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강,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열왕기하 2:19-22절을 보면
“그 성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우리 주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며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 좇아 다시는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을찌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그 물이 엘리사의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날에 이르렀더라”
구약입니다.
그림자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사실 성경을 바로 해석을 하는 사람이라면 신약보다는 구약이 더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불행한 일이기도 합니다. 만약에 그들에게 구약과 신약이 같이 주어졌더러라면 아마도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더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신약은 그래도 어느 정도 실체가 보입니다.
그러나 구약은 전혀 안 보이다 보니까 말씀을 바로 해석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있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보는 마음부터가 달라서 스스로 망하는 길로 가고 있습니다.
가장 문제는 이 시대 목사들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것에 따라서 영혼이 죽고 살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를 않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배운 것이 마치 전부 바른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거기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신학교에서 배웠던 것을 그대로 가지고 있고 또 신앙생활을 하면서 배웠던 것을 기초로 삼고 있습니다.
세뇌는 무섭습니다.
아니 한번 잘못 본 것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잘못 본 것에 꽃이게 되면 거기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 이 시대 목사들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그것을 교인들에게 그대로 가르쳐 주고 있고 교인들도 역시 마치 오리 새끼같이 그대로 답습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고민을 안 합니다.
성경을 보면서 전혀 고민하지 않고 있습니다. 분명히 자기 마음에서는 감동을 받고 있으면서도 전혀 고민하지 않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회의 모습이라고 보면 맞습니다. 자기가 설교한 그것이 마치 칼과 같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칼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생명을 무참하게 죽일 수도 있고 또 살릴 수도 있지만, 영혼이라는 것이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다 보니까 칼을 아무렇게나 휘두르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가르치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책임의식이 없습니다.
아니 문제는 자기가 바로 믿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바르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고민이 필요하지 않고 또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얼마나 오묘하고 깊은가를 깨달으면 조금 더 겸손하고 고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안 합니다.
제가 전하는 것이 만약에 진리가 아니라면 저는 더 이상 이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차라리 세상에서 편하게 내가 하고 싶은 것 하다가 죽는 것이 더 유익하지 왜 스스로 화를 자초 하겠습니까? 성경에서는 화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많이 하고 있지만, 그것은 이스라엘의 문제고 이 성경을 보고 있는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깨어 있으시기 바랍니다.
정말 지혜를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알고 있는 성경의 지식이 얼마나 미천한가를 늘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성경에 대해서 더 많은 고민을 하게 되고 늘 깨어 진리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사람들이 거의 다 대학을 나오다 보니까 아무나 다 성경을 보고 마음대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지식입니다.
그런 지식을 가지고 성경을 보고 그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런 해석들이 얼마나 위험하다는 것을 모르고 그저 자기들이 알고 있는 세상 적 지식을 기초로 해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성경을 성경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기반으로 해서 성경을 보다보니까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 49:4절을 보면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
성경은 오묘합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성경은 비유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성경을 너무 쉽게 보고 있습니다. 문자에 나타나고 있는 그대로를 보고 있고 그것을 그대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성경을 모르고 세상에서 지성이 있는 사람도 성경을 보고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대학을 나온 사람 정도면 목사가 하는 말을 그대로 할 수 있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자를 보면 죽습니다.
성경에 있는 문자는 한 마디로 이 세상에 좋은 책을 보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좋은 책을 보아서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문자로 보고 있고 그것을 따라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비유라고 하니까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을 가져다가 비유로 풀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비유로 되어 있지만, 그 비유의 답이 성경 안에 있다는 것을 늘 기억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비유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고민하기 싫어서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비유를 보아야 합니다.
비유가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비유로 풀려고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왜 비유로 풀지를 못하는가 하면 열리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한두 가지 정도는 비유로 해석을 할 수 있는데 성경을 계속해서 해석을 하다 보면 도무지 안 보이는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안 보입니다
성경은 정말 오묘해서 정말로 안 보이는 말씀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저도 나름대로는 성경을 많이 해석을 하고 있고 그리스도편지를 통해서 글로 남기고 있지만 이제 겨우 기초를 보고 있습니다. 정말 그 뜻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는 말씀들이 많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것은 성경이 그만큼 오묘하기 때문에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지 않으면 도무지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자기가 이 세상의 이성적 지식이 있으면 성경을 보고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인터넷을 보면 아무나 성경을 해석하고 있고 그것을 전하고 싶어서 아주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일이 얼마나 복음을 방해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영혼들을 무참하게 죽이고 있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너무도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정말로 안타까운 것은 제가 누군지도 모르고 자기가 쓴 말을 저에게 끊임이 없이 보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벌써 그가 보낸 말을 한편만 보아도 그의 생각을 알 수 있는데 정말 지치지 않고 벌써 1년이 넘게 보내고 있습니다.
안 봅니다.
아니 볼 필요도 없는 쓰레기 같은 글입니다. 그런 글을 써가지고 그렇게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사단에게 미혹을 당하면 사람이 그렇게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차라리 가만히 있으면 화는 면할 수 있는데 스스로 화를 자초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이 세상의 죄인으로 살면 화는 면할 수 있는데 교회 안에서 열심을 내다가 화를 당하고 있습니다.
누가 화를 당합니까?
이 세상 사람이 화를 당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그저 이 세상의 죄인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로 알지 못하면 그는 악인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죄인은 그냥 죽으면 끝이지만 악인은 화가 있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 악을 행하는데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왜 열심을 냅니까?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악이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라는 생각을 가져도 그렇게 열심을 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짐승에게 미혹이 되어 있는 사람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다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열심을 내다가 결국에는 화를 당하는 가장 불쌍한 자가 되고 맙니다.
이 세상 사람이 불쌍합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사람도 물론 불쌍할 수 있지만, 교회 안에서 악을 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더 불쌍합니다. 자기는 선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악을 행하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형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이스라엘의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제사장들에게 그리고 그들의 말을 듣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 화가 있다고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 이 시대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런 말씀을 보면서 그것은 이스라엘의 문제고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표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했으면 이 시대도 그렇다는 것을 늘 기억을 하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제가 늘 강조를 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면 이 시대도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오셨다면 누가 못 박아 죽이는가 하면 바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을 합니까?
이스라엘은 비록 그렇게 했을지라도 자기들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단이 얼마나 지혜로운가를 모르고 사단의 계략에 모두가 넘어가고 있습니다. 사단은 늘 비교를 하게 만들어서 저들은 나빠도 나는 좋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비교에 모두가 다 넘어가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죄를 안 짓고 선을 행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 사람들은 자기들은 선을 행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이스라엘을 미혹했던 것과 같이 이 시대도 역시 그렇게 미혹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비교하는 눈을 가지고 자기들이 조금 더 선하게 느끼게 만들어서 비록 이스라엘은 그랬을지라도 자기들은 안 그렇다고 생각을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싶어도 못 죽이는 것이 이 시대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들만 죽였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이 시대 예수 그리스도께서 또 오신다면 이 시대 교회는 분명히 어떻게 하든지 죽이고 말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인생은 똑같습니다.
이스라엘이라고 다르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역시 똑같이 그들보다 더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하고 늘 깨어 지혜를 구해야 하는데 이 시대는 영생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교회 안에 있는 것으로 영생을 얻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할례를 받은 것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을 했던 것과 같이 이 시대는 정통이라는 교회 안에 있는 것으로 영생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늘 타락을 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는 다르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비유로 가르쳐 주고 있지만, 그 비유를 풀지 않기 때문에 설령 풀었다고 해도 교회가 타락을 한다는 것을 자기들의 입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계속해서 교회가 어떻게 타락을 하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9절,“그 성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우리 주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엘리야가 활동을 하다가 하나님께서 이제 엘리사에게 그 일을 하게 하라고 하고서 엘리야를 회리바람으로 해서 하늘로 올려가셨습니다. 엘리야 시대가 막을 내리고 이제 엘리사 시대가 왔으며 엘리야를 따르던 모든 사람이 다시 엘리사를 따르고 있습니다.
갑절의 영감을 받았습니다.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가면서 네가 무엇을 구하느냐 하니까 엘리사가 당신의 영감을 갑절을 원한다고 했습니다. 실제 엘리야가 올라가고 나서 하나님의 영감이 엘리사에게 갑절로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일을 한다든지 또 어떤 행동을 하게 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고 있는 일들을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성경 말씀을 보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을 하고 있는 가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은 그냥 기록이 된 말씀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다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보아야 합니다.
한 성에 갔습니다.
그런데 성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진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성읍은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 정말 아름답게 보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입니다.
“그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께서도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좋지만, 물이 좋지 않아서, 이 땅에서는 사람들이 아이를 유산합니다."”
성읍이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물이 좋지 않아서 이 땅에서는 사람들이 아이들을 유산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약은 그림자와 비유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이들이 유산한다는 것은 그 성읍에서는 생명이 탄생이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좋지 않습니까?
물이 안 좋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않아서 아이들이 유산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물을 누가 줍니까? 예수님께서 우물에 물길러 온 여자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14절을 보면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답습니다.
이것은 보이는 율법의 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고 있는 율법의 의는 아름답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물이 좋지 않아서 아이들이 유산을 해서 아이들이 더 이상 태어나지를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읍은 교회를 말씀하기도 합니다. 그 교회가 겉으로는 아름다우나 물이 안 좋아서 아이들을 유산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 시대 교회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물이 안 좋으면 아이를 낳을 수 없습니다. 영혼이 탄생이 안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물을 먹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을 해서 이 세상의 누룩을 썩어서 먹고 있기 때문에 생명이 탄생이 될 수 없습니다.
성읍의 터가 아름다운 교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 시대 교회는 점점 더 아름답게 지어지고 있습니다. 마치 유럽의 중세 시대를 방불할 정도로 교회가 서로 경쟁을 하면서 아름다운 것을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불행하게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이 없습니다. 물론 매일 설교는 하고 있지만 물이 안 좋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먹이는 것이 아니라 온갖 누룩을 다 썩어서 먹이고 있습니다.
설교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라는 그들이 정통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겨우 한마디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예화를 이야기하고 있고 유머를 이야기하고 있고 정치 사회를 이야기하고 있고 또 이 세상의 지적인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성읍이 아무리 아름답고 터가 좋아도 그런 상태에서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영혼이 탄생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생수를 먹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배에서 생수의 상이 흘러넘쳐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성읍은 터가 좋고 겉보기에는 너무 아름답지만 물이 안 좋으니까 구원을 받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아름다운 교회에 들어가 있다고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마시고 있는 물이 어떤 물인가를 바로 분별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내 영혼의 생명과 직결이 되고 있습니다.
왜 모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전하면 그 물은 좋습니다. 그러나 예화를 전한다든지 이 세상의 정치를 전한다든지 유머를 전한다든지 심지어는 드라마 이야기를 한다든지 또 이 세상의 지적인 이야기 감동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그 물은 안 좋은 물입니다. 그 물을 먹고 있는 상태에서는 절대로 생명이 탄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너무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또 은사에 대해서 너무 강조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다면 물이 엄청 안 좋아서 거기에서는 생명이 탄생이 될 수 없습니다. 율법을 지키라는 이야기를 들어도 모릅니다. 십일조를 믿음이라고 말한다면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냥 그 물을 먹다가 죽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자기들이 교회 안에 행하고 있는 행위들을 믿음이라고 한다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그 물을 먹다가 죽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자기가 어떤 물을 먹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가 먹고 있는 물이 어떤 물인가를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물이 중요합니다.
너무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자기들이 어떤 물을 먹고 있는 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하는 그 말씀은 듣는 것이 아니라 거의 율법에 대해서 듣고 있고 은사에 대해서 듣고 있고 이 세상의 지식에 대한 누룩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썩어서 듣고 있다면 절대로 그 성읍에서는 영혼이 탄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물이 나쁘다는 것은 오직 예수가 아니라 누룩이 섞인 것을 먹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참으로 놀랍게도 우리에게 이렇게 바로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만을 전하면 오히려 그것이 맛이 없다고 투정을 하는 것이 이 시대의 모습입니다, 자기들의 지적인 수준이 너무 높다 보니까 오직 예수를 먹는 것은 너무도 싱거운 말씀으로 밖에 들리지가 않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19절을 보면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종과 아들의 비유입니다. 누가 종이고 누가 아들인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지만, 누구는 종으로 살아가고 있고 누구는 아들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복음을 전했지만, 그들은 금세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율법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갈라디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해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이 안 좋아서 율법을 먹고 있는 갈라디아 교회의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말씀입니다.
엘리사 시대에 성읍은 아름답고 터가 좋았으나 그 물이 안 좋아서 아이를 유산했습니다. 해산을 하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주의에 물들어 있는 이스라엘을 엘리사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해산을 하려면 반드시 진리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물이 안 좋아서 더 이상 아이들을 낳을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도 교회가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그 안에 있는 물이 안 좋으면 절대로 해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아무 물이나 닥치는 대로 먹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미디어를 통해서 하루 종일 물을 먹고 있지만, 실제 그 물로 인하여 자기 안에 영혼이 탄생이 안 된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말씀 너무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말씀을 아무렇게나 듣고 있습니다. 온갖 물을 섞어서 먹으면서도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먹는 물이 어떤 물인가를 모르면 그 성읍이 아무리 아름답고 터가 좋아서 모든 사람의 눈에 좋게 보일지라도 생명이 탄생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잘 분별을 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앞에서 말씀을 드린 그런 것들만, 주의해도 내가 무슨 물을 먹고 있는 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너무 나쁜 물에 중독이 되어서 이제는 그 마약을 끊을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지만,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가 무엇인가도 모르고 그저 예수 믿으라는 말 한마디에 오직 예수를 전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문제입니다.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그것이 육적인 것이라면 사람들이 이렇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영혼의 문제다 보니까 전혀 모르고 그저 무감각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 육체의 생명이 죽는다 해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사람들이 자기 영혼이 죽는 그 물을 먹으면서도 그것을 아주 맛있게 잘 먹고 있습니다.
20절,“엘리사가 가로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물이 나쁩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이 나쁜데 소금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물에 소금을 타면 짜서 그 물을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새 그릇에 소금을 가져오라 하고 있습니다.
시편 34:8절을 보면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소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선하심이 소금입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먹던 물은 나쁜 물입니다. 그 물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엘리사가 넣어 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생명의 문제입니다.
물이 안 좋아서 아이가 유산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엘리사가 알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먹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복음입니다. 이 세상에 복음을 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신 것이 하나님께서 선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모릅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먹는 물이 어떤 것인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나쁜 물을 먹으면서도 그 물이 왜 나쁜 물인 줄을 모르고 먹고 있다 보니까 그 성읍에서는 아이가 탄생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읍은 너무 아름답고 터는 좋지만 물이 안 좋아서 아이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모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맛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려면 우선 율법을 제하여야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의 모양이 내게 있으면 절대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수도 없고 생명이 탄생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읍 아름다워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다니고 있는 교회가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그것은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그 아름다운 교회만을 보고 그 안에 들어가면 무조건 구원을 받을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교회의 겉모습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지금 이 시대도 그런 교회를 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중요한 것을 모릅니다.
그저 이스라엘과 같이 행위에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는 모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 외식하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데도 역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외식을 하고 있습니다.
맛보시기 바랍니다.
엘리사가 그 성읍에 준 것은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선하신 분인가를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 선하심의 맛을 알고 있는 성도는 그 생명이 탄생이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물이 나빠서 절대로 그 안에 새 생명이 탄생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가 먹고 있는 물을 모르고 먹는다면 그는 너무도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육체도 그렇습니다.
내가 먹고 있는 물의 성분을 정확하게 알고 먹어야 건강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대기업에서 만들었다 해도 무조건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하는 소비자는 성분을 꼼꼼히 살피고 내가 먹어야 하는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지를 분별을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마치 대 기업에서 만들면 다 신뢰를 하는 것 같이 교회에서 주는 말씀을 무조건 받아먹고 있습니다.
21절,“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며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 좇아 다시는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을찌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물을 고쳐야 합니다.
이 말씀은 정말 중요합니다. 내가 먹는 물을 고치지 않으면 그곳에서는 절대로 영혼이 탄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물을 만 명이 먹고 있습니까? 그 물을 십만 명이 먹고 있습니까? 아니 천만 명이 먹으면 뭐합니까?
그 물을 먹으면 아이가 유산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복음을 전해도 정말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하는데 물이 나쁘면 그것의 결과는 보나마나 빤한 것입니다. 한국기독교가 천만 명이라고 자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숫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성읍이 아름답고 터가 좋으면 뭐 합니까? 그곳에서 나는 물이 나쁘면 그 사람 모두가 다 죽는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자기 육체를 위해서도 안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을 위하는 물인데도 아무 것이나 먹습니다. 육체 같으면 물이 나쁘면 금세 탈이 나서 알 수 있는데 영혼의 물은 자기가 죽을 때까지 그런 탈이 안 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 물에 반드시 소금을 던지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진짜 소금을 던지라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선하심을 알게 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물을 고치시기 바랍니다.
그 성읍이 아무리 아름답고 터가 좋으면 뭐 합니까? 교회를 아무리 잘 지어 놓으면 뭐 합니까? 그런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안에 있는 물이 나쁘면 그 안에 수십만 명이 있다 해도 그들이 다 죽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만 잘하면 살 수 있다고요?
너무도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물이 나쁜데 나 혼자 어떻게 잘합니까? 사단은 늘 그렇게 미혹을 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를 통해서 그 성읍의 물을 하나님께서 고쳐 주셨습니다. 그 물을 고치고 나니까 이제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22절, “그 물이 엘리사의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날에 이르렀더라”
물이 고쳐졌습니다.
교회 안에서 전하고 있는 말씀이 고쳐졌다는 말씀입니다. 그 물이 고쳐지지 않으면 그 성읍 안에 있는 사람은 절대로 아이를 낳을 수 없습니다. 이제 고치고 나니까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말씀 너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목사가 전하는 말을 너무도 신뢰하고 있습니다. 아니 거의 맹목적으로 그 말을 따르고 있습니다. 자기가 먹고 있는 물이 어떤 물인가를 모르고 그래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죽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계속해서 그 물을 먹고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교회는 물이 나빠서 다 죽고 있습니다. 아니 이 시대 거의 모든 교회에 물이 얼마나 나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문제는 내 영혼의 생명의 문제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기 영혼의 문제를 너무 쉽게 생각을 하고 있고 자기가 어떤 물을 먹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안 고쳐집니다.
한번 나빠진 물은 절대로 안 고쳐집니다. 내 스스로 그 물이 어떤 물인가를 알 수 있게 지혜를 구하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전해지고 있는 물이 고쳐질 것이라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미 오늘날 교회 안에서 전해지고 있는 말씀들에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사라졌습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오직 예수를 모르면 어쩔 수 없이 나쁜 물을 먹게 되어 있습니다. 지혜를 구해서 오직 예수를 먹고 구원을 받아 천국에서 모든 축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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