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37:35절을 보겠습니다. (구 58쪽)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사람의 죽음
우리는 언젠가는 한번 죽는 것이 정해져 있는 인생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굳이 말씀을 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이 죽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들은 혈과 정에 매여 살아가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성인입니다
그리고 나이가 50세를 넘긴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자기 부모나 형제 그리고 인척들의 죽음을 보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것을 굳이 안 보더라도 곁에 있던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사실 인생들에게는 슬픈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물론 세대가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이제 100세 시대를 살아가다 보니까 부모의 죽음에 대해서는 호상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연세가 많이 든 부모가 천수를 누리고 살다가 죽었다면 그것을 호상이라고 하고 장례를 치르면서도 슬퍼하기 보다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이제는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부모는 그렇습니다.
저 역시도 부모님들이 오래 전에 다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때는 제 나이도 아직 그런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충분한 나이가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부모의 죽음에 슬퍼했던 것이 사실이고 제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그랬는지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도 부모는 조금 덜합니다.
형제가 죽는다든지 아들이 죽는 것은 사실 인생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어린 나이에 형과 누나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모의 죽음보다도 더 큰 슬픔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제 나이가 이제 60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제 누나와 형이 50세 되던 해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누나와 형과 제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다 보니까 쉽게 받아들이지를 못했던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부모의 죽음보다 형제의 죽음이 더 크게 다가왔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부모입니다
물론 슬픕니다. 그러나 부모는 당연히 죽음을 맞이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도 덜 슬픕니다. 그러나 형제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아직 나이가 한참일 때 그 형제가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남아 있는 형제들에게 상당한 슬픔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저 역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마리아입니다
그리고 마르다입니다. 지금과 같은 시대가 아닙니다. 2000년 전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여자들이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고 어찌 보면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더 좋다고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농경사회입니다
그리고 목축을 하는 사회입니다. 그런 사회에서도 우리가 베다니 촌에 대해서 이미 말씀을 했지만 아주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는 마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중에 그녀들의 오라비인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은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위로입니다
사실 위로가 되지 않는다고 저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죽음보다 형제의 죽음이 우리 인생들에게는 더 크게 작용을 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사람마다 그리고 형제간에 우애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는 보편적인 집이라면 그렇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집안에 남자입니다
우리나라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예전에 우리 부모세대는 모든 것을 장남에게 다 주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정도로 집안에 장남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귀하게 여김을 받으면서 살았고 또 장남은 나름대로 역할을 하고 살았다고 저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여자는 수에 계수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의미가 있어서 하나님께서 계수를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았기 때문에 여자 형제들만 있는 집에 남자 하나가 있는데 그가 죽었다는 것은 집이 무너져 내리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당시 시대 상황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너무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여자는 계수를 하지 않고 있었고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가난한 집안이기 때문에 나사로가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제가 생각을 할 때 성전에 가는 일도 남자가 없이 여자가 혼자 간다는 것이 용납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 입니다
그녀들이 집이 가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죄인으로 바리새인으로부터 정죄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성전에 가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자기들의 지위가 회복이 되려면 그래도 남자인 나사로가 있어야 하는데 그 오라비가 죽음으로 해서 그들이 받을 마음의 고통은 너무도 컸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이 나사로가 죽음으로 해서 마리아와 마르다를 위문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위로라는 단어와 위문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나 히브리어로 같이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베다니 촌에 살아가던 사람들은 가난했고 그래서 더욱 그녀들을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야곱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형제들이 야곱이 요셉을 편애하고 사랑을 하는 것을 보고 그를 죽이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애굽으로 가는 노예 상들에게 요셉을 팔고 그의 옷에 피를 묻히고 야곱에게 가져가서 이것이 아버지의 아들의 옷이 아니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부모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다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 역시 자식은 아니지만 형제가 둘이나 비교적 적은 나이에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살아계셨는데 그 충격이 얼마나 컸던가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야곱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그가 요셉을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 형제들이 있었지만 요셉만 편애를 하고 있었고 그에게만 일도 시키지 않았던 것을 성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가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요셉이 죽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그렇게 알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위로입니다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는데 부모는 더욱 더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야곱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사랑하는 라헬이 낳은 아들인 요셉이 너무도 사랑스러웠고 그를 아들들 중에서도 가장 귀하게 여겼던 것이 사실입니다.
죽음입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입니다. 위로가 될 수 있는 상황이 있고 아무리 위로를 해도 위로가 되지 않은 상황이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부모가 그 사랑하는 자식이 죽음을 맞이했을 때는 어느 누구의 위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제 주변에도 그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사촌 동생입니다. 저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해서 제 아들과 사촌 동생의 딸이 나이가 같았습니다. 그런데 벌써 15년이 넘은 것 같습니다. 이제 한참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던 아이가 학교에 갔다 와서 집에서 그냥 쓰러져서 죽었다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물론 장례식장에 갔다 왔지만 무슨 할 말이 없었습니다.
저도 아이가 하나입니다
사촌 동생 역시 딸이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그 딸이 그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도 가끔 그 사촌 동생과 통화를 하고 집안에 일이 있으면 만나고 있지만 그 동생을 보면 아직까지 그 딸의 죽음에 대한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더구나 아들이라든지 형제가 죽으면 그리고 지금 마리아와 마르다와 같이 고대 지방에 남자가 하나 있는 집에서 그가 죽는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유대인들이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러 왔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죽음입니다.
병든 나사로는 그 집안에 하나 밖에 없는 남자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사랑했고 그들이 주님을 영접을 하고 말씀을 들었고 그들이 자기 오라비가 병이 들었다고 하면서 주님께 사람들을 보냈지만 주님이 오시지 않아서 죽음을 맞이하고 이미 장례까지 치르고 무덤 속에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입니다
우리 인생들을 모르겠습니까? 더구나 마르다와 마리아는 주님을 영접을 하고 주님을 믿는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제 뒤에서 고백을 하고 있지만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마르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들을 구원해 주시러 오신 하나님으로 믿었다는 말씀입니다.
위로가 되겠습니까?
저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위로를 받고 모든 것을 정리를 해야 하는 시간이 흘렀지만 마르다와 마리아는 전혀 그렇지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흘입니다
아직까지 사람들이 와서 위로를 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마르다와 마리아에게는 나사로가 어떤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나 같고 사람은 어느 시대나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다 같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적으로는 지금 마르다와 마리아가 당한 일을 충분히 저는 공감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1:20절을 보겠습니다. (신 165쪽)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서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다.”
인생의 죽음입니다.
우리는 혈과 정에 매여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우리 인생을 육적으로나 혈통으로 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육과 혈에 매여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야곱을 예를 보아서도 잘 알고 있지만 자기 사랑하는 아들이 죽는다는 것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입니다
참으로 슬픈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천수를 누리고 살다가 죽는다면 그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고 남은 사람들도 쉽게 장례를 치를 수 있지만 그렇지가 않고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누구라도 마찬가지라고 저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입니다.
제가 죽음에 대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런 죽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인생의 죽음에 대해서 너무 많이 말씀을 한다는 것 역시 성경적으로 바르지 않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늘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설령 내 형제가 아니 내 사랑하는 자식이 죽었다고 해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성도는 그런 인생을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의 생명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내세입니다
그리고 생명에 대해서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 세상에 샤머니즘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고 진리의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믿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성도님들은 죽음에 대해서 받아들여야 하고 초기 교회에 성도들은 그들이 아직 살날이 많이 남아 있었어도 영의 생명을 생각하면서 기꺼이 받아들였다고 믿고 있습니다.
인생의 죽음입니다.
지금 요한복음 11장은 그것을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너무 인간적으로 가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나사로의 사건을 통해서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말씀이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주님이 오신 목적에 대해서 많이 말씀을 했습니다.
주님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보낸 사람들로부터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병이 죽을병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고 계셨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나사로가 죽을 때 까지 이틀을 더 유하시다가 유대로 오시니까 이미 나흘이 지났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죽음을 너무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인생의 죽음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기록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나사로의 죽음 역시 영의 일을 비유로 하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단지 주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 주심으로 해서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기쁨을 주었다고 생각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다시 말씀합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들이 죽는 것에 대해서 상관을 하시지 않습니다. 그런 죽음에 대해서 관여를 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실 때는 영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를 살리신 것이지 실제 초기 교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할 때도 주님께서는 전혀 관여를 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비유입니다
병든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주님께서 다시 살리시는 것은 영의 일을 비유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저 단순하게 주님께서 인간적으로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를 사랑하셔서 나사로를 살리셨다고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초기 교회에 수많은 성도들의 죽음은 의미가 없는 일이 되고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결론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실제 일입니다
그 일을 통해서 우리 영의 일을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앞에서 충분히 이 사건에 대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첫 번째는 나사로는 병든 자입니다. 그 병든 자는 바리새인들로부터 죄인으로 판단을 받았고 그런 자들을 불러 강하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자입니다
주님이 사랑하신 자라는 말씀은 그리고 우리의 친구 나사로라는 말씀은 아버지께서 주신 자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께서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나사로는 주님의 양입니다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지는 않지만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은 주님의 양인 나사로가 아직까지 생명을 얻기 못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만약 나사로가 생명을 얻었는데 그를 다시 살리셨다면 초기 교회에 성도들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르다와 마리아입니다
그녀들이 주님을 영접을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들이 주님을 믿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녀들의 오라비가 죽은 것이 불쌍해서 나사로를 살리셨다면 우리는 성경을 보는데 있어서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이유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생명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고 있고 또 우리가 구원을 받는 일을 하셨습니다. 단지 그 육체가 죽고 사는 것을 불쌍히 여기신다면 우리는 영의 일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생명을 얻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행하시는 일입니다
그 일에 대해서 진리로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감성에 젖어 성경을 보는 것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아무리 주님과 친분이 있고 그녀들의 하나밖에 없는 오라비가 죽은 것이 불쌍해서 다시 살려 주셨다면 그것은 영의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일입니다
굳이 성경에 기록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해서 증거를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이 말씀을 기억하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 외에 다른 일입니까?
인생의 생로병사가 아무리 큰일이라고 해도 주님께서는 그것에 관여를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 인생의 이성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해도 우리는 지혜를 구해야 하고 진리로 인도함을 받아서 성경을 보아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사건의 중요함입니다.
병든 나사로는 주님의 양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우리의 친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지금 선지자들의 글에 예언이 되어 있는 그대로 영의 일을 이루시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제자들입니다
이 나사로의 사건을 통해서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믿게 하고 있는가 하면 주님은 이 세상에 양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믿게 하고 또 누가 생명을 얻는가 하면 율법주의자가 보기에는 병든 자와 같이 보이는 나사로를 강하게 하는 일을 나사로를 살리시는 일을 통해서 나타내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르다와 마리아입니다
그녀들이 주님을 영접을 하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 번에 모든 것을 다 깨달을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들에게 주님이 오신 목적을 가르쳐 주고 있고 영의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유대인들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십니다. 사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이성으로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죽은지 벌써 나흘이 되고 냄새가 나기 시작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그들이 지금 당장은 믿을 수 없겠지만 이제 주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제자들이 성령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할 때 믿는 자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병든 나사로의 죽음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의미가 그렇다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 영적인 의미를 모르고 그저 주님께서 하나님이시니까 죽은 자도 살리신다고 말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헛것과 같이 사라지고 마는 인생인데 그런 인생들 다시 살리기 위해서 표적을 나타내시고 있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생은 죽음은 슬픈 일입니다
그리고 남은 자들에게 더욱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그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적인 의미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를 하나님께서 주님에게 주신 자를 어떻게 구원을 해 주시는가를 우리는 병든 나사로가 죽은 후에 주님이 다시 살리시는 표적을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마르다 입니다
주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서 맞이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집에 있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뒤에서 이 두 사람이 주님께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말을 통해서도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영의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요한복음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의 생명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보아야 합니다. 모든 사건이 영의 일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비유의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다른 것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것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는 그것에 비하면 그것은 너무도 평범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을 하지만 우리는 영의 생명을 생각을 하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말씀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을 너무 단순하게 보고 있고 그저 성경말씀을 사람의 이성적 지식에 따라 아는 것으로 자기들이 성경을 알고 있다고 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도 다시 살려 주시는 분인데 무엇을 못해 주시겠느냐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1:21절을 보겠습니다. (신 165쪽)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병든 나사로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기 오라비가 병이 들었다고 하면서 주여 사랑하는 자가 병이 들었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보내서 주님께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주님께서는 바로 가시지 않고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셨다가 유대로 가셨고 이미 죽은지가 나흘이 되어서 냄새가 날 정도가 되었습니다.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리고 나사로를 무덤에다 넣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유대인들은 그 지역의 풍습에 따라 아니 그 지역 환경에 따라 매장을 하지 않고 석회암에 굴을 파고 그 안에 시체를 넣어 둠으로 해서 자연적으로 미이라로 변하게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지역의 환경입니다
매장을 하는 것 보다 그것이 더 위생적으로 낫기 때문에 그렇게 장례를 치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병원균이 발생을 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매장을 하는 것으로 되는데 그곳에서는 매장보다는 그렇게 석회암 동굴에 넣어 두는 것이 더 위생적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매장 문화입니다
그냥 생겼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계 각지에는 여러 가지 장례문화가 있습니다. 그런 장례 문화를 이상하게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오래 동안 내려오면서 그것이 가장 위생적으로 좋은 방법이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할 때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렇게 장례를 치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오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정말 잘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의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3장에서 니고데모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하는 니고데모도 역시 성경을 연구를 하고 살았지만 영의 생명에 대해서 그리고 영의 일에 대해서 내세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은 다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영의 일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는 것을 인정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고 있지만 유대인들이 왜 그렇게 말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들의 생각이라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하나님이시니까 마르다가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을 하고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아마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르다가 주님께 하는 말을 보면서 아무 생각이 없이 마르다가 자기 오라비가 죽었기 때문에 그리고 주님을 하나님으로 믿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성경을 볼 때는 상고를 해야 하고 또 늘 깨어 진리로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저 인생의 이성으로 그렇구나 하면서 성경을 보는 습관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말씀들은 다 의미가 있고 영의 일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르다 입니다
지금 마르다의 생각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라고 해도 틀리지가 않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로서 자기들이 믿는 그리스도가 오셨는데 그가 할 수 있는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나도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마르다의 말입니다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마르다가 하는 말이 진리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마르다가 주님을 영접을 하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영의 일을 다 깨닫고 나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입니다
유대인들이 생각을 하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신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와서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는데 나는 그의 신들매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말을 하고 있고 나는 그를 증거를 하기 위해서 세례를 주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영접을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었다는 것을 우리가 누가복음에서 보았습니다. 분명히 주님께서는 마르다의 영접을 받고 그 집에 들어가셔서 말씀을 전하셨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르다와 마리아는 그가 이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을 이제 뒤에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마르다 입니다
지금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시니까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말이 정당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이 세상에 왜 오셨습니까?
유대인들의 사상입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오시면 자기들의 육체의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실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상이 마르다에게도 있었고 그렇게 주님을 믿고 있었다는 것을 마르다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마르다의 말입니다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이 않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아직까지 마르다와 마리아는 육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입니다
10장에서 양들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아무도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주님은 영의 일을 마르다와 마르아에게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다와 마리아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면 육적인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지금 마르다의 말에서도 이제 뒤에서 마리아의 말에서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마르다 입니다
그가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영의 생명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마르다와 마리아는 주님을 이제 뒤에서 고백을 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시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 오라비가 죽고 장례를 치르고 나서 주님이 오시자 마르다는 주님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말이 맞는 말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마르다가 참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르다가 하는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마르다의 말과 같이 주님이 계셨더라면 내 오리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는 말에 다 수긍을 하면서 이 말씀을 볼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마르다는 진리에 반하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녀가 비록 주님을 영접을 하고 말씀을 들었어도 지금 영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고 자기 오라비의 육체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다고 하면서 약간은 주님께 서운한 마음을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신 목적입니다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죽은 자를 살리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고 영의 생명에 대해서 믿음으로 역사를 하고 있는 우리 성도는 육체가 죽고 사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왜 오셨습니까?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양들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 생명은 육체의 생명이 아니라 이제까지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 영의 생명이고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마르다 입니다
유대인들의 사상을 그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시면 자기들의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실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지만 마르다는 자기 오라비의 육체의 생명이 죽지 아니하였을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3:2-3절을 보겠습니다. (신 326쪽)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미르다 입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사랑하시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녀 역시 후에 구원을 받았다는 일에 있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마리다의 생각을 바로 알아야 하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가를 냉정하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입니다
그녀가 이제 뒤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믿는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녀는 아직까지 영의 일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주님을 영접을 하고 말씀을 들었지만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있던 그리스도의 사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하나님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도 아무 일도 아닙니다. 하물며 병든 나사로를 고쳐 주시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마르다는 아직 영의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알았다면 이렇게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양들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오셨습니다.
마르다가 영의 일을 알고 믿고 있다면 어떻게 말을 해야 옳습니까? 지금 마르다의 말은 땅에 것을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위엣 것을 생각을 하고 있다면 주님이 오셨을 때 자기 오라비의 육체가 죽은 것을 말할 것이 아니라 자기 오라비의 영생의 문제에 대해서 주님께 말을 했어야 옳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르다는 영의 일을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위엣 것을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땅에 것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 듣지를 못해서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다는 말씀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영의 생명입니다
그것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더라면 마르다는 지금 주님이 오셨을 때 자기 오라비의 육체가 죽은 것을 원망을 해서는 안 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지가 죽지 않았다는 말을 하기 보다는 주님께 자기 오라비의 생명에 대해서 물었어야 합니다.
나사로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이제 뒤에서 다시 그를 살리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영원히 살고 있습니까? 그가 언제 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육체를 다시 살려 주셨지만 그는 죽었다는 것을 우리는 다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 마리아가 지금 무엇을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아직까지 땅엣 것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오라비의 죽은 것을 슬퍼하면서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을 하시면서 내 오라비가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영의 일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셨습니다.
왜 다시 오셨다고 생각을 합니까? 주님께서 인간적으로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를 사랑하셔서 그들을 위로해 주시기 위해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기 위해서 오셨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지금 제자들과 그리고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에게 믿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육체를 살리는 일입니까?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겨우 땅에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next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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