령한 것을 심는 역할만 하고 썩어 없어집니다.

사망을 당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첫째 부활에 참예를 해야 합니다. 이 부활에 대해서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는 성도만이 둘째 사망들 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망을 당하지 않습니다.

신령한 몸은 영원한 생명을 가졌기 때문에 사망을 당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첫째 부활에 참예한 자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천년 동안입니다

저는 이 천년 동안을 영원한 시간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 첫째 부활이 있고 다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 첫째 부활에 참예를 함으로 해서 이미 천국에 들어갔고 거기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첫째 부활입니다

반드시 우리는 첫째 부활에 참예를 해야 합니다. 그 첫째 부활은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신령한 몸으로 부활을 한 성도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로 더불어서 천국에서 영원한 축복을 누리게 될 줄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