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강,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행전4:32-37절을 보면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성경을 너무 이용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이 설교를 교회에서 들으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고 참을 수가 없어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다는 것이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교인들의 숫자나 많으면 모르겠습니다. 이제 십여 명도 안 되는 교회의 목사도 이런 성경말씀을 이용해서 교인들로 하여금 죄책감에 빠져 들게 하고 있고 그 말을 들을 교인들은 스스로 정죄에 빠질 것이 분명 합니다
헌금해야 합니다.
저는 한 번도 헌금에 대해서 반대를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이 나쁘다면 아무리 그것을 가지고 선한 일에 사용한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하고서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모순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아버지에게 효도를 하겠다고 그 아들이 남의 돈을 훔쳐서 그것으로 아버지에게 좋은 선물을 사다 드리고 또 용돈을 드리고 아버지가 좋아하는 것을 해 드린다고 그 아버지가 기뻐하시겠습니까? 어느 아버지가 너 참 잘했다 네 마음이 너무 좋구나, 아버지를 위해 이렇게 하는 네가 참 이쁘구나 하면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모르면 혹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은밀한 것까지도 다 아시는 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아무리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 해도 그 방법이 안 좋으면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이고 그것은 성도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가 헌금을 강요할 정도로 어렵다면 차라리 다른 방법을 택하는 것이 좋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교회 운영이 안 됩니까?
헌금을 할 사람이 없어서 그리고 헌금을 적게 해서 임대료도 못 낼 정도라면 차라리 교회를 닫고 가정에서 예배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10여명도 안 되는 사람들을 위해 건물을 세 얻어서 운영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가정에서 예배를 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을 합니다. 꼭 교회라는 건물이 있어야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초대 교회를 생각하세요.
초대 교회는 거의 모두가 가정교회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 예배를 했어도 그들은 진리를 지켰고 또 구원을 받는데 있어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가정에서 예배를 했기 때문에 돈이 많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또 성도들에게 절대로 헌금을 강요하지도 않았습니다. 지금같이 성경 말씀을 이용해서 헌금을 내게끔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신명기23:18절을 보면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이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자체가 가증하다고 말씀 합니다. 가증한 예물을 드리는 자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고 그런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개 같은 자의 소득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바로 바리새인들이 근채의 십일조를 드린 것이 바로 개 같은 자들의 소득입니다 개를 누구에게 비유를 하고 있느냐면 바로 율법주의자들을 개로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정해서 그리고 강요에 의해서 내는 헌금은 모두가 개 같은 자의 소득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예물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입니다
사람의 욕심입니다
헌금을 많이 해서 하나님의 일을 빙자해서 그것으로 결국에는 자기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기 교회의 이름을 내고 누구 목사의 이름을 내고 누구 장로와 집사의 이름을 내고 있고 결국 그 헌금이라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이 시대는 오히려 자기들의 이름을 내는데 사용되어 지고 있다는 것을 바로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행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입니까?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누구를 위해 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도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가지고 일을 했지만 그러나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악이 되고 말았고 그들은 결국에 저주를 받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헌금이 창기의 번 돈이 될 수 있고 개 같은 자의 소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차라리 창기가 번 돈이면 그리고 세상에서 개 같이 번 돈이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겠지만 강요와 율법에 의해 드리는 헌금은 절대 기뻐하시지 않고 그것을 받으시지도 않는다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헌금 절대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또 정해서 하는 헌금은 스스로 사망의 길로 가는 지름길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어느 누구도 강요를 하지 않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금을 했습니다. 또한 헌금을 많이 하면 또 채워 주신다는 것은 한 마디로 사기를 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랬다저랬다 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1억을 하면 10배로 채워 주신다고요?
그렇다면 누가 안 하겠습니까? 만약 정말로 그렇다고 하면 헌금을 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열배로 아니 백배로 채워 주셔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종교 사기꾼들에게 너무도 쉽게 속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도박장입니까?
열배로 백배로 채워 주신다는 것은 한 마디로 도박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상대로 도박을 하는 그 헌금을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느냐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어리석습니까? 여러분의 도박에 장단을 맞출 정도로 어리석은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차라리 안 믿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지 말라고 해도 합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께 잘 하고 싶은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 심리를 아주 잘 이용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시대 종교 사기꾼들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믿음이 있든 없든 간에 자기가 믿고 있는 하나님을 향해 최선을 다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성경에 어디에 열배로 백배로 채워 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성경을 보세요.
신약을 한 번이라고 정독을 했다면 어느 사도도 헌금을 강요한 적이 없고 헌금을 걷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이용한 적이 없습니다. 사도들은 정말 어려운 가운데서도 복음을 전했고 또 헌금에 대해서 마음을 쓰지도 않았고 오직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만 최선을 다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 십일조를 받고 누가 정해진 헌금을 강요를 했습니까?
욕심이 너무 지나치면 화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하면 되는데 남이 하니까 자기도 하고 싶고 남이 교회 건물을 지니까 자기도 짓고 싶고 남이 선교를 하니까 자기들도 선교사를 파송하고 싶고 그런 행위가 마치 대단한 것으로 보여 지니까 헌금을 하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는 그 한마디면 모든 것이 다 용납이 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 선교사를 파송합니까?
결국 그것도 자기들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고 그렇게 하는 행위들을 보면서 자기 믿음이 대단한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복음도 없는 사람들을 파송하면서 그들이 행위로 하는 것을 보면서 대단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들의 마음에는 테레사 수녀도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제가 천주교를 비하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바른 믿음이 없는 테레사 수녀가 한 모든 행위는 결국 사람의 의만 드러난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일들은 불교에서도 행하고 있고 아니 종교가 없는 사람들도 세상에서 선을 행하고 싶어서 자기를 불태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헌금이 탐욕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원하는 마음이 아닌 헌금은 자기를 멸망의 길로 이끌고 있고 그것이 바로 기복주의가 되어서 하나님을 상대로 도박을 일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율법의 시대는 지났고 오직 자원하는 마음에서 자기가 감동을 받는 그대로 하면 됩니다.
32절,“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과연 이렇게 행하는 교회가 있습니까? 이것은 초대 교회에서 그 당시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지 현대 교회 안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말씀을 가지고 이 시대에 그대로 적용을 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면 교인들은 스스로 정죄에 빠지게 됩니다.
누가 그렇게 합니까?
아니 솔직히 목사 자신부터가 그렇게 할 자신도 없으면서 왜 교인들에게 강요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물론 조금 나눠주고 하는 일들은 있을 수 있겠지만 어느 누구도 초대 교회와 같이 할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 정도가 되려면 정말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가능한데 오히려 이 시대는 이단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종말론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고 그 안에서 서로 제 것이라고 하지 않고 살아가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오랜 세월을 그렇게 살다보면 역시 다툼이 일어나고 나중에는 그 공동체가 해체 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정말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면 시키지 않아도 이렇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시켜서 되었다고 생각을 합니까?
사도들이 이렇게 하라고 강요를 해서 그들이 제 것을 제 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서로 나누어 썼다고 생각을 합니까?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조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먼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습니다.
개역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한 뜻이라는 단어 앞에 4)라는 숫자가 기록이 되어 있고 성경 아래에 4)에 대해서 영혼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 안에서 한 영혼이 되었기 때문에 자기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을 수 있었고 서로가 도울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한 가족 보다도 주님 안에서 한 영혼으로 구성이 되어서 제 것을 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가족입니다
육신의 형제도 자기 것을 나눌 수 있는데 하물며 영의 가족들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누가 시켜서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 한 형제이기 때문에 제 것을 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서로 통용해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먼저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된 상태가 되니까 자기 것을 아까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충분히 가능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는 성도들이라면 이런 일이 가능하지만 그저 종교인으로서 교회에 나온 사람들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시키지 않아도 감동을 받아 스스로 하는 일과 시켜서 억지로 하려고 하면서 그것이 제대로 안 되니까 스스로 정죄에 빠지는 일은 차원이 다릅니다. 사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육신의 형제보다도 더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 안에서 한 형제입니다
그런 형제들의 모임에서는 당연히 이런 일들이 일어났고 실제 중세 시대에도 믿음을 지키고자 했던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종교화되어 있는 집단을 피해 산으로 들로 유리하면서 그렇게 살았던 것을 종교사를 통해 익히 알 수 있습니다.
33절,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사도들이 무엇을 증거 했습니까?
너희들이 숫자가 많으니까 그리고 교회에서 할 일이 많으니까 헌금을 하라고 강요를 했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도들은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 했습니다. 그 부활의 증거를 듣고 사람들이 큰 은혜를 입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만 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죽으신 후에 사흘 만에 부활 하셔서 천국에 올라가셨다는 말씀을 전 했습니다. 사도들은 지금과 같이 헌금에 대해서 이야기도 하지 않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만 증거를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 헌금을 강요를 하고 그 헌금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그런 일을 광고하고 자랑하고 했습니까?
정죄하지 마시고 은혜를 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그것이 선한 일이라 해도 방법이 나쁘면 정죄를 받게 되어 있고 그것은 악한 일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전했지 삼천 명이 회개를 하고 오천 명이 회개를 하고 해서 그 숫자가 늘어나서 그것을 어떻게 치리할까를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방법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만 전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왜 모르겠습니까? 교회를 보면 그 사정을 충분히 알고 있고 내가 얼마를 헌금해야 하는가를 왜 모르겠습니까? 큰 교회는 더 큰 일을 하기 위해서 그것이 자기들의 스펙이 되어서 더 많은 사람들을 모을 수 있기 때문에 욕심을 부리고 있고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자기들의 형편이 어려우니까 또 강요를 하고 있습니다.
왜 설교에 헌금 이야기를 합니까?
누가 어느 사도가 설교를 하면서 헌금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까? 한 마디로 진리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가르치려고 하고 있고 그것을 통해 탐욕을 부리고 있습니다. 설교는 그런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전하면 됩니다. 그럼 성도들은 은혜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은혜 받은 성도들이 어떠한 자원하는 마음을 가졌는가를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34절,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는 아주 가난해서 끼니를 제대로 때우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핍절하다는 말은 그냥 가난하다는 것이 아니라 아예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 형제가 굶고 있는데 그것을 보면서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가 예수를 믿었겠습니까?
돈 있는 사람이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정말 가난해서 탈출구를 찾고 싶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다 보니까 초대 교회에 한 끼 식사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노숙자들이 많아 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내 형제가 다른 것도 아니라 끼니를 굶고 있는데 과연 그것을 외면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구나 그들은 큰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말씀을 듣고 자기들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것을 확신하고 있는 성도들입니다. 그런 성도들이 자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기 밭과 집을 팔아서 한 끼 식사도 못하고 있는 성도들을 도와주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과 같이 다른 일을 하기 위해서 헌금을 강요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인간의 기본권입니다
그 기본권도 해결을 하지 못하고 있는 예수 안에 있는 형제들을 보고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을 합니다. 마치 공산주의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는 10억이 있고 누구는 1000만원이 있는데 10억 있는 사람이 집과 밭을 팔아서 같이 나눠 썼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풍요의 시대인 지금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말 한 끼 식사도 할 수 없는 그런 성도들이 곁에 있기 때문에 큰 은혜를 입은 성도들이 자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기 집과 밭을 팔아서 사도들 앞에 놓아두었습니다. 참 놀라운 말씀은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지 않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헌금이 과연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자기 집과 밭을 팔아서 드렸는데 왜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지 않고 사도들 발 앞에 두었다고 했을까요? 정말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헌금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교회를 운영하기 위해 그리고 여러 가지 일을 하기 위해 이 말씀을 가지고 헌금을 강요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가를 냉정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보이는 교회를 섬기고 있다는 생각 밖에는 안 듭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헌금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그리고 또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또 자기들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헌금이 과연 바른 헌금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초대 교회에 집을 팔고 밭을 팔아서 사도들 발 아애 두었던 그것과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냉정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교회 안에 끼니를 굶는 사람이 있습니까?
만약 그런 교인이 있는데도 교회가 모른 척 한다면 교회가 아니라 세상의 친목 단체만도 못한 집단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세상의 친목 단체도 자기 회원들 중에 끼니를 굶는 사람이 있다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서 도와 줄 것입니다
헌금을 걷기 위해서 악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현대 교인들에게 헌금을 걷기 위해서 사용하는 말씀이 아니라 진정 예수 안에서 큰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있는 교회가 어떠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가를 잘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며 은혜를 받은 성도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6:1절을 보면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누구를 위하는 연보라고 합니까?
사도행전에서 초대 교회 성도들이 했던 것과 같이 성도를 섬기는 연보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꼭 필요한 연보가 아니면 굳이 하지를 않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연보를 강요하지도 않았고 그 연보는 정말 필요할 때 성도들이 감동을 받아 연보를 했던 것을 성경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연보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나오지를 않고 있습니다.
본문 사도행전에서 말씀이 기록되어 있고 또 고린도전서 16장에 기록이 되어 있고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에서 사도 바울이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연보는 억지로 하는 연보가 아니라 정말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성도를 섬기는 연보를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와 같이 헌금 봉투의 종류가 그렇게 많지도 않았습니다.
교회가 왜 존재 합니까?
교인들로부터 헌금을 걷어서 그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존재를 한다면 그 교회는 무너져야 합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교제를 나누는 공간이고 또 성도들의 무리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주님을 섬긴다는 미명아래 오히려 주님보다도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수많은 헌금을 내고 있고 그것이 마치 하나님을 위하는 일인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음녀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음녀에 대해서 말씀을 하는데 그 음녀가 바로 내가 다니고 있는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빙자해서 자기를 섬기게 만들고 있는 교회는 다 음녀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음녀를 음녀라고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은 사람의 지혜로는 불가능 합니다 성령이 오셔서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성도만이 음녀를 분별할 수 있고 그 음녀에게서 벗어 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9:1절을 보면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다 성도를 섬기기 위해서 연보를 했습니다.
정말 교회 안에 핍절한 사람들이 많아 그 당시에는 끼니조차 때우지 못하고 있을 때 성도들이 연보를 해서 심지어는 자기 집과 밭을 팔아서 사도들 앞에 두면 사도들이 그것을 가지고 끼니를 때울 수 있게 해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과 같이 자기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일을 위해서 헌금을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너무 많은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 일들이 솔직히 하나님을 빙자해서 자기들을 드러내기 위한 일이라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리 그 취지가 좋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다고 하지만 억지로 강요에 의해서 더구나 성경말씀을 자기들 마음대로 인용을 해서 한금을 강요하는 것은 악한 일이고 또 거기에 정죄를 받는 것은 스스로 사망의 길로 내려가는 길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차라리 가만히 있으십시요.
너무 강한 열심이 오히려 자기를 해롭게 만들고 있고 그런 헌금이 개 같은 자의 소득으로 비춰져 하나님을 근심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헌금이 성경에 비추어서 바른 헌금인가를 생각해 보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하나님께 하면 나는 죄 없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잘못 사용하는 사람만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원인을 제공한 사람역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자기가 죄 없다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막연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성경에 비추어서 성경을 바로 해석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성도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어떤 헌금을 하고 있는 가를 스스로 분별하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원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주님의 날에 천국에서 영원한 복을 누리실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큰 은혜가 되어서 감동을 받아 분별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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