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요1서2:25)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엡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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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마음은 머니이다

윤주만목사 2016. 2. 15. 21:04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마음은 머니이다

 

예레미야12:1-4절을 보면

여호와여 내가 주와 쟁변할 때에는 주는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 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마음은 머니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예비 하옵소서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거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결국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이 드는 부분입니다.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가 교회 안에 있는 율법주의자들보다 더 어렵고 힘든 세상을 살아갈 때에는 내 믿음이 바른 것인가 하는 의심을 갖게 되고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성경은 오직 믿음을 말씀합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을 성도라 하고 교회 안에 있지만 율법주의에 미혹이 되어 있는 사람을 악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세상 사람은 악인이 아니라 죄인이며 악인이라고 하면 교회 안에 있으면서 구원을 방해하는 자들을 예수님께서 악한 자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인은 이 세상 모든 사람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교회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의 경륜을 방해하는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에 바리새인들이 바로 악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지키는 율법을 사수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는 악행을 저지르고도 마음에 가책을 받지 않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25장에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의인은 오른 쪽에 악인은 왼쪽에 있는데 의인이나 악인이나 모두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서 주여 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은 예표와 그림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잘 분별할 수 없지만 신약에 의인과 악인은 분명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도 그렇고 달란트의 비유도 모두가 예수를 믿는 다고 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의인이 있고 또한 악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 교회 안에 있는 의인 보다는 악인이 사람들의 눈에는 더 형통하게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형통함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미혹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그들의 형통하지 않다면 미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주 작은 교회에 그것도 교인이 체 10여명도 안 되는 교회에는 있으나 마나 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름 있는 교단에 소속이 되어 있고 교인들의 수가 수천 명 수만 명일 때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클 수밖에 없고 한번 그들이 잘못된 길로 가게 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미혹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거지에게 속을 사람은 없습니다.

사는 것도 궁색하고 차림도 형편이 없는 사람에게 속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도 율법주의로 잘 포장이 되어 있어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 좋은 사람들에게 미혹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예레미야도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악인이 형통하니까 이스라엘이 다 미혹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눈물로 호소를 하지만 워낙 악인들이 잘 되고 있으니까 사람들의 예레미야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잘 못되고 있다면 예레미야의 호소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고 선지자의 말대로 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래왔듯이 이 세상에서는 의인 보다는 악인이 형통하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무 형통하다는 것은 악인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지난 1500여 년 동안 천주교는 거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황은 유럽의 왕을 세울 수도 있었고 또 왕을 폐할 수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성경 말씀보다도 교황의 말을 더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역시 교황의 말은 곧 교회의 법과 같이 세워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형통한 자를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모든 것이 꼭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선진들 중에는 이 세상사는 동안 형통한 삶을 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 다수는 의인이 형통하기 보다는 악인이 형통했던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 의인을 통해 역사하실 때 형통하게 보였을 뿐입니다.

 

구약은 그림자입니다

사실 신약에 와서 의인은 형통하기 보다는 고난과 환난 속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지켰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슷한 사례지만 구약의 요셉은 감옥에서 나와 총리가 되었지만 신약의 세례 요한은 그 감옥에서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다니엘은 사자의 굴에서 구원을 받고 그 친구들은 풀무 불에서 건짐을 받지만 신약의 사도들과 성도들은 오히려 그대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그런 일들을 보면서 마치 육체의 형통으로 보면 안 됩니다

그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그림자로서 그들의 육체의 구원은 우리 영적인 구원을 가르쳐 주기 위한 말씀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와 쟁변할 때에는 주는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 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

 

예레미야 같은 대 선지자도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입니다

그런데 지금을 사는 우리가 이런 것을 쉽게 받아들인다는 것이 사실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내려 주셔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아는 성도만이 이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 안에서 바로 보면 분명히 저 사람은 악인에 속해 있는데도 그가 잘 되고 형통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그런 것을 보며 실망을 하고 또 심지어는 자기 믿음까지도 저버리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저 또한 참담하기만 합니다.

 

잠언24:1절을 보면

너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기도 원하지 말지어다

 

이 형통이라는 단어가 구약에만 나옵니다.

그런데 의인에게도 형통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악인에게도 형통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때문에 성경을 보면서도 쉽게 이해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러나 의인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기 위해서 형통한 것이고 악인은 그 처지가 형통한 것입니다

 

내가 지금 어렵습니까?

정말 사는 것이 고생과 고난 입니까? 비록 그런 삶을 살고 있을지라도 내 영혼이 형통하다는 것을 믿는 성도는 환난 가운데서도 주님을 찬양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자기 환경을 보기 때문에 그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형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저주를 받는 자들이었습니다. 사자 밥이 되고 십자가에서 화형을 당하고 하는 그들을 누가 형통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이 있는 성도들의 눈에는 그들의 영혼은 분명히 형통했습니다.

 

거의 모든 선지자들은 형통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레미야도 그 당시 제사장들에 의해서 공격을 받게 되고 거의 홀로 악한 자들과 싸움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혼자서 외톨이가 되었으면 다시는 주의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그러나 답답하여 견딜 수 없어 또 나가서 주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지금은 영적인 시대입니다

거의 다수는 악인이 형통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모두 다 그렇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전파를 위해서는 때로 의인들도 형통을 하게 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대부분 악인이 형통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형통하기를 바라지도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은 기복주의라는 율법주의에 미혹이 되어서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고 그들과 함께 있기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형통한 것을 자기도 그와 같이 형통하기를 바라면서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분복이라는 것은 각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도 그것을 인정하기 보다는 누구나 하나님으로부터 더 많은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아니 더 많은 복을 받아 형통하고 싶은 사람들의 끝없는 욕망을 이 시대 율법주의자들은 아주 잘 이용을 하고 있습니다.

 

와서 사정을 합니다.

그리고 그 형통함을 배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고 그저 세상에 사는 동안 형통하기를 바라면서 형통한 자들을 찾아와서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그들의 형통을 자기도 나누어 받으려고 하다가 오히려 심각한 피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니 자기들의 형통함이 마치 믿음의 기준이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대해서는 전해 깨닫지를 못하고 패역한 길을 가고 있습니다. 육체의 형통함이 있으면 그따위 믿음은 문제가 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을 이야기 하면 어떻게 믿음만 있으면 형통할 수 있냐고 되묻고 있습니다.

 

악인은 형통하고 패역한 자는 안락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에는 그것이 너무 좋게 보이기 때문에 그들의 형통함과 안락함을 쫓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 시대에 누가 고생과 환난을 좋아하겠습니까? 아마 고난과 환난을 감당하라고 하면 오히려 다 떠나가고 말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도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악한 길로 가는 것을 보시면서 그들을 징치하시기 위해서 바벨론에 70년 포로 생활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형통하고 안락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레미야의 말씀에 대해서 공격을 했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의 삶은 나그네입니다

말로는 나그네라고 하는 그들이 지금 이 세상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나그네는 고난과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똥개도 제 집에서는 짖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나그네는 때로 그런 개한테도 괄시를 받고 쫓겨나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감당하려 하지 않습니다.

빨리 그것을 벗어나서 형통하고 안락하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포로 되어 70년 동안 고난을 당하라 하시고 또 광야에서 40년 동안 고난을 당하라고 하시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싫어하고 있습니다. 잠시 고난을 당하는 것조차 싫어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11:24-25절을 보면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성도는 고난 받는 것을 좋아해야 합니다.

왜 고난 받기를 좋아 해야 하느냐면 그 고난 뒤에 영광스러운 천국을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고난이 없이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은 너무도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형통하고 안락을 누리며 살다가 또 우리가 너무도 바라는 천국에도 들어가려 한다면 그는 바른 믿음을 가진 성도가 아니라 정욕에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내가 누릴 것을 다 누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신 분복을 누리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참 성도라 하면 그것조차도 이 세상에서 복음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모세가 바로의 아들이 되기를 거절하는 것 같이 성도는 이 세상에서 고난 받는 것을 좋아해야 더욱 좋은 곳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살았으면 형통하고 안락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믿음이 있는 성도였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형통과 안락을 포기하고 고난 받는 것을 좋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인들은 고난 받는 것을 너무도 싫어하고 있으며 그것을 감당하려고 하지 않고 아주 작은 고난만 와도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마음을 돌리려 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기도를 안 했겠습니까?

그리고 바벨론에 포로 되어 갔던 성도들이 기도를 안 했겠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그 기도가 얼마나 악한 행위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악인은 기도를 해서 그것을 어떻게 하든지 관철을 시키려 하고 의인은 고난 받는 것을 마땅히 감당하면서 그것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마음은 머니이다

 

교회 안에서 주여주여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입으로는 무슨 말이든 다 합니다. 순교를 하겠다고 하면서 아주 큰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입으로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못할 것이 없습니다.

92년에 있었던 이 장림 휴거 사건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입술로는 휴거가 되니까 교인들에게 모든 재산을 팔아서 교회에 가져오라고 해 놓고서는 그 돈을 모두 자기 예금 통장에 넣어 두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자기 것은 내 놓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젊었을 때 재산을 내 놓고 교회를 세운 것을 이야기 하면서 지금은 그것의 수십 배 수백 배를 가지고 있으며 누릴 것 다 누리면서 교인들에게는 믿음이 없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이치로 말하면 투자를 한 것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들이 진정 하나님의 선지자라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헌신을 해야 합니다.

 

젊었을 때 빈민의 아버지라고 부르던 그 목사가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제가 누구라고 말씀을 안 드려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젊었을 때의 투자를 수백 배로 불러 놓고서 지금은 온갖 것을 다 누리며 안락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입술로는 주여주여하고 있지만 그 마음은 이미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기 때문에 타락을 하고 만 것입니다

 

말로는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아주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겉의 열매를 보고 미혹을 당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물론 겉의 열매를 맺는 것 중요하지만 그러나 속에 열매가 있는 가를 분별해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지 않으면서도 주여주여하면서 형통한 가운데 모든 안락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가 누리고 있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너무 형통하고 사회적으로 누리고 있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도들 중에 누가 그렇게 누렸습니까? 같은 목사들을 기준으로 보지 마시고 사회를 기준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 성도가 1000명이 되니까 이 정도는 당연히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그 교회에 가난한 자들과 얼마나 함께 나누며 살아가고 있는 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입으로는 주여주여 하면서 내 교회에 아직도 셋방을 사는 사람이 부지기수이고 300만원도 안 되는 월급을 받는 사람이 다수인데 단지 교인 숫자가 많다고 해서 그가 사용하는 돈이 그 이상이 되고 있다면 그는 누릴 것 다 누리고 형통하게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느 사도들이 그렇게 누리면서 복음을 전했습니까?

 

사도들은 극심한 가난과 외적인 생명의 위협까지 받아가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결국 모두가 순교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순교의 위험도 없는 아주 평안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서 입술로는 할 수 있는 말을 다 해가면서 모든 것을 다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일 가능성이 너무 높습니다.

 

그들의 외적인 열매를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외적으로 맺혀 있는 열매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그가 참 내적으로 열매를 맺어 있는 가를 정말 분별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하심을 달라고 해서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스스로 내 생명을 지키지 못하면 악인에 의해서 함께 멸망의 길로 가게 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예비 하옵소서

 

어느 시대고 마찬가지입니다.

참 선지자는 그 숫자가 아주 적습니다. 더구나 종교의 자유가 허락이 되어 있는 나라에서는 거의 타락을 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교회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런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이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기독교는 진리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싸움을 하며 박해를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공인이 되고 나니까 그 이후부터는 종교를 가지고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종교가 권력화 되어 말았습니다.

 

거의 모든 선지자들의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은 타락을 하고 선지자 홀로 그 이스라엘 전체와 진리를 가지고 싸우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다수를 따라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도 다수의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거절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악을 행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행한 일이 악한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들이 행한 일이 악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이스라엘은 벌써 회개를 하고 예수를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회개를 안 하고 버티다가 결국 히틀러에 의해 자기들이 맹세를 한 그대로 그 자손들이 수난을 당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는 모릅니다.

그러나 죄를 짓는 자는 자기가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악을 행한 사람들은 그것이 사람들이 보기에는 바르다고 보이기 때문에 자기가 행한 것이 악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 시대도 악을 행하는 자들은 그것이 악이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멸망의 날이 갑자기 닥쳐 올 때까지도 모르고 있다가 진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악인은 자기 행위가 악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아니 오히려 선하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더욱 빨리 악에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죄인은 회개를 할 수 있지만 교회 안에 있는 악인은 절대로 회개를 하지 않고 있으면서 형통함과 안락을 누리고 있다가 주님께서 오시는 날에 갑자기 자기에게 당하는 일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거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결국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악인은 자기들의 결국이 어떠한 가를 모릅니다.

자기들에게 닥칠 진노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악에 더 익숙해서 악을 행하기를 좋아 합니다. 이스라엘은 악을 행하고 있었고 그것을 옳다 생각했기 때문에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악하면 그 온 땅이 다 악해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6:7절을 보면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이스라엘은 먹을 수 있는 체소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 땅에는 가시와 엉겅퀴가 나서 모든 것이 다 말라 버렸습니다. 영적으로는 먹을 수 있는 채소가 없으면서도 그들의 육체는 형통하여 안락함을 누리면서 자기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형통하고 안락함을 누리는데 설마라도 자기들이 진노를 받을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고 또 예수를 믿는데 있어 아무 문제가 없는 그런 형통하고 안락한 지금의 현대 교인들은 예레미야를 통해 우리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처럼 아무 걱정도 안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면 그들은 뿌리를 내릴 정도로 그들의 부모로부터 신앙을 내려 받았고 또 겉으로 보이는 풍성한 열매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 때에서부터 행해온 모든 일들이 너무도 아름다운 열매가 되어 있고 자기도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형통하고 아무 문제가 없이 안락함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자기 결국을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처럼 종교의 자유가 있을 때는 더욱 더 분별을 해야 합니다. 자유가 없을 때는 진리를 지키기 위해 생명을 걸고 싸우지만 자유가 주어지면 그 다음 부터는 싸울 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급격하게 기복주의에 빠져 형통함과 안락함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악인이 형통한 것 부러워하지 마세요.

그들을 따라가려 하지도 마시고 또 그들이 누리고 있는 안락함을 함께 누리려 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하늘의 기업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에서는 고난을 당해도 기뻐하면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고난 받는 것을 좋아하는 성도가 되셔서 천국에 있는 기업을 상으로 받으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