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너희는 귀를 기울리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야고보서 강해

야고보서 강해 23강

윤주만목사 2017. 4. 4. 14:44

야고보서4:6절을 보겠습니다. (신 374쪽)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성경입니다.

성경말씀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모르면 반드시 그는 사망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적인 능력이 있고 그것으로 문자적으로 성경을 보면서 마치 성경을 알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성경을 알 수 있을 것 같으면 성경은 악에 대해서 그리고 구원에 대해서 이렇게 까지 강하게 말씀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성경을 몰랐다고 생각을 합니까? 그들은 성경을 너무 잘 알고 있었고 성경을 통해서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어느 때를 보더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지 않은 시대가 없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이 다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기초가 바로 서 있지를 않습니다. 성경을 볼 때는 반드시 기초가 든든히 서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는 아니 이제까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그때마다 다르게 보고 있습니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어느 문장만을 보다 보니까 전혀 다르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그것은 우리 육체의 구원이 아니라 영의 구원입니다. 육체는 반드시 썩어진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런 썩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생명을 주시고 부활을 해서 천국에서 모든 축복을 누리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살아간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영의 일입니다.

그러나 이 기본이 안 되어 있습니다. 영의 일에 대해서 기초가 되어 있는 성도는 모든 성경을 볼 때 이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보고 있지만 그렇지가 않은 사람은 성경을 그때마다 문장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고 그 문장을 아는 것으로 마치 성경을 아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모르고 있습니다.

왜 성경을 기록했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가장 기초가 되는 그것을 모르다 보니까 종교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그 구원은 우리 육체가 아니라 영의 구원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의 모든 종교와 이성과 나라의 법과는 다른 하늘의 법에 따르는 신비로운 일입니다.

 

우리 안에 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영을 시기하시기까지 사모하시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그렇습니다. 사람이 자기 아들을 낳고 나서 그 아들을 보고 싶어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부모가 되어 본 사람은 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아이를 가졌습니다.

아직 어머니 배 속에 있습니다. 그 아이가 자라는 순간이 얼마나 신비하기까지 합니까? 그리고 어머니 배 속에 있는 동안에 부모는 그 아이를 너무도 보고 싶어 합니다. 어떻게 생겼을까 그리고 어떤 아이가 태어날까 누구를 닮았을까 하면서 아이가 태어나기 까지 보고 싶어 하고 있고 또 태어나면 그 아이를 보기 위해서 아빠는 일찍 집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5절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이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그렇게 보고 싶어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영의 신비로운 일로 우리 안에 영을 탄생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영이 주님이 오시는 그 날에 부활의 신령한 몸을 입게 됩니다.

 

성경은 이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셔서 그냥 썩어져 사라지게 만들지 않고 그 썩는 인생에게서 하늘의 신비한 영을 탄생을 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영이 신령한 몸을 입는 그 날을 기다리시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영의 비밀을 모르고 마치 불교와 같이 자기 육체의 어느 것을 가지고 내세로 들어가려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육체와 영의 연결 고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육체는 반드시 썩는 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썩는 육체는 썩게 버려두고 썩지 않는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의 나를 통해서 태어나고 있는 하늘의 생명인 또 다른 나입니다,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주셔야 합니다. 이것이 영의 비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육체와 정과 욕심에 이끌려서 아니 그것을 끊지 못해서 이 영의 일을 믿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것으로 더 좋은 것으로 주시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 썩는 육체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육체는 반드시 썩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육체를 무시하라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 세상을 살아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육체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 육체가 있기 때문에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인 영이 우리 속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육체 안에 있는 새로운 생명이 있는 성도는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영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육체를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을 이 세상의 이성적 지식으로 보는 것은 육체를 생각하는 것이 됩니다. 그것이 아니라 영의 일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어떻게 우리에게 임하고 그렇게 해서 우리 속에 영의 생명이 어떻게 탄생이 되고 그것을 통해서 마지막 때에 어떻게 부활을 하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거의 다 육체에 빠져 있습니다. 자기 육체를 생각하느라 영의 일을 생각하지도 않고 있고 영의 생명이 무엇인가도 모르고 있습니다. 영의 일에 대해서 무지에 가까운 것이 이 시대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그저 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들을 볼 때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르기를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고 말합니다."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그것은 우리 육체를 통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영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고 있는 그 영이 부활을 해서 하늘의 생명을 얻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생명은 육체와 같이 썩는 것이 아니라 썩지 않고 영원히 사는 신령한 몸입니다.

 

저도 모릅니다.

그 신령한 몸이 어떤 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썩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히 맞습니다. 지금 이 세상의 이성으로는 썩지 않는 몸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이 영의 일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고 성도들에게 믿음을 주시고 있습니다. 그 믿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그것입니다.

 

로마서5:17절을 보겠습니다. (신 246쪽)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더욱 큰 은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는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가는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이 은혜를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그저 교회에 다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그것으로 자기들이 너무도 당연하게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에서가 이삭의 장자로서 축복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과 같이 교회 안에 있는 교인들이 그렇게 육적으로 교회 안에 있는 육체를 보고 있습니다.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이 넘치고 있습니다.

그것을 야고보는 더욱 큰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종교에 빠져 이 세상의 것을 받기 위해서 구하고 있고 그것을 받은 것으로 마치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들에게 임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거하는 영입니다. 이것을 사람의 이성으로는 정의를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보고 성령의 감동으로 믿어지는 역사만 있을 뿐입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이 영의 생명에 대해서 누가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있습니까? 이 은혜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해서 믿어지게 역사를 해야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은혜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들이 육적으로 받은 그것을 보면서 은혜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영의 일입니다 우리 속에 거하는 영입니다. 그 영은 사람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도 이 영의 일을 자기 육체와 자꾸 연결을 시키고자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의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이 탄생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도 아니고 혼도 아니고 영입니다. 이 영의 비밀을 모르면 사람들은 자기 육체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주의가 되고 또 성화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이 영에 대해서 알면 절대로 율법주의와 성화주의가 되지 않을 수 있는데 믿어지지가 않으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 영의 일에 대해서 바로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이것을 모르다 보니까 자기들이 부처를 믿고 있는지 예수를 믿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는 불교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 빼고는 전하고 있는 사상과 행동하는 모든 것이 불교와 같다고 보면 맞습니다. 다만 형식의 문제이지 종교적인 행위와 생각은 거의 같다고 보면 맞습니다.

 

한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영의 일은 오직 예수가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내 속에 영이 탄생이 되는 것을 원하시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영의 비밀을 알기 보다는 종교에 빠져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두 짐승입니다.

영의 일을 모르고 육체에 빠지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짐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방에 빛을 비춰 주셨지만 역시 이방의 교회도 짐승이 되고 말았습니다. 영의 일을 은혜로 받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짐승에게 절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은혜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내가 받는 은혜가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 왕 노릇하는 영의 일입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는 성도만이 하나님께서 더욱 큰 은혜를 주시고 있습니다. 그 은혜를 늘 사모하고 생명에 대해서 확증을 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은혜를 주십니다.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마 이 세상 이성으로 생각할 때 은혜를 바라는 자가 있다면 당연히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은혜를 받는 자가 교만하다면 어느 누구도 그 교만한 자에게 은혜를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초등학문입니다.

이렇게 문자적으로 세상의 이성으로 알고 있는 성경의 문자가 바로 초등학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만한 자가 누구고 겸손한 자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저 이 세상의 기준으로 교만한 자를 말하고 있고 겸손한 자를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초보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고 성경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시편10:2절을 보겠습니다. (구 809쪽)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 저희로 자기의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교만이 무엇입니까?

잘난 체하며 건방진 것을 교만하다고 말 합니다. 성경은 악한 자가 교만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잘난 체를 하고 건방지게 행동을 하는 사람이 교만하다고 말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악한 자가 교만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지식이 아닙니다.

교만하다고 하면 교회 안에서 겉으로 잘난 체를 하고 건방진 것을 보면서 교만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교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이성으로 볼 때 교만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교만한 자는 악한 자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악한 자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야고보서를 강해를 하면서 악한 자가 누구고 또 악한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악한 자는 첫째가 율법주의자입니다. 그리고 성화주의자이고 또 은사주의자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고 성화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 교만하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행위입니까?

정말 진실 되게 하나님의 백성과 같이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마치 성도가 된 것처럼 생각을 하고 자기 육체의 모양을 겸손하게 꾸미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또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면서 그 은사를 나타내고 있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 교만한 자가 얼마나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악의 한 모양입니다.

그것이 있다면 그는 교만한 자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육체가 성화가 되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면서 자기를 나타내고 있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다 교만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는 이런 교만한 자를 오히려 믿음이 좋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교만과 다릅니다.

세상은 교만한 자를 아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누구나 그가 교만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오히려 그가 겸손하게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만이 넘치고 있는 그가 정말 겸손하게 보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넘치는 악입니다.

야고보서1장에서 이 넘치는 악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넘치는 악을 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실제 사람의 눈과 이성으로 볼 때는 너무도 겸손하게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육체적으로 볼 때는 너무도 겸손하게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더 교회 안에서 교만해 지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교만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교만과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교만은 다릅니다. 자기 딴에는 아주 겸손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교만한 행위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더욱 더 교만해 지기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느라 교만해졌습니다. 하지만 자기들이 행하고 있는 그 악의 모양을 정말로 겸손하게 행했습니다. 이 시대 역시 겸손의 모양을 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도리어 악이 되고 있고 교만한 자의 모습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넘치는 악을 행하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얼마나 교만한 자인가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만한 자는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합니다.

슬플 정도로 가엽고 불쌍한 자를 군박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디에서 행해지고 있는가 하면 바로 교회 안에서 이런 일들이 있습니다. 교만한 자는 자기들의 행위를 보면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가련하고 불쌍한 자를 심히 군박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교만한 자입니다.

그들은 악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들이 악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고 그런 모양을 내고 있는 것이 오히려 겸손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율법을 잘 지키고 또 성도로서 살아가려고 하고 있는 모든 행위를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너무도 겸손하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말라기3:15절을 보겠습니다. (구 1330쪽)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니라"

 

누가 복됩니까?

율법을 잘 지키는 자가 복이 있어 보입니까? 율법을 못 지키는 가련하고 불쌍한 자가 복이 있어 보입니까? 당연히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교만한 자는 이렇게 자기가 교만하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합니다.

이 세상의 악이 아닙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세상의 일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있는 일들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교만한 자가 복을 받은 것 같이 보이기 마련입니다. 아니 누가 보아도 그들이 하나님을 아주 잘 믿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도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주의 교회들이 얼마나 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것처럼 보이고 있습니까? 이 시대 모든 교회가 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하나님을 잘 믿어서 복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상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바로 육체로 살아가고 있는 율법주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계속해서 강조를 하지만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그렇게 사람의 눈으로 보고 이성으로 알고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 영의 일을 모르다 보니까 교만한 자가 오히려 잘되고 있습니다. 아니 실제적으로 교회 안에서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 복을 받고 있습니다. 육체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보면서 자기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거대하고 웅장한 건물을 짓고 있습니까? 그것을 무엇으로 짓고 있습니까?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으로 짓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내서 짓고 있고 또 십일조를 계속해서 그 큰 교회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을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셨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교만한 자입니다.

실제 이렇게 교만한 자가 복을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복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가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하고 또 주여 주여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를 하고 찬송을 부르고 예배를 드리면서 감동을 받았다 해도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교만한 자를 하나님께서 물리치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만한 자입니다.

그들은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의 행위를 함으로 해서 받는 복을 보고 복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 육체적으로는 그들이 복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물리치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계속 말씀을 드립니다.

성경은 영의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가 받는 복을 보고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들은 교만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그렇게 육체로 살다가 결국에는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버림을 받게 됩니다.

 

교만해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교만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교만이 무엇인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악을 행하고 있고 또 그 악을 행하는 그것으로 자기들이 복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지은 성전을 보고 그것을 육체적으로 섬기면서 복을 받았다고 한 것과 같이 이 시대 교회라는 건물을 지어 놓고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8:1절을 보겠습니다. (신 272쪽)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우상의 제물입니다.

고린도전서8장의 말씀은 아카데미 강의에 이미 올려 있습니다. 그 말씀을 보면 자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우상에 제물에 대해서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만들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이 우상의 제물을 먹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무엇을 먹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이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복을 받기 위해서 기복을 바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또 교회라는 아세라를 섬기기 위해서 하고 있는 말들입니다. 이런 말들이 다 우상의 제물이라는 것을 이 시대 교인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서 자기들이 잘되는 것을 보고 교만해 지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못 지키는 사람에게 교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께 간구를 해서 아니 하나님을 잘 믿어서 복을 받았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교만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역시 교만해져 있습니다. 작은 교회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자기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고 하면서 또 마음이 교만해 지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그런 모든 행위들을 보면서 우상의 제물을 먹고 있으면서 그 지식으로 교만해 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교인들을 어떻게 교만하게 만들고 있는 가를 모르면 평생 교만하게 살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다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교회 안에서 듣고 있는 말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 우상의 제물입니다. 솔직히 우상의 제물을 먹이지 않고 있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지식이 그들을 교만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을 먹고 그것을 아는 지식으로 자기 행위를 하면서 교만해지고 있습니다.

 

지식이 교만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 밖에 있는 지식이 아니라 성경 안에 있는 지식이 사람들에게 우상의 제물이 되게 하고 있고 그것으로 교만해 지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이 어떻게 우상의 제물을 먹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고 그렇게 문자적으로 아는 지식으로 하여금 스스로 교만해 지고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이 나쁘게 보입니까?

절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아주 신실한 행위로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고 교만해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우상의 제물이 자기를 성도로 만들고 있고 그런 지식이 이 세상 사람들과 자기는 다르다고 하면서 교만하게 만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율법을 지키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기복을 바라는 말들입니다. 또 은사를 행하는 말들이고 또 교회를 섬기는 행위이고 성도로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말들입니다. 그런 우상의 제물을 먹고 그것이 지식으로 되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행위로 행하게 되어 있고 그렇게 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자기를 비교하면서 교만해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만입니다.

절대로 나쁘게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겸손하게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예배도 경건하게 드리고 있고 기도도 정말 진심으로 하고 있고 찬양도 은혜롭게 부르고 있고 헌금도 인색해 하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행위들이 다 교만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세상의 교만이 아닙니다.

그것 같으면 누구나 다 압니다. 이 세상에서 초등학문을 배운 사람은 누가 교만한가를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교만한 자는 자기도 모르고 있고 또 교만한 그것이 오히려 겸손하게 보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더욱 교만한 행위를 하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은혜를 주고자 하는데 교만한 자에게 주겠습니까? 하물며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 은혜를 바란다고 하는 자들이 오히려 교만한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이성의 생각으로 볼 때 겸손한 그 모양을 보고 자기가 사람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겸손합니까?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면 뭐 합니까? 우상의 제물을 먹고 있고 그것으로 악을 행하고 있다면 그는 아무리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자기를 나타내고 있다 해도 교만한 자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진심이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겸손하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교만하다고 하면 그는 교만한 자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고 있고 그 지식으로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으면서 아무리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낮아진다 해도 역시 교만한 자가 되고 만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진심이 아닙니다.

사람의 이성이 아닙니다. 그런 것으로 자기를 겸손하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초등학문입니다. 그런 초등학문을 가지고 영의 일을 알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다 그 초등학문에 빠져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우상의 제물을 마음껏 먹으면서 점점 더 교만해 지고 있지만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교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장 큰 교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야고보서는 이 율법을 버리는 행함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야고보서를 보면서 오히려 더욱 율법주의에 빠지고 있는 것이 사람이 알고 있는 성경적 지식입니다.

 

교만한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상의 제물을 마음껏 먹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교만한 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말하는 지식 그리고 신앙서적이라고 나와 있는 거의 모든 책들이 이 우상의 제물이 되고 있지만 그것을 모르고 더욱 더 교만해 지고 있습니다.

 

물리치시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 이렇게 교만한 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실 거의 모든 사람이 겸손의 모양은 내고 있지만 실제 그들의 행위는 교만하기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육체로 폐하신 율법을 지키고 있고 그것을 지키는 자기를 성도라고 하면서 자랑하는 그것이 가장 교만한 사람입니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겸손의 모양이 아닙니다. 그런 모양과 지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겸손의 모양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겸손의 모양을 보고 마치 그가 신실한 성도나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2:18절을 보겠습니다. (신 326쪽)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을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일부러 겸손함을 내 보이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을 지키는 것이고 또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를 보이는 성도의 삶입니다. 그런 이 세상의 겸손을 골로새서에서 일부러 겸손함을 보이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것으로 인하여 너의 상을 빼앗기지 않게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못 받습니다.

교회 안에서 이렇게 자기 육체를 통해서 일부러 겸손함을 보이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일부러 겸손하다고 하니까 겸손한 척을 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것도 포함이 되지만 율법을 지키는 것 또 성화가 되려고 하는 것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 이 모든 것이 다 일부러 겸손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누군가 일부러 겸손한 모양을 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그 사람을 보면서 다 가식적이라고 속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것을 모를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가식을 보면서도 겸손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니까 일부러 겸손하고 있습니다.

늘 낮은 자세를 취하고 교만하다는 말을 안 들으려고 일부러 겸손한 모양을 내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하나님을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행동을 함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너무 거꾸로 보고 있습니다.

 

교만한 것입니다.

정말 교회 안에서 이런 일부러 겸손함을 보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특히 교인들이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목사들은 아주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목사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다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성도의 교제가 인간적인 교제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 종교에서나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성도가 목사가 자기들이 생각하는 것에 조금이라고 틀리는 보양을 보면 겸손하지 못하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복음을 가진 자에게 함부로 말을 해도 그것을 참아야 하는 것이 겸손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겸손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자란 것입니다 왜 참아야 합니까? 복음을 가지고 있는데 왜 복음에 반하는 것을 이야기를 하고 그것을 요구하는데 참아야 합니까?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가 복음의 일군임을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당해야 합니다.

복음을 가진 자는 정말 당당해야 합니다. 그 당당함이 무너지는 순간 복음도 함께 무너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느 선지자가 어느 사도가 사람들에게 겸손하게 말을 했습니까? 그리고 그들의 눈치를 보면서 그들이 무슨 말을 해도 겸손하게 대했습니까? 절대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볼 때는 교만한 자같이 대했습니다.

 

일부러 겸손한 척을 하는 것 역시 복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가 복음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데도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일부러 겸손해 해야 한다면 이미 그 자체로 진리는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가진 자는 이 세상에 대해서 담대할 수 있습니다. 그 담대함이 때로 교만하게 보일 수 있지만 복음을 가진 자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인간적이라면 얼마든지 겸손하게 대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대해서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 합니다. 차라리 복음을 안 전하고 말지 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전하는데 일부러 겸손한 모양까지 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인간적으로 해 달라고 하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대해서는 그들이 교만하다고 할 정도로 담대하게 전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적으로 겸손 하라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 겸손은 일부러 겸손의 모양을 내는 것이고 그런 사람은 상을 받지 못한다고 분병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그리고 선지자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얼마나 담대하게 전했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당시 복음을 듣던 사람들은 그들이 교만하다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사야57:15절을 보겠습니다. (구 1038쪽)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일부러 겸손하지 마시고 마음에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마음에 겸손한 자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고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겸손한 자에게 하늘의 새로운 생명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마음이 겸손하기 보다는 일부러 겸손함을 보이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마음이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일부러 겸손한 모양을 내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셔서 구원해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겸손할 수 있습니까? 자기를 아는 자만이 겸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에 문자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교회 안에 없습니다. 하지만 마음으로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왜 믿지를 못하는가 하면 그는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왜 교만한가를 모르고 그저 겸손의 모양을 내고 있습니다.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겸손과 교만이 어떻게 함께 합니까? 반드시 교만한 자는 교만하고 겸손한 자는 겸손합니다. 교만한 자는 악을 행하게 되어 있고 마음이 겸손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기 때문에 악을 행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영의 비밀입니다. 육체는 때로 교만하게 보일 수도 있고 겸손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의 일은 겸손한 자는 겸손하고 교만한 자는 교만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겸손의 모양을 내면서 악을 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는 겸손의 모양을 내고 있는 교만한 자가 있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이 겸손한 성도가 있습니다. 이 둘을 함께 할 수 없고 반드시 교만하거나 겸손하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겸손한 자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만한 자는 율법을 지키고 있고 우상의 제물을 먹고 있습니다. 자기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깨닫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셔서 구원해 주시고 있습니다.

 

야고보서4:7절을 보겠습니다. (신 374쪽)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고, 악마를 물리치십시오. 그리하면 악마는 달아날 것입니다."

 

하나님께 복종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복종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율법을 지키는 악을 행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마치 복종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인 줄을 알고 행하시기 바랍니다.

 

순복

순순히 복종하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서 마치 자기 행위를 잘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순복하라고 하면 거의 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를 모르면 결국 악만 행하다가 멸망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바로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10:3-5절을 보겠습니다. (신 296쪽)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육체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 하면 육체에 있어 육체로 복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대로 싸우지 않고 있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싸웁니까?

자기 육체의 겸손의 모양을 내려고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도의 모양을 내려고 싸우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육체로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믿음이라는 이상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싸우는 것은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무엇에 복종을 해야 하는 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복종하라고 하면 자기 육체를 가지고 싸우는 사람들이 거의 다입니다. 복종하는 것이 육체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로 싸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복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육체로 나타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싸우는 것은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모든 이론을 파하고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순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복하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이론을 파해야 합니다. 모든 이론은 이 세상의 모든 초등학문을 파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 초등학문을 파하지 않고 성경을 보는 사람은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이론을 파하고 하나님 아는 것에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이론을 파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의로운 일입니다. 그리고 성도로서 성화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이 세상의 이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것을 세상의 이론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복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인정을 하는 것은 세상의 이론입니다. 세상 이론이라고 하니까 이 세상에서 배운 것을 말씀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보는데 세상 이론으로 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내가 성경을 보고 이야기를 하는데 세상 사람들이 듣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세상 이론입니다.

 

바로 율법입니다.

그리고 성도로서 의롭게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성화입니다. 이것을 모든 세상이 주장하고 있고 또 종교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 이론이라고 하니까 논어와 공자를 이야기 하고 또 불경을 아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누가 보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이 세상의 모든 이론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이론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 있지만 육체대로 행하고자 하는 모든 이론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대로 행하려고 하는 모든 이론을 파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파하는 성도만이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떤 이론이 있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의 이론이 있었고 사두개인들의 이론이 있었습니다. 역시 사도들이 복음을 전했을 때도 율법주의가 있었고 성화주의가 있었고 은사주의가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교회 안에서 육체대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파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밖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이 시대 참으로 답답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4중 복음이니 5중 복음이니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다 이론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다 율법주의고 기복주의고 성화주의고 은사주의입니다. 그런 육체대로 행하는 것을 다 파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을 해야 합니다,

 

너무 많습니다.

이 시대는 자기들의 육체로 행하는 이론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이론에 의해서 육체대로 행하는 자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이 모든 이론을 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그렇게 이론이 많습니까?

심지어는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한다는 이론까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교회 안에서 있는 이론입니다. 그런 이론을 파하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려서 내 육체로 행하고 있는 것을 가르치는 모든 이론을 파하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그것을 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이론을 따르느라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육체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육체로 하려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런 이론을 파하라고 하면 오히려 이단이라고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어서 모든 이론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런 이론을 파하라고 하면 이단이라고 공격을 합니다. 이 시대는 이론에 너무 빠져 있습니다.

 

육체로 행하는 이론에 너무 빠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을 하지 않으니까 그런 이론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이 성경을 누가 보고 있는 가 그리고 누구에게 기록했는가를 아시기 바랍니다. 이 성경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른 이론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사도 바울이 서신을 보냈습니다.

 

복종할 수 없습니다,

아니 그런 이론에 빠져 있으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보종하지 않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이론을 파하지 않고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다 거짓에 불과합니다. 그런 이론을 파해야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무엇도 이론이 됩니까?

잘못된 교리도 이론이 됩니다. 행위를 강조하는 모든 교리가 다 이론이 됩니다, 성경을 보고 이렇게 이론에 빠지면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치 않게 됩니다. 아니 이미 그 행위 자체가 복종치 않겠다고 하는 행위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론은 성경을 보고 사람의 이성으로 그것을 논리적으로 사람이 이해를 할 수 있는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그것을 신학자들이 이론 적으로 정립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리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데 만든 그것이 이 세상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것이 이론이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비밀을 모르는 사람이 이론에 빠져 육체로 싸우는 그것이 이론입니다.

 

디도서1:10절을 보겠습니다. (신 348쪽)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복음에 복종치 않고 있습니다.

누가 복음에 복종치 아니하는가 하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복종치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복음에 복종치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어떻게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육체로 행하면서 복종치 않고 있습니다.

육체로 싸우면서 복음에 복종치 않고 있습니다. 자기 육체를 의롭게 하려고 하고 있고 또 성화가 되게 하려고 하고 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면서 은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다 육체로 싸우고 있는 것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복종치 않고 헛된 말을 하고 있고 속이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디도서3:9절을 보겠습니다. (신 350쪽)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헛된 말이 무엇입니까?

어리석은 변론입니다, 이것이 모든 이론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이런 이론들이 헛된 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 이런 어리석은 변론을 하고 있는가 하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어리석은 변론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변론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모든 이론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모든 이론들입니다. 그것이 어디서 나오고 있는가 하면 성경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을 하면서 어리석은 변론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변론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다 헛된 것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서점에 가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많은 신앙서적이 있습니까? 그 중에 어리석은 변론이 아닌 책은 아마도 만권에 한권 있을까말까 합니다. 성경을 보고 그렇게 많은 어리석은 변론을 이야기 하면서 책을 내고 있습니다. 진짜 복음이 있는 책을 내면 얼마나 좋습니까? 하지만 거의 모든 책들이 다 어리석은 변론을 하고 있는 자기들의 이성적인 이론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신앙서적을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성경을 보면서 정말 간절히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왜 돈을 버리고 또 시간을 버리면서 그런 어리석은 변론을 하고 있는 책을 봅니까? 솔직히 이 시대 신앙서적이라고 나와 있는 책 중에 볼 만한 것이 없습니다.

 

제가 교만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있는 성도라면 그런 책을 거저 준다고 해도 안 봅니다. 그 책을 볼 시간이 있으면 성경을 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유명한 신학자나 목사가 썼다면 맹목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더구나 자기 교회의 목사가 썼다면 어떻게 하든지 사서보고 있습니다. 그런 어리석은 변론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치 않게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족보이야기입니다.

이 시대 족보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등을 이야기 하고 있고 또 어느 신학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다닌 신학교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가 어느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박사가 있습니까?

성경을 아는데 있어 박사가 있습니까? 박사라고 하는 그 자체는 스스로 이 세상 초등학문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아는데 무슨 박사 입니까? 성령이 오시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성경에 대해서 알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박사가 되어서 성경을 알 정도면 절대로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지 않았습니다.

 

무슨 박사입니까?

저는 그 박사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없는 박사를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이미 종교화 되어 있고 이 세상 초등학문으로 신학을 공부했다고 스스로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박사를 자랑하기 위해서 가운을 입고 그 가운에 세 줄을 그어 놓고 있습니다.

 

참으로 한심합니다.

성경에서 누가 박사가 될 정도로 스스로 공부를 해서 복음을 알았는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성경을 전혀 보지 말라고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도는 정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늘 성경을 보고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과 같이 신학을 공부를 해서 박사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솔직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박사였습니까?

솔로몬 왕이 박사였습니까? 예레미야가 박사였습니까? 성경의 선지자 중에 누가 박사였습니까? 그런 족보가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모르고 박사가 되었다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 시대는 박사가 아니고는 교회에서 명함도 못 내밀고 있습니다. 박사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성도로 살다가 구원을 받겠습니다.

 

율법의 다툼입니다.

어떻게 다투고 있습니까? 율법을 한 가지라고 지키는 순간에 다툼이 일어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율법은 다툼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가지고 얼마나 다투고 있습니까? 주일을 가지고 얼마나 다투고 있습니까?

 

율법은 단 한 가지라도 다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얼마나 많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은 그것을 믿음으로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했던 율법으로 했든 자기 육체로 싸우고 있는 모든 행위는 다 율법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기 바랍니다. 내가 아니라고 해도 성경에서 율법이라고 하면 그것은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으로 다툽니까?

헛된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헛된 말을 하는 자는 복음에 복종치 않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아무리 교회 안에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다 해도 헛된 말을 하고 있고 헛된 행위를 하고 있다면 그의 믿음이라는 것은 다 거짓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 이런 말을 합니까?

복음에 복종치 않기 때문에 하고 있습니다. 복음에 복종을 하면 절대로 이런 헛된 말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복종치 않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헛된 말을 하고 있고 헛된 행위를 하면서도 자기가 어떻게 악을 행하고 있는 줄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잠언21:6절을 보겠습니다. (구 934쪽)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 다니는 안개니라"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고 있습니다.

이 시대 얼마나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속이는 말로 제물을 모으면서 복음에 복종치 않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렇게 하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복음에 복종치 않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 재물로 부자가 되어서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해 입고서 구원을 받은 성도라고 스스로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시대는 복음을 전혀 모르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아니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복음에 복종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복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이렇게 속이는 말로 재물을 구하는 자는 하나님께 순복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어도 그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마치 세상 사람들이 속이면서 재물을 모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재물은 그 재물이 아니라 사람이 교회 안에서 행한 모든 율법과 선하고 의로운 일들입니다.

 

그것이 다 속이는 말입니다.

우리의 재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소유이며 재물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는 성도는 누가 속이는 말을 한다 해도 거기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사람이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는 다 속이는 재물입니다. 그 재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복음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려 다니는 안개입니다. 안개는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고 맙니다. 이 재물을 가지게 하는 모든 말은 속이는 말입니다. 교회 안에 이런 말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의 의를 가지게 하는 모든 말이 다 속이는 말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그런 말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죽음을 면하는 길입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죽음을 구하고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 나온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이 잠언의 말씀과 같이 속이는 말로 재물을 구하다가 죽음에 이르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복음에 복종치 않고 있으면서도 교회 안에서 겸손의 모양을 내면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그것으로 자기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의 진심을 부정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교회에 나온 사람이 누가 거짓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겠습니까? 더구나 시간을 내고 또 돈을 내고 자기 육체로 헌신을 하는데 거짓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그것은 사람의 이성이고 성경에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를 깨닫지 못하면 스스로 죽음을 구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기 스스로 속아 죽음을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너무도 좋은 그것이 사망에 이르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사람의 이성을 따라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복음에 복종치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헛된 말이고 속이는 말입니다. 그 말들이 사람의 이성으로는 너무도 좋기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구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몰라서 이렇게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몰라서 하는 모든 행위가 다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디도서1:16절을 보겠습니다. (신 358쪽)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이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정말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고 자기가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라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을 합니다.

그런데 행위로는 부인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고 있지만 그에게 행함이 있는 믿음이 없어서 행위로는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행위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을 가증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가증합니까?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이 가증한 자입니다. 교회 안에서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겸손의 모양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그런데 행위로는 부인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행위로 부인을 하고 있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육체로 폐하신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차라리 믿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왜 믿는다고 합니까? 누가 더 악한 자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은 차라리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인입니다. 그러나 믿는다고 하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행위로는 부인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사도 바울이 가증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가증합니까?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얼마나 괘씸하겠습니까? 차라리 믿지를 말지 왜 믿는다고 하면서 행위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육체로 폐하신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렇게 가증한 행위를 하면서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교인들입니다.

 

보면 압니다.

그 사람이 교회에서 하는 행동 하나만 보아도 압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 들어가 보기만 해도 압니다. 그들이 가증한 자고 또 복음에 복종치 않는 자인가를 아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말씀을 드린 것 중에 어느 한 가지라도 있다면 복음에 복종치 않은 자입니다 하나님을 순복하지 않는 악한 자라는 말씀입니다.

 

마귀를 대적하시기 바랍니다.

마귀를 대적하라고 하니까 아직까지 초등학문에 사로 잡혀서 죄를 안 지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죄를 짓게 하고 있습니까? 물론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끝이 났습니다. 더 이상 죄로는 우리를 죽일 수 없습니다.

 

베드로전서5:8-9절을 보겠습니다. (신 382쪽)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어리석습니다.

아직까지도 죄와 싸우느라 진짜 마귀와 어떻게 대적을 해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마귀를 대적하라고 말씀을 하니까 자기들이 육체적으로 짓는 죄를 안 지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귀와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육체와 스스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불교의 스님들이 해탈의 경지에 오르려고 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마귀는 지금도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함으로 해서 죽음에 이르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에 복종치 않게 해서 삼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대적해야 합니까?

믿음을 굳게 해서 대적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육체로는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아니 싸움이 안 됩니다. 마귀는 사자고 사람은 양입니다. 게임이 안 됩니다. 육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영인 마귀가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육체로 대적을 해서 싸워서 이기려 하고 있습니다.

 

너무 어리석습니다.

그런 육체의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가 마귀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굳게 해서 마귀를 대적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귀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 방법이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마귀가 너희를 피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로는 게임이 안 됩니다. 그러나 믿음을 굳게 해서 싸우면 마귀가 우리를 피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굳게 해서 싸우라고 하니까 또 이상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영의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긴 그것을 믿는 믿음으로 싸우라는 말씀입니다 쉽게 말씀을 드려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왕입니다. 이 세상의 왕인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이 말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했습니다. 싸움에서 우리나라 왕이 졌습니다.

 

그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했습니다. 일본 사람의 말이라면 우리나라에서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 해도 꼼짝을 못하고 피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전쟁에서 진 국민과 전쟁에서 이긴 국민의 차이입니다. 우리나라 왕이라 해도 명성왕후가 시해를 당하는 참변을 당하고도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일본의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나라의 왕이 말도 못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단과의 싸움에서 이기셨습니다. 그 이김을 믿는 성도는 믿음을 굳게 해서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가 피한다는 말씀입니다.

 

마귀를 대적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육체로 대적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영의 싸움에서 대적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계속해서 무엇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정욕이 무엇인가 그리고 교만한 자가 누구인가 겸손한 자가 누구인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성경을 통해서 먼저 알고 있어야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 것이지 모르면 대적할 수 없습니다. 마귀가 무엇을 가지고 우리를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키려고 찾아다니고 있는 가를 알아야 마귀를 대적할 수 있고 믿음에 굳게 서서 대적을 하면 마귀가 피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4:8절을 보겠습니다. (신 4쪽)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마귀가 무엇으로 미혹을 하고 있습니까?

죄로 미혹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욕으로 미혹을 하고 있고 욕심으로 미혹을 하고 있고 교만한 것으로 미혹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다 복음에 복종치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모든 것들로 하여금 마귀가 우리를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에 굳게 서서 대적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이 세상 천하만국의 영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율법의 의고 은사고 또 교회 안에 교인들의 성화고 또 육체로 행하고 있는 거의 모든 행위들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정욕이고 욕심이고 교만한데서 나오는 것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마귀가 이런 것을 가지고 우리를 대적하고 있습니다. 이때 믿음에 굳게 서서 대적을 하면 마귀가 너희를 피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불행하게도 스스로 마귀의 밥이 되고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니까 정욕이 무엇이고 욕심이 무엇이고 교만이 무엇인가를 모르다 보니까 그것에 빠져 마귀가 삼키기도 전에 자기들 스스로 마귀의 입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천하만국의 영광입니다.

내 눈으로 보는 모든 영광입니다. 그것이 교회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고 찬송이고 기도고 또 헌금이고 교회라는 건물이고 그 안에서 하는 모든 행위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미혹을 하고 있는데 대적을 하기 보다는 스스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아니 마귀에게 자기를 죽여 달라고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마귀를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귀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대적을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이 시대 교인들은 마귀가 가지고 있는 천하만국의 영광을 달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으면 자랑을 하고 있고 그것으로 재물을 삼아 부자가 되어 고운 베옷과 자색 옷을 해 입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마귀가 주는 것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지피지기라 했습니다.

세상 싸움도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이길 수 있습니다. 하물며 영의 싸움을 하는데 마귀를 모르고 어떻게 싸울 수 있고 어떻게 대적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마귀를 너무 모르고 있고 마귀가 무엇으로 자기를 대적하고 있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다 보니까 마귀가 아주 쉽게 죽이고 있습니다.

 

복음에 복종하시기 바랍니다.

순복하려면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이성적 지식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늘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무엇을 주는 가를 바로 알고 마귀가 나에게 그것을 주려고 할 때 대적하는 성도는 마귀가 물러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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