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너희는 귀를 기울리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예배 하는 자를 찾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

윤주만목사 2017. 9. 25. 05:40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리스도 편지 선교회(28)

 

요한복음4:24절을 보겠습니다. (148)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예배[禮拜]

사전적인 의미는 초월적인 존재에게 경배하는 의식 또는 그런 의식을 행하는 것을 예배라고 합니다. 이 사전적인 의미는 순전히 세상 적이라는 것을 먼저 이해를 해야 합니다. 왜 세상적인 가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바로 이해를 하면 알게 됩니다.

 

예배, 너무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예배에 대해서는 성경은 단 10차례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사가 있어 예배와 거의 비슷한 어원으로 사용되어지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와 예배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배에 대해 예수님께서 무엇이 예배인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요한복은 4장에서 무려 5차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배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말씀이 바로 요한복음 4장입니다 요한복음 4장을 바로 이해를 해야 성도가 바른 예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8장에서 예배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모른다면 그는 성도가 아닙니다.

아니 구원을 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예배 하지 않는 자를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예배하지 않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의 신앙은 결국 헛것이 되고 맙니다. 예배를 하지 않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예배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 다양한 예배를 드리고 또 열린 예배라고 하는 신종 어까지 탄생되어 예배에 열심을 다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과연 그런 예배가 참다운 예배인가를 우리는 냉정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내 예배가 바른 예배가 아니라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나는 평생을 하나님께 예배 했는데 그래서 천국에 갈 줄 철썩 같이 믿고 있었는데 내가 예배한 그것이 만약 예배가 아니라면 그것처럼 난감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예배가 무엇인가를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가 다 자기들의 신에게 예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적인 예배가 아니라 성경에서 가르쳐 주는 예배가 무엇인가를 알고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기뻐 받으시고 그를 이 세상에서 건져 내 주실 것입니다

 

예배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고 예수님께서 예배에 대해서 정확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우리와 같은 육체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내 몸으로 드려지는 모든 예배라고 하는 의식은 사실 육적인 것입니다 육과 영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도 영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영은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신이라고 하는 모든 것은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소불위하시고 전지전능하셔서 우리 인생이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볼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말씀을 주의 깊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예배하려면 우리 또한 보이지 않는 것으로 예배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데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예배를 한다면 그것은 서로 대적을 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으로 해야 맞는 예배입니다 이 세상 신은 형상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배라는 단어는 기독교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번역을 하다 보니까 예배라는 단어로 번역이 된 것이지 마치 그것이 기독교에서만 사용되어 지는 단어로 오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적인 의식을 예배라고 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의식을 보고 예배라고 하는 것은 세상 적입니다.

 

성도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해야 합니다.

신령과 진정이라는 단어는 번역의 차이가 있음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과 진리로서 해석이 되는 단어입니다. 성령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까? 진리를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성경을 통해서 성령의 감동을 받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성도라면 이 세상 사람들이 자기들의 신에게 자기 몸으로 드리는 그런 예배가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린다는 말에 참 익숙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예배를 드린다고 하지 않고 예배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로마서121절에 산제사를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2:20절을 보겠습니다. (168)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사도행전 8:27절을 보겠습니다. ((200)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사도행전 24:11절을 보겠습니다. (230)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 이틀 밖에 못되었고

 

왜 예배를 드리라고 하지 않고 한다고 말씀을 했습니까?

내 몸으로 하는 것은 드리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21절에는 사도 바울이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하는 것은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하는 것이 맞습니다.

 

예배는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 맞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는 예배는 그 주체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성령의 감동을 받는 것이고 또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그것이 예배이기 때문에 한다고 하는 표현이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영적 예배는 참 잘 드리는데 예배를 하는 자가 거의 없습니다.

 

성령입니다

예배를 하는 주체가 성령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내 안에 임재를 해서 감동을 해 주심으로 나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받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어떤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령이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한다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영적 예배는 내 육체로 어떤 행위를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는 예배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예배를 하는 성도가 없다는 말씀을 주의 깊게 이해를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영적 예배와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는 예배 그리고 요한복음이나 사도행전에서 말씀을 하는 예배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영적 예배는 내 육체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고 예배를 하는 것은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하는 것입니다 성령과 진리는 내가 볼 수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 믿음으로 이해되어 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씀을 하는 영적인 예배도 물론 드려야 하지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하지 않는다면 그는 성도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예배를 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직접 예배를 하는 자를 찾아 나서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 예배를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4-9절을 보겠습니다. (147)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를 만나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경은 그냥 기록된 것이 아니라 다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니고데모와 같이 거듭난 성도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예배를 하는 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너무 중요한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배를 말씀을 하는데 왜 하필이면 사마리아로 가서 예배를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었는데도 그곳에서는 예배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어쩔 수 없이 예배를 할 수 있는 이 사마리아로 갔다는 말씀입니다 사마리아에 가서 사마리아 여자를 만나 예배를 하기 위해서 가셨습니다.

 

그것도 동네에서 떨어진 우물입니다

그 당시 야곱의 우물은 동네에서 떨어져 있어서 사람들이 이 우물에 물을 길러 와야 합니다. 사마리아는 광야가 있는 곳이라서 이 우물에 와서 물을 길으려면 아침이나 저녁이 되어야 가능합니다. 한 낮에는 너무 더워서 물을 길러 나오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오아시스입니다

사막 한 가운데 있는 오아시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동네에서 너무 많이 떨어져 있지는 않지만 어찌 되었든 이 우물에 물을 길러 오려면 한 낮에서는 거의 불가능하고 아주 특별한 일이 있거나 부득이한 형편에 있는 사람만이 낮에 물을 길러 왔습니다. 바로 이 사마리아 여인도 그런 형편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로가 곤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광야를 지나오시다 보니까 얼마나 힘이 들면 행로가 곤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겠습니까? 이런 곳에 더구나 사람이 낮에는 거의 오지 않는 우물에 예수님께서는 예배를 하는 자를 찾기 위해서 오셨고 또 예배를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연입니까?

낮에는 거의 사람이 이 우물에 오지 않는데 예수님께서 이 우물에 오셔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것이 우연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미 사마리아 여인이 이 우물에 낮에 올 것을 아시고 사마리아 여인과 예배를 하기 위해서 제자들이 없는 그때에 사마리아 여인과 예배를 하고 있습니다.

 

당시 시대적 배경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를 했고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사마리아는 전쟁을 통해서 포로가 되면서 이스라엘의 순수 혈통을 유지하지 못하고 이방과 혼혈 민족이 되어 있어서 이스라엘은 사마리아와 상종을 하지 않고 사마리아 사람을 개로 취급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곳으로 찾아갔습니다.

예배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개라고 취급을 했던 사마리아에 오셔서 예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사마리아에서도 또 멸시를 받고 있는 여자에게 오셔서 예배를 하고 있습니다.

 

개입니다.

사실 이 여인은 개 중에서 또 개 취급을 받는 여인이었습니다. 하필이면 그런 여인에게 찾아 오셔서 예수님께서 예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하나님께서는 누구의 예배를 받고 있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가장 멸시를 받고 있는 그들이 하는 예배를 통해서 기뻐하시고 있다는 말씀이며 또한 그들을 찾고 계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광야입니다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예배를 하고 있고 또 당시 사람들이 모두가 멸시를 하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 예수님께서 예배를 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너무 화려하게 짓고 있는 예배당 안에서 예배를 하고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그런 의식적인 예배를 받으시겠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그것을 전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왜 처음 예배를 하면서 어떤 곳에서 했고 또 어떤 사람과 했는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도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하기 위해서 복음이 있는 자를 통해서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사람을 찾아 나서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과는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로 취급을 해서 그들을 만나면 일부러 피해 다녔고 혹시라도 그들과 어울리게 되면 그것을 부정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럴 정도로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를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개로 취급을 하는 사마리아에 오셔서 또 그 중에서도 가장 멸시를 받고 있는 여인과 예배를 하기 위해서 사마리아에 오셔서 우물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이 여인을 만납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어떻게 예배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10절을 보겠습니다. (14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예수님께서 수가성에 있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유대인이 어찌하여 자기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고 반문을 할 때 예수님께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다면 네가 그에게 구했을 것이라고 동문서답을 하고 있습니다.

 

물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당연히 우물에 물을 길러 온 사마리아 여인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물을 달라고 하시고 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네게 물을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가를 알았으면 좋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하기 전에 하나님의 선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인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한 것도 쇼킹한 일인데 그 여인에게 하나님의 선물을 구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하려면 반드시 이 하나님의 선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선물이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2:38절을 보겠습니다. (190)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예수님께서는 예배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배를 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육적인 것을 통해서 영의 일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육의 목마름은 반드시 생수를 먹어야 하지만 영의 목마름은 성령을 선물을 받아야 합니다.

 

예배의 조건입니다

성경만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예배를 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반드시 예수님으로부터 생수를 구해서 성령이 내 안에 임재를 해서 내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쳐야 예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예배의 기초가 되는 진리의 성령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만약 진리의 성령이 임하지 않고 그들이 성경을 보면서 예배를 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의 우상 숭배를 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진리의 성령을 선물로 받지 않는 상태에서 어떤 예배를 한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기뻐하시지를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고 예배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 성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배를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화려한 예배당을 지어 놓고 거기서 근사한 가운을 입고 오케스트라 같은 성가대가 있는 그런 곳에서 예배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모든 것은 다 세상 적이라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도 세상 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광야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 단 둘이서 예배를 하고 있습니다.

또 성경에서 기록되어 있는 예배가 있습니다. 거기서는 어떤 예배를 하고 있는가를 찾아보겠습니다.

 

사도행전 8:26절을 보겠습니다. (200)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빌립과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가 예배를 합니다.

이들 역시 광야에서 예배를 하는 것을 성경에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배당에서 하는 예배를 제가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예배가 무엇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배는 어떤 특별한 장소가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 이렇게 광야에서 둘이서도 예배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배는 장소가 문제가 아닙니다.

광야에서도 예배를 하고 있고 이 예배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있다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예배를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지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둘이서 예배를 하고 있다고 하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비웃을 것입니다 근사한 교회가 있는데 굳이 그런 곳에서 예배를 하느냐고 하면서 그 예배를 잘못된 예배라고 말할 것입니다

 

예배의 형식이 있습니다.

기도도 해야 하고 찬양대가 있어서 찬양도 불러야 하고 또 사도 신경도 외워야 하고 그리고 강대상도 있어야 하고 하는데 그런 것이 하나도 없이 그저 몇이서 예배를 한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이단이라고 공격을 하거나 그 예배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 근사한 예배당에서 하는 예배를 와서 보라고 할 것입니다

 

예배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안 하면 어떻습니까? 찬양을 안 부르면 어떻습니까? 사도 신경을 안 외우면 어떻습니까? 헌금을 안 하면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은 예배를 하는데 헌금을 안 하면 그것이 무슨 예배냐고 따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어디 노회를 갔는데 목사들이 예배 때 헌금을 하는 것을 가지고 논쟁이 있었는데 대다수의 목사들이 헌금을 안 하면 예배가 아니라고 주장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과연 성경을 읽었습니까?

성경을 보았다면 그리고 예배에 대해서 말씀을 하는 요한복음 4장과 사도행전 8장을 자세히 읽어 보았다면 그렇게 주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예배의 의식에 빠져 있기 때문에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안 하면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할 때 찬송을 했습니까? 기도를 했습니까? 사도 신경을 외웠습니까? 그리고 예배 의식이 있었습니까? 또 누가 헌금을 했습니까? 그런 것을 하나도 안 했지만 분명히 성경은 예배를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종교적인 의식에 빠져서 나오지를 못하고 있으면서 그런 의식을 보고 예배라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런 형식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모임과 예배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과 사도행전 8장은 예배를 말씀을 하고 있고 이것이 분명히 예배라는 것을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배가 무엇이냐면 바로 이 두 가지 말씀을 통해서 예배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배가 무엇이냐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한번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 그리고 빌립과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를 통해 예배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배의 형식 물론 어느 정도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의식화 되는 순간에 종교화가 되어 버리고 그 안에서 바른 예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종교화 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하지 않고 광야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예배를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8:27-28절을 보겠습니다. (200)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는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당연히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으면 예배를 하고 돌아 간다면 굳이 주의 사자가 빌립을 광야로 보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예배를 하고 가는 사람에게 다시 가서 예배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분명히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그런데 이 내시는 예배를 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길이기 때문에 주의 사자가 빌립을 보내 예배할 수 있도록 도와 준 것입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예루살렘에 간 에디오피아 여왕의 내시가 예배를 하지 못하고 돌아 올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예배를 하지 못 했습니다.

물론 그는 권세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정성을 다해서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를 하지 못 했기 때문에 주의 사자가 예배하러 온 내시에게 빌립을 보낸 것입니다 만약 예배를 하고 가는 중이라면 굳이 빌립을 다시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예루살렘입니다

에디오피와 여왕의 내시는 예루살렘에 가면 예배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먼 길을 찾아 왔습니다. 지금과 같은 시대가 아니라 아마도 에디오피아에서 오려면 몇 달이 걸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 먼 길을 찾아 왔는데 예배를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은 아마도 그렇게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에디오피아의 권세 있는 자가 왔습니다.

제사장들을 만나고 제사를 드리면서 자기들은 에디오피아 여왕의 내시가 예배를 잘 드리고 갔다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서 아마도 이 내시에게 예배를 보여 주었을 것입니다. 양도 잡고 자기들이 행하고 있는 제사 제도를 통해서 얼마나 화려하게 만족스럽게 예배를 했겠습니까?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커다란 교회를 짓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을 다 갖추어 놓고 한편의 뮤지컬을 감상하는 듯한 예배를 하면서 그것을 보고 자기들의 육체를 만족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예배가 바른 예배라고 하면서 그 예배에 참석을 하라고 권유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두 예배와는 너무도 차이가 있습니다.

행로가 곤고할 정도로 힘든 가운데서도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예루살렘에서는 예배를 하지 못하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예배를 했다고 돌아가고 있는 그 사람들 중에는 예배를 하지 못하고 그저 자기들의 의식으로 잘 짜여진 뮤지컬을 감상하고는 그것을 예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그런 의식이 아닙니다.

그런 의식을 통해서 예배를 하려고 하는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좋아 하는 사람의 이성에 옳게 보이는 것을 하나님은 절대로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육과 영이 무엇인가를 분별을 못하고 있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예배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적으로 의식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우리 인생들이 바르다고 하는 그런 예배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육으로 예배를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의식을 행하면서 그것을 예배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이성으로는 분명히 예배가 맞지만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가 주장하고 있는 온갖 예배는 사실 예수님께서 했던 예배와 그리고 빌립이 했던 예배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구원입니다

예배를 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배는 반드시 요한복음의 3장에서 니고데모와 같이 거듭난 성도만이 예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거듭나지 않고는 예배의 의미조차 모르고 자기들의 종교적인 의식에 빠져 그것을 보면서 자기들이 예배를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배하러 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사람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대한 종교는 자기들의 의식을 보여주면서 그것을 예배라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부르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시인을 하고 있지만 그들은 예배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4:10절을 보겠습니다. (14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 행색으로 보아서 유대인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기를 구원해 주실 메시아라는 것을 모르고 예수님이 물 좀 달라고 하니까 육적인 물을 주려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행로가 곤고하게 보였으므로 물을 달라고 하는 것으로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누구인가를 알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 네가 나를 알았다면 나에게 생수를 구했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도무지 이해를 하지 못하면서 반문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11-12절을 보겠습니다. (147)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님은 물길을 그릇이 없습니다.

빈손으로 와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시고 나서는 네가 나를 알았다면 네게 말하는 그에게 네가 생수를 구했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주었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시니까 사마리아 여자가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이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습니까? 묻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놀라운 이야기를 합니다.

이 우물은 우리 조상 야곱이 우리에게 주었고 또 야곱이 자기와 그 아들들이 이 우물을 먹었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냐고 묻습니다. 이 우물은 분명히 야곱이 주었는데 예수님은 물길을 그릇도 없으신데 여자에게 생수를 주시겠다고 하니까 여자가 당신이 이 우물을 준 야곱보다 더 크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제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생수를 얻기 위해 자기 조상 야곱이 준 우물에 나왔는데 예수님께서는 물길을 그릇도 없는데 생수를 주시겠다고 하니까 사마리아 여인은 당연히 그럼 당신이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크냐고 물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여인도 자기를 야곱의 자손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13-14절을 보겠습니다. (14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께서 너희 조상 야곱이 준 이 우물을 먹는 자는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주는 물은 너희 조상 야곱이 준 우물물과는 달라서 이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은 동문서답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영적인 말씀을 하시고 있고 사마리아 여인은 육적인 물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을 하는 물을 말씀을 하고 있는데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먹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육적인 물을 생각하고 그 물을 달라고 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다시 물을 길러 올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시겠다고 하니까 당연히 그 물을 달하고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 여자는 남들과 같이 새벽이나 저녁에 물을 길러 나올 수 없는 여자이기 때문에 이 물이 더욱 간절하게 필요했습니다. 사실 광야에서 남들이 없는 제일 뜨거운 낮 시간에 물을 길러 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요한복음 4:15절을 보겠습니다. (148)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은 지금 서로 다른 말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말 속에서 서로가 교통을 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으로서는 사막의 기후에서 대 낮에 물을 길러 나오는 수고를 덜 수 있다는 것은 너무도 좋은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그 물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영의 일이고 하나는 육의 일이지만 그것이 너무도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 배에서 생수가 넘치는 그런 물을 달라고 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사마리아 여인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주님께서는 육적인 문제를 통해서 영의 일을 말씀을 하면서 예배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또 다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16-19절을 보겠습니다. (148)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 되도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의 치부를 일부러 드러내셨겠습니까?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 예배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남편을 데려 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이 여자가 나는 남편이 없다고 대답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의 형편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를 이 사마리아 여인과 하고 있습니다.

 

네 말이 맞다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 되도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깜짝 놀라서 이제는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보니 선지자인 것 같습니다. 이제까지는 예수님을 그저 유대인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냥 유대인이 아니라 선지자로 보여 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기의 모든 형편을 정확히 아는 것을 보니 분명히 선지자인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그저 보통의 유대인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자기의 모든 형편을 말씀하는 것으로 보니까 다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는 예배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고 있고 자기도 예배를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20절을 보겠습니다. (148)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성경에서 예배라는 단어가 처음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 여인으로부터 예배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아마 성경을 본 사람들도 예배에 대해서 첫 이야기를 한 사람이 이 사마리아 여인이라는 것은 잘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불과 몇 마디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불쑥 예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선지자로 보이니까 이제는 자기 스스로 예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하였는데 선지자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 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늘 예배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배를 하고 싶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자기도 유대인과 같이 하나님께 예배를 하고 싶었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로 취급을 해서 감히 예배를 할 생각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늘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예배를 하고 싶었지만 사실 그때 사마리아 사람들은 같은 이스라엘 민족이었으면서도 이방인보다 더 심한 차별을 받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4:21절을 보겠습니다. (148)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예배를 교회에서 드립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배는 어떤 장소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는 교회를 지어 놓고 그것을 성전이라고 하면서 마치 그 안에서 예배를 해야 하는 것으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카데미를 하고 있습니다.

아니 예배를 한다고 해야 맞습니다. 사실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 중에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카데미를 왜 이런 장소에서 하지? 교회라는 곳이 있는데 왜 교회도 아닌 이런 사무실에서 아카데미를 하느냐고 하면서 잘못되었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부정을 했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생각하고 있는 예배와 자기들의 근사한 예배당과는 너무 큰 차이가 있어 보이기 때문에 아카데미를 하는 이 장소를 예배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생각을 했던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분명히 그들은 똑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예배는 교회라고 지어 놓은 예배당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면서 아예 말씀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이 아카데미 자체를 부정했던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배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고정관념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지금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단 둘이서 그것도 지붕도 없는 광야에서 햇볕이 내리쬐고 있는 그런 곳에서 예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장소에서 예배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건물로 지어진 교회라는 장소에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하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때만 해도 어디서 예배를 했습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은 사마리아에 있는 산당에서 예배를 했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늘 예루살렘을 동경을 했습니다.

자기들도 하나님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과 같이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말씀을 하면서 지금 사마리아 여인과 광야 우물가에서 예배를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22절을 보겠습니다. (148)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예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산에서 예배를 하고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하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배에 대해서 정말 심각하게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유대인들이나 모두가 알지 못하는 예배를 했다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들으면 당장 예수님을 어떻게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것은 한 마디로 우상을 섬기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종교적인 의식으로 예배를 하는 것은 사실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납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 유대인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유대인에게서 구원이 난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2:28-29절을 보겠습니다. (242)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가 바로 이면적인 유대인이라는 말씀이며 그 유대인에게 구원이 난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 표면적 성도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 자기가 예배하는 그것을 보며 마치 성도가 된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이 되어야 합니다.

 

표면적 유대인이 누구입니까?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던 그들이 바로 표면적 유대인입니다. 그런 유대인의 예배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근사한 예배당을 지어 놓고 의식에 따라 예배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표면적 교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4:23절을 보겠습니다. (148)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표면적으로 예배하는 것이 예배가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하는 것이 참 예배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오셔서 이면적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할 수 있는 때가 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배, 표면적 예배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찾으시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바로 이면적인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지금 표면적 예배를 하고 있나 아니면 이면적 예배를 하고 있나 냉정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른다면 그는 교회에 나와 평생을 예배 했어도 표면적인 예배를 한 이스라엘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지금도 찾으십니다.

예배를 드리는 자들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신다는 것을 바로 인지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내 몸을 산제사로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 그 예배와 예배하는 자를 찾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이며 하나는 영적 드릴 예배는 내 몸을 통해 나타나고 있지만 예배하는 자는 성령의 감동으로 진리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8:27-28절을 보겠습니다. (200)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는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당연히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으면 예배를 하고 돌아간다면 굳이 주의 사자가 빌립을 광야로 보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예배를 하고 가는 사람에게 다시 가서 예배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분명히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그런데 이 내시는 예배를 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길이기 때문에 주의 사자가 빌립을 보내 예배할 수 있도록 도와 준 것입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예루살렘에 간 에디오피아 여왕의 내시가 예배를 하지 못하고 돌아 올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예배를 하지 못 했습니다.

물론 그는 권세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정성을 다해서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를 하지 못 했기 때문에 주의 사자가 예배하러 온 내시에게 빌립을 보낸 것입니다 만약 예배를 하고 가는 중이라면 굳이 빌립을 다시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는 나왔지만 이렇게 예배를 하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그것은 너무도 불행한 일입니다

 

사도행전 8:29-31절을 보겠습니다. (201)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예배하러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하지 못하고 내려 왔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그 중심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는데 이 내시는 예배를 하지 못 하고 그냥 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예배를 하러 왔는데 이사야의 선지자의 글을 배우기 위해 예배하러 왔는데 어느 누구도 이 말씀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바로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예배입니다

이 내시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사야의 말씀을 알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왔지만 이 말씀에 대해서 속이 시원할 정도로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중심지입니다

자기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이라고 자부를 하고 있었지만 예배하러 온 내시가 알고 싶어 하는 그 말씀을 가르쳐 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권세 있는 내시가 왔기 때문에 당시 권위가 있다 하는 사람들은 모두 만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하러 온 이 내시에게 예배를 할 수 있게 가르쳐 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시대도 그럴 수 있습니다.

거대하고 웅장한 교회들이 지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찾아 하나님께 예배를 하고 싶어 하는데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처럼 예배를 하지 못하고 의문을 가지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씀입니다

 

화려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감동을 주는 뮤지컬 한편을 감상을 하고 감동을 받고 있지만 그 안에 예배가 없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내시와 마찬가지로 예배를 한다고 했는데 왠지 찜찜하고 성경 말씀이 해석이 안 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바로 알지 못하고 돌아가고 있다면 그는 예배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배는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제사에는 아주 정성을 다 했지만 실제 예배가 무엇인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이 내시가 예배를 하러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찜찜한 마음을 가지고 돌아가면서 이사야의 말씀을 자기 혼자서 고민을 하면서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수많은 제사장들이 있었지만 예배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예배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에 예배하러 올라갔다가 그냥 돌아가면서 이사야의 말씀을 나름대로 이해를 해 보려고 하던 중에 주의 사자가 빌립을 보내 예배를 할 수 있게 도와 준 것입니다

 

성경을 아는 것이 예배입니다

이스라엘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성경에 대해서는 무지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고 하기 보다는 자기들이 드리는 제사에 더 관심이 많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배가 무엇인가를 전혀 깨닫지 못 했습니다 예배를 해야 하는 중심지에서 예배를 하지 못 한다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교회가 예배를 하지 못 한다면 그것은 불행입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어야 하는데 온갖 잡다한 세상 이야기로 또 심지어는 연속극이야기에 유머까지 하면서 예배를 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에게 예배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내시의 예배를 자기들이 드리는 제사로 방해를 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입에 바른 말로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이 오직 예수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지식과 또 관원의 지혜와 그리고 세속적인 것을 전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예수와 세상 것을 교묘하게 썩어서 전하기 때문에 예배가 방해를 받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자를 찾으실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배를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를 하고 그런 예배를 통해서 내 영혼이 구원을 받기 위함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예배가 변질이 되니까 구원을 방해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려 하기 보다는 무슨 자기가 도덕군자가 되는 양 성인 군자를 만들기 위해 매일 도덕 선생이 되어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내시가 무엇을 보고 있었습니까? 도덕적인 내용을 보고 있었습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성경을 보고 있었습니까? 그는 이사야 선지가가 예언을 한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기 위해 성경을 보고 있었고 그것이 예배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배는 예수를 가르쳐 주는 것이 예배입니다

이 내시는 에디오피아에 있을 때부터 이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예배를 하러 예루살렘에 왔지만 그 어느 누구도 이사야의 말씀을 속 시원하게 풀어서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러 온 내시에게 빌립을 보내 주셔서 예배 할 수 있게 인도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8:32-34절을 보겠습니다. (201)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이 내시는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가서도 제사장들과 그 당시 권위자들에게 이 말씀을 분명히 물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속 시원하게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답답한 마음으로 계속해서 이 말씀을 보면서 다시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한 말씀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성경을 보고 있다면 그는 너무도 미련한 사람이고 또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5:39절을 보겠습니다. (151)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성경을 해석을 하면 예수가 나와야 합니다.

바로 이 내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온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를 알아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 왔지만 예루살렘에는 예배를 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오면 당연히 예배를 할 줄 알았는데 예루살렘에 예배하는 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내 구원을 확신할 만큼 내 안에서 성령이 확신을 줄 만큼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까? 그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아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도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단보다도 예수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이 교회 명패에 정통이라는 그것으로 그 안에 들어갔다는 그것으로 자기가 예배를 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한 말씀입니다

그럼 내가 지금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을 시원하게 알고 있습니까? 성경 안에서 예수에 대해서 늘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까? 내 자신을 스스로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예배하는 자는 많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 정말 예루살렘까지 찾아가서 그 말씀을 알기 위해 예배를 했습니까? 에디오피아에서 예루살렘까지 온다는 것은 정말 힘든 길입니다 지금 같으면 비행기가 있어서 하루면 갈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말이나 낙타를 타고 가야 하기 때문에 정말 사모하는 마음이 아니고는 예루살렘에 오기 힘듭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하고 있습니까?

성경에서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을 알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알기 위해 얼마나 사모하고 있습니까? 지금도 예배하는 자는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을 알기 위해 예배를 하고 싶어 하고 있고 저 같은 경우에는 어느 말씀이 해석이 안 되는 심지어는 그 말씀을 수백 번을 읽으면서 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몇 독을 했느냐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수 백독을 했어도 자기 마음에서 시원하게 풀릴 정도로 해석이 될 때까지 그 말씀에 대해서 사모를 하지 않고 그저 지식적으로 성경을 읽고 있다면 그는 예배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예배하는 자는 다릅니다.

이 에디오피아 내시를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먼 길을 찾아 왔습니까? 그리고서도 이해가 안 되니까 돌아가는 길에도 그 말씀을 놓지 못하고 계속해서 사모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예배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찾으시고 빌립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모두가 자기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하고 있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아니 한 사람도 그것에 대해 의심한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배가 무엇인가를 몰랐고 예배하러 온 내시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쳐 줄 수도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8:35-42절을 보겠습니다. (201)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없음)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빌립을 만나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원했던 내시에게 주의 사자가 빌립을 보내어 예배할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바로 가르쳐 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빌립이 이사야의 말씀을 보면서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빌립과 내시 두 사람이 예배를 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내시에게 주의 사자가 빌립을 보내어 예배할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나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도 이 내시와 같이 예배하기를 원하는 성도인가 아니면 그저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과 같이 자기들의 행위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이 아닌 가 냉정하게 나를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수많은 예배를 참석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십여 번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 나를 생각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이 문제는 영혼 구원과 관계가 있는 문제입니다 과연 성경에서 말씀을 하는 그런 예배를 하고 있는 가 냉정하게 분별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지도 않는 자를 하나님께서 과연 그를 구원해 주시겠습니까?

 

예수를 알기 위해 얼마나 사모하고 있습니까?

그저 형식에 치우친 자기들의 예배를 드리면서 스스로 만족해하고 자기가 마치 구원을 받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냉정하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영어 성경 공부를 하고 헬라어로 공부를 하고 히브리어로 공부를 하면 무엇 할 것입니까? 아주 그런 것을 자랑하느라 그것이 자기 의가 되어서 그렇게 하는 자신의 지적인 수준에 미혹이 되어서 예수를 아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성경 공부를 한다고 하지만 거의 모든 교제가 예수는 안 가르치고 율법적인 문제와 신앙생활에 대한 문제를 가르치면서 아주 모범적인 교인은 양산을 하고 있지만 실제 예배하는 자는 적다는 것이 이 시대의 모습입니다

 

예배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대도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고 있습니다. 내가 예배를 하고자 하는 사모하는 마음이 있으면 언제든지 하나님께서는 내 주변에 있는 빌립을 보내 주셔서 예배하게끔 인도하고 있다는 것을 이 말씀을 통해 깨닫고 예배를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4:25-26절을 보겠습니다. (148)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 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예배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예배에 대해서 바로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예수님께서 내가 그로라 하고 말씀을 하십니다. 지금까지 예배를 가르쳐 주시면서 그 결론이 무엇이냐면 당신이 그리스도라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상세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 동네로 들어가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예수를 안 그것이 바로 예배라는 말씀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는 어떤 형식을 따라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형식에 상관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메시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그것이 바로 예배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는 나를 구원할 주라는 뜻입니다

나를 구원하실 주로 영접하고 그를 받아들이며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 예배는 많으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는 아주 적습니다. 교회에 가서 예배를 참석해 보아도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겨우 예수 믿으라는 입바른 말 한마디하고 도덕 선생이 되어 가르치고 예화와 세상 이야기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는 그런 예배를 드리면서 스스로 흡족해 있습니다.

 

그런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예배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가르쳐 주고 그것을 믿게 하는 것이 바로 예배라는 말씀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시대는 이스라엘과 같이 자기 몸으로 드리는 예배에 집착을 하면서 육적으로 자기들의 기쁨이 되는 예배를 드리고자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예수를 아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수를 알려면 반드시 보혜사 성령이 임하셔서 그가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실 때 바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참 예배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그 안에서 예수를 발견하는 그것이 예배라는 말씀입니다

 

샤머니즘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가 다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형식에 빠져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게을리 하는 예배는 결국 샤머니즘적인 예배에 불과하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하고 있지만 한 사람은 샤머니즘적인 사상에 메여 자기 몸으로 지극 정성을 다해 예배를 드리고 있고 한 사람은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배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면서 결국 누구를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 결론은 내가 그리스도다 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사마리아 여인은 또 다른 예배하는 자를 찾기 위해 동네로 가서 자기가 예배한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고 전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배를 했습니다.

그리고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도 예배를 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 감으로 해서 예배를 했고 내시는 빌립을 만나서 늘 알고 싶었던 이사야의 말씀에 대해서 확실한 해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4:24절을 보겠습니다. (148)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육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 다수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육의 의식에 맞추어서 드리고 있는 그것을 예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 종교적인 의식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하나님을 부르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역시 종교화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의 조건입니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성령과 진리만 있으면 누구나 어디서나 예배를 할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본다고 그것을 가지고 예배한다고 해서 다 예배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성경 안에서 진리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성령입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고는 누구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을 수 없다고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세상 지식적으로는 성경에 대해서 해박할지 몰라도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일은 성령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하고 싶습니까?

그럼 먼저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먼저 생수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진리의 성령을 먼저 예수님께 구한 성도만이 그래서 거듭난 성도만이 예배를 할 수 있지 교회에 나왔다고 아무나 예배를 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왜 주님께서 내가 가면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신다고 하셨냐면 보혜사가 오지지 않으면 예배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나에게 생수를 구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이 생수를 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온 자기가 의식적으로 드리는 예배를 보면서 자기가 성령을 받았다고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고 있지도 않으면서 아주 조금 아는 것을 가지고 마치 모든 것을 아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 다 없어도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성경을 보아야 하고 또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 그 성경에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아야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경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가는 것이 예배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평생 교회 안에서 모든 예배를 다 드렸어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하지 않았다면 그는 예배 자가 아닙니다.

 

예배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대도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고 있습니다. 내가 예배를 하고자 하는 사모하는 마음이 있으면 언제든지 하나님께서는 내 주변에 있는 빌립을 보내 주셔서 예배하게끔 인도하고 있다는 것을 이 말씀을 통해 깨닫고 예배를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참 빛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이미 십자가를 지시고 하늘에 올라 가셨지만 이 시대는 역시 예배하는 자가 없습니다. 종교적인 의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자는 바다 보래 같이 많지만 실제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그런 예배를 하고 있는 자가 적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세례를 받고 회개를 하면 보혜사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렇게 성령을 선물로 받은 성도만이 이 시대에 예배하는 자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 예배는 어떤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내가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를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