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1,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요한복음19:37절을 보겠습니다. (신 183쪽)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 십자가에 대해서 그 영적인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그저 역사적 사실을 아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믿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입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하나님이심에 대해서 너무도 많은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 피조물의 형상을 입고 오시는 것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아들이라고 말씀을 하니까 사람들이 그 아들이라고 말씀을 하는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고 그래서 종교는 아들을 성자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 명이 십자가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아직 죽지 않아서 그 다리를 꺾어 죽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주님은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스스로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피조물이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육체를 입고 오셨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을 죽일 수 있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고 난 후에 목마르다 하시고 이제 구속의 일을 다 이룬 줄을 아시고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그 영혼이 돌아가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죽었습니다.
로마의 병사들은 주님께서 죽은 것을 알고도 성경을 응하게 하려고 다리를 꺾지 않고 그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옆구리를 찌르자 피와 물이 나오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십자가에서 우리 피조물의 형상을 입고 오신 육체를 다 버림을 받으시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입니다
육체는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피조물과 같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이제 장사 지내고 나서 그 육체에 대해서는 성경에 그 어떤 말씀도 없는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인들은 육체로 부활을 하셨다고 하는데 다 버림을 받은 그 육체로 다시 부활을 하셔서 무엇 하시겠습니까?
육체는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무엇이 남아 있는가 하면 우리를 위해서 땅에 피와 물을 흘려주셨습니다. 그 물이 무엇인가를 아모스 선지자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태초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부터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 자체가 말씀이고 그 말씀을 우리가 성경에서 보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일서 등을 기록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요한일서의 말씀을 보았듯이 이 물과 피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피로 임하셨습니다.
그 피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제자들과 유월절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 마지막 식사를 하시면서 떡을 떼어 주시고 그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살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또 잔을 가져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 잔은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언약의 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언약의 피 입니다
그 피를 흘려주심으로 해서 우리 죄가 그쳤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음으로 해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생명을 얻은 자 되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바로 우리에게 의로운 생명을 얻게 하시는 언약의 피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입니다
죄가 그친 자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생명을 얻음으로 해서 그 생명이 깨끗한 생명이므로 죄가 없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명을 얻은 우리 성도는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남은 때입니다
성경은 우리 피조물의 육체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이 세상에 피조물의 육체를 입고 오셨습니다. 그 육체는 분명히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입니다. 그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의 남은 때를 산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시편의 말씀을 통해서 이미 충분히 깨닫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버리심을 받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교리가 신체의 부활을 주장을 하고 있어서 시편의 말씀을 보고도 그 말씀이 주님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을 도무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피조물의 형상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버리시는 것을 이미 구약에 예언이 되어 있는 그대로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우리에게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얻은 자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산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옆구리입니다
로마의 병사가 창으로 찔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을 했듯이 교회가 탄생이 되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 교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리고 언약에 대해서 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아담의 갈빗대를 취해서 하와가 탄생이 되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이렇게 주님의 옆구리를 통해서 교회가 탄생이 되는 일입니다.
이를 본 자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이 말씀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도 요한이라고 말을 하는 사람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을 지칭해서 가르쳐 말을 하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지 않으면 그가 아무리 지혜가 있다고 해도 성경을 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령입니다
의인화를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 지내고 삼일 만에 영으로 부활을 하시고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보이시다가 하늘에 올라가시고 오순절이 임하매 120여 문도에게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입니다
성령이 오시고 난 후에 성령의 증거를 받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성령을 의인화해서 말씀을 하고 있고 사도 요한도 성령을 의인화해서 말씀을 하고 후에 성령을 받고 이 성경을 기록할 때 자기가 증거를 받은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을 했지만 성령에 대해서 기초가 세워져 있지 않는 인생들이 자기 철학으로 성경을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인용을 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방의 종교는 인용을 하는 것을 반대를 하고 있고 그들은 유대인들과 같이 문자 그대로 성경을 보면서 억지로 성경을 풀다가 사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또 성경에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사람을 쳐다볼 것이다' 한 말씀도 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성경을 기록한 것은 우리로 믿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라는 것이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이 되는데 사람들은 성경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데 자기들이 모르면 지혜를 구하고 성령을 구해야 하는데 전혀 구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인생들입니다
자기들이 피조물이라는 것을 인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더욱 더 그렇습니다. 자기가 무엇이라는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성경에 문자로 기록이 되어 있는 말씀들을 보면서 자기가 꽤나 지혜가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더욱 더 겸손해야 하고 더 낮아져야 하는데 이 시대를 보면 불교인들보다 더 교만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겸손의 모양이라도 갖추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해 보면 세상에서 자기들이 가장 지혜 있는 자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인생입니다
시편에서는 우리 인생에 대해서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성경이 그렇게 말씀을 하는데도 이상하게도 종교 안에만 들어가면 사람들은 이성을 상실하고 대단한 존재나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받으면 그렇지 않을 수 있는데 사람들이 성경의 문자를 보고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나 된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피조물과 예수 안에 있는 생명에 대해서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스가랴12:10절을 보겠습니다. (구 1324쪽)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우리 피조물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그저 막연하게 남들이 믿으니까 아니 거대한 종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니까 믿는다고 하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이 자기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믿었으니까 자기들이 믿는다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면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문자를 압니까? 히브리어의 뜻을 알고 헬라어의 뜻을 알고 있습니까? 그런 것을 가지고 진리를 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를 하고 있고 우리는 모세의 율법에서 그리고 선지자의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를 받아서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입니다
그래서 그 시작을 할 때 빌립과 나다나엘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영의 일을 다 안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모세의 율법에서 그리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받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증거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었고 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종교인들입니다
성경의 인용을 찾은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초등학생이라고 해도 성경을 많이 읽으면 누구나 이 말씀을 인용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말씀만 성경에 인용을 해서 각주를 달아 놓았습니다. 그 종교인들이 인용을 해서 각주를 달아 놓은 말씀 중에서 요한복음에서는 인용이 되는 말씀이 이 말씀으로 끝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들이 인용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상을 인용을 하면 잘못 되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이렇게 성경을 인생들의 철학의 생각 안에 가두어 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 이상을 말씀을 하면 무조건 잘못 되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인생들입니다
그들이 성경을 인용을 하고 각주를 달아 놓고 장절을 나누어 놓고 한 것이 옳다면 저 역시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을 한 마디로 해서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종교에서 그렇게 배우니까 어느 누구도 감히 더 이상을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36절 37절입니다.
굳이 인용을 하지 않아도 누구라도 쉽게 성경에서 그 인용을 찾을 수 있는 말씀이라고 저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종교인이 돼서 성경을 가르치는 자로 살아가려면 그 정도는 성경을 보아야 하고 그렇다면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인들입니다
그들이 왜 성경에 인용 구절을 각주로 달아 놓았습니까? 알기 위해서 달아 논 것이 아닙니까? 아니 신학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아는 것을 각주로 달아 논 것 아닙니까? 다 무엇입니까? 성경을 알기 위해서 달아 논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주님께서 내게 대해서 증거를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당입니까?
그 무당이 자기가 섬기는 신을 모셔서 이야기를 하면 그것을 믿는다고 하는 것과 이 시대 교인들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물론 성경을 보고 있다는 것을 제가 전혀 무시를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럴지라도 그들이 성경을 보고 문자를 아는 것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용을 못 합니다.
아니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서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알아야 믿는 것이지 그냥 믿는다고 하는 것은 무당이 말을 하면 그 말을 듣고 믿는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시대 종교인이 다 압니까?
그들이 무엇을 압니까? 우리가 요한복음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하는 니고데모가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주님께서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을 하니까 너무 놀라서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제 그 니고데모는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주님의 육체를 장사 하는데 쓸 물건을 가지고 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자기들의 종교의 힘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받아 죽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들이 철학적 지식으로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고 아는 것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성경에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인용입니다
계속해서 이 문제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성경에서 할 수 있다면 많은 말씀들을 인용을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는 생명과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인용을 많이 해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알아야 합니다.
알려면 인용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인용을 해서 알아야 사도 베드로의 말씀과 같이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냥 문자만 보고 그 문장에서 단어를 아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다는 사람은 다 거짓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충분히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성경입니다
그 성경에 인용이 되어 있는 말씀들입니다. 사실 그런 정도는 서로 문자를 맞춘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것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받을 수 있습니까? 영생을 얻었다고 누가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인용을 하지 않고 있고 그런 그들이 문자는 아는 것으로 저를 아는 지식에 자라가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압니까?
34절에서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물과 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교회가 탄생이 되는 일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을 했지만 요한일서의 말씀에서 사도 요한이 다시 하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사실 36,37절의 말씀의 인용보다는 그 말씀의 인용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인용이 되어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자라갈 수 있습니다.
35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용을 해야 하는 성경은 인용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이 그런 말씀을 보고 인용을 하면 안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을 보고 그 문자를 아는 것으로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저는 사실 불가능하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령을 보내주시면 그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있고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자라갈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을 보고 사람의 철학으로 성경을 상고할 수 있습니까? 상고조차 할 수 없게 성경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종교가 성경을 편집을 하고 각주를 달아 놓고 제목을 붙임으로 해서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고린도후서에서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까? 그들이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가 나고 있습니까?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입니다
현대인의 성경을 보았습니다. 내가 다윗의 후손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혜와 기도의 영을 부어 주겠다. 그들은 자기들이 찔러 죽인 자를 바라보고 외아들을 위해 슬퍼하듯이 슬퍼할 것이며 맏아들을 잃은 사람처럼 통곡할 것이라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대표성으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그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로마의 군병이 주님께서 죽으셨다는 것을 확인을 하기 위해서 주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다고 사도들이 기록한 성경의 문자를 아는 것으로 그 역사적 사실을 아는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가랴 선지자입니다
그 사람은 대표성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면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창으로 찔렀는가를 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찔러 죽인 자를 바라보고 외아들을 위해 슬퍼하듯이 슬퍼할 것이며 맏아들을 잃은 사람처럼 통곡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입니다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수형으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의 문자와 역사적 사실을 보면 로마의 한 군병이 찔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도 그리고 스가랴 선지자도 역시 복수형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입니다
사도 요한 역시 환상을 보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역시 복수형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34절입니다.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사도 요한은 한 군병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스가랴 선지자도 그리고 사도 요한이 환상으로 본 요한계시록의 말씀도 그들이라고 복수형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성경은 창조하신 일의 영광을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실제 있었던 사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역사적 사실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있던 주님과 하나님이 가지셨던 영화를 깨닫기 위해서 성경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입니다
새번역에서는 은혜를 구하는 영'과 '용서를 비는 영'을 부어 주겠다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면 예수 그리스도를 찌른 자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 일을 깨닫게 됨으로 해서 외아들을 위해 슬퍼하듯이 슬퍼할 것이며 맏아들을 잃은 사람처럼 통곡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문자 그대로 그리고 역사적 사실로만 보니까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말씀으로 그러니까 유대교인들에 의해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또 로마의 한 군병이 주님의 옆구리를 찌른 것으로만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찔러 죽인 자를 바라보고 외아들을 위해 슬퍼하듯이 슬퍼할 것이며 맏아들을 잃은 사람처럼 통곡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렇게 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구하는 영을 보내주시는 성도들이 이렇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복수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피조물의 형상을 입고 오신 육체의 생명을 버리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들은 이 십자가를 보고 주님께서 그렇게 버리신 육체를 찌른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들은 종교가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실제 누가 이 시대 교회가 어떻게 탄생이 되는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언약의 피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아니 그런 교회가 어디 있는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인생들이 종교가 되어 유대교인들과 같이 그리고 로마의 군병과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물과 피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는 일입니다. 그 일을 모르고 종교 안에서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주님을 찌른 자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복수형으로 말씀을 하고 있고 그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인생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9:38절을 보겠습니다. (신 183쪽)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 뒤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거두게 하여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의 제자인데, 유대 사람이 무서워서,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니, 그는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렸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가 믿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창조하실 때부터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친히 오셔서 우리 피조물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그대로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주님의 육체입니다
저주를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피조물들이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나무에 달려 신명기의 율법대로 저주를 받은 자가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육체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리심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들입니다
이 세상에 피조물의 형상을 입고 오셨습니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동등됨으로 취하시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과 같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육체는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종의 형체를 가지신 것은 이제 버림을 받고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에서 끊어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해서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러나 누가 이 말씀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도 누가 우리의 전하는 바를 믿겠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믿어진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가난한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해서 우리가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고 믿음으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성경에서 보면 뭐 합니까?
알아야 믿을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믿을 수 있는데 그저 종교 안에서 남들이 다수가 믿는다고 하니까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들로도 믿지 않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양들로 생명을 얻게 하신 그 생명에 대해서도 믿지도 않고 있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도 자기들 마음대로 상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입니다
이 말씀이 믿음으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믿고 싶어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서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창세전에 있는 일이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일입니다.
가능합니까?
아무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말씀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길 자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고 그가 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생명을 얻을 줄 믿고 있기에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한 영혼입니다.
천하보다 더 귀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정말 이 말씀이 실감이 나고 있습니다. 한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편지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지만 여기를 왔다가 다시 종교로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리고 예정하심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겨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랍게도 이 시대 누가 복음을 전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자라가게 하고 있습니다.
다 이루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피조물의 형체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얻게 하는 모든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을 이루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 이룬 것을 사도 요한을 통해서 환상으로 보여 주시고 있고 우리가 이 시대 믿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입니까?
저는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선지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도 한 사람이 없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우리 성도들이 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바다 모래 같은 많은 자중에서 남은 자만 구원을 받는다는 그 말씀과 같이 우리 남은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그대로 십자가에서 우리 피조물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지만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에 대해서 그 영적인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이 지극히 적은 것 같습니다.
성경입니다
영의 일입니다. 우리 육체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육체는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을 성경은 말씀을 하고 있고 영의 생명인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얻는 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을 이렇게 자세하게 말씀을 해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바다 모래 같이 많은 다수를 따라 종교에 빠겨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받기 보다는 종교의 교리에 따라 자기들이 하는 행위를 보고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알겠지만 이 사람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 지내는 이 사건에만 기록이 되어 있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나와 있지는 않지만 산헤드린 공회원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공회의원입니다
그렇다 보니까 당시 육체적으로도 부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실 때 말씀을 들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아도 사도 요한은 그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자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도 거의 풍습은 다 같은 것으로 생각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정말 옛날부터 부자는 자기가 죽을 묘를 미리 준비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역시 돈이 있는 사람들은 묘 자리를 준비를 해 두고 있고 또 조상 대대로 선산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죽은 후에 그곳에 묻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묘입니다
그리고 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부자라서 미리 자기 묘를 준비를 해 두었고 사용을 하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리마대라는 지명에 대해서는 그리고 이 사람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성경이나 전승을 통해서 알 수는 없으나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 자기 묘를 내어 주고 주님을 장사하게 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요셉입니다
사도 요한은 분명히 그를 주님의 제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이제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시고 오순절이 임할 때 성령을 보내주시고 그때 이 사람도 성령을 받아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제자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을 제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그가 하나님 나라와 그리고 예수의 생명을 얻는 일에 대해서 믿는 성도들을 제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그저 제자라는 단어를 보고 아는 것으로 제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next 28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