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1,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 한지라
요한복음12:17절을 보겠습니다. (신 168쪽)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이 세상에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 양들에게 생명을 주는 일을 모두 이루셨다는 것을 성도들은 믿고 있습니다. 그 일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이미 예정이 되어 있었고 그것을 성경을 통해서 증거를 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성경에서 그 증거를 받아 믿음으로 역사를 해야 한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먼저 율법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를 받아야 합니다. 지금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일은 절기를 정하시고 그 절기를 어떻게 이루시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율법으로 반포를 하셨고 그 절기를 이루시는 일을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해서 말씀을 하신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는 성도는 믿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구약 성경을 더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언어로 기록이 된 성경은 다 알고 있지만 선지자들의 예언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줄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일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지만 이방인들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니 인생은 다 같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그렇게 성경을 보고 있지만 인생의 철학적 지식으로 성경을 보고 있고 그 언어를 아는 것으로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입니다.
먼저 절기가 이루어지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보면 우리가 초막절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율법에 정한 절기를 보아서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라고 외치고 있는 그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예언입니다.
모세의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증거를 받아야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도 절기를 그저 인생의 철학적 지식으로만 보았지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있고 이방인들 역시 모세의 율법을 보고 선지자들의 예언의 말씀을 보고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시는 말씀을 보고도 그저 그 시대 하나의 사건으로만 보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제자들에게 유월절을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이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장사 지낸 뒤 삼일 만에 영으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시고 난 후에 오순절이 임하매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해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생명을 얻은 자 되고 그 생명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초막절이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 성도들은 증거를 받아 믿음으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율법만 그렇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의 예언의 말씀에서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오셔서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을 증거를 해 주고 있습니다.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말씀은 그렇게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를 받아 믿음으로 역사를 하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데 진리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스바냐 선지자입니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찌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찌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찌어다 여호와가 너의 형벌을 제하였고 너의 원수를 쫓아내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너의 중에 있으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주님께서 이 세상 오셔서 우리 죄인들의 죄를 십자가에서 지고 가심으로서 우리 형벌이 제하는 말씀이 응하는 것을 증거를 받고 있습니다.
원수입니다.
사도 바울이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을 그러니까 인생들이 성경에서 율법을 철학적 지식으로 아는 것으로 자기들이 지키려고 하는 것을 폐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스바냐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너의 원수를 쫓아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시온의 딸이 노래합니다.
기쁘게 부르고 즐거워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실제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지만 실제 있는 일을 비유로 우리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는 성도들은 깨달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입니다.
늘 말씀을 하고 있지만 성경은 그들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계시고 있고 다만 그들을 통해서 영의 일을 그러니까 창조의 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비유와 예표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미가 선지자도 예언을 합니다.
딸 시온이여 해산하는 여인처럼 애써 구로하여 낳을찌어다 이제 네가 성읍에서 나가서 들에 거하며 또 바벨론까지 이르러 거기서 구원을 얻으리니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너의 원수들의 손에서 속량하여 내시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시온의 딸입니다.
교회를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실제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오는 이스라엘을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다 교회를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 그 딸이 해산하는 여인처럼 애써 구로하여 낳을찌어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해산입니다.
성도 한명이 구원을 받는 일입니다. 이 시대는 종교인들이 너무 많다 보니까 그것을 쉽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마치 어머니가 해산을 해서 아들을 낳은 것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고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도 복음을 듣고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해산의 수고를 다시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비유로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피조물을 창조하신 목적은 바로 영생을 얻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속의 일을 아무리 뛰어난 철학적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래서 한 영혼이 천하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입니다.
바벨론까지 이르러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바벨론은 율법을 지키는 종교를 비유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고 그 바벨론을 사도 요한에게 환상으로 보여 주시고 있고 그 바벨론이라는 것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 까지 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인생들은 바벨론이 무엇을 비유로 하는 말씀인지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고 아직까지 그 포로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또 예수께서 무덤에서 나사로를 불러내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그 일어난 일을 증언하였다.”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인생의 철학적 지식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모세의 율법을 완전케 하시고 또 선지자들의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고 있지만 제자들까지도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것이 인생의 철학적 지식의 한계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을 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생의 언어입니다.
성경을 보고 언어를 아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것으로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고자 하는 뜻을 성경에서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하고 그래서 사도 요한도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성령을 보내주심으로서 이 모든 일이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이 응하는 것임을 생각이 났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절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절기는 그냥 정하신 것도 아니고 또 그 절기가 폐하여 진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육적으로 그것을 문자 그대로 지킬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절기는 우리의 구원의 여정이라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냥 생각이 났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은 영의 일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복음을 전하는 자를 통해서 들어야 하고 그것을 유월절을 먹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렇게 듣는 자에게 성령이 오신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에스겔37:11절을 보겠습니다. (구 1209쪽)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성경입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우리 성도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저 인생의 언어로 아는 창조라는 단어를 생각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는 하나님 나라까지 다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씀을 하는 것이고 우리 성도는 성경을 보면서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아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지금 자기들이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것을 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환영을 하고 있지만 왜 자기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제자들 역시 성령을 보내주시기 전에는 선지자들의 예언의 말씀이 응하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사도 요한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그저 성경에서 인생의 언어로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를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을 보고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어느 특정한 말씀을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는 그대로 믿는다고 하는데 그것은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인생의 철학적 지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지 그것을 믿음이라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믿음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잠깐 언급을 했지만 믿음이라는 것은 반드시 복음을 먼저 들어야 하고 또 듣는다고 해서 우리 인생이 다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성령이 오셔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셔야 믿음으로 역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서냐 듣고 믿음으로서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먼저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 복음을 듣고 믿는다고 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는다고 했지만 그것은 인생의 철학적 지식에 따르는 믿음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복음을 듣는다고 해서 다 믿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제가 굳이 말씀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증거를 받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입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자의 말씀을 듣고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월절을 먹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게 유월절을 먹었으면 반드시 성령이 오셔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성령이 오시면 그때 복음을 전한 사람의 진리의 말씀이 믿음으로 역사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그저 종교 안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믿는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영의 일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비유와 예표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고 먼저 성령을 받아 예언의 은사가 있는 자가 전하는 복음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는 일입니다.
반드시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성령이 오시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율법에 정한 절기를 통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느 사람에게는 성령을 보내주시고 예언의 은사를 주심으로서 성경을 보고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게 하고 있고 그가 그 시대에 복음을 전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의 사람입니다.
반드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철학적 지식으로는 복음에 대해서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없다는 것을 성경에서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지만 그런 말씀을 남의 일로 치부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입니다.
신명기에 있는 말씀을 했습니다. 이제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모세가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여호와께서 오늘날까지 너희에게 주시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들이 성경을 보고 있는 철학적 지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선지자의 말씀 역시 그렇다는 것을 아는 성도만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성령을 구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언어를 압니까?
그리고 역사를 압니까? 그것은 공부를 하면 인생의 철학적 지식으로 다 알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 성경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것을 복음이라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사도 요한입니다.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1장에서부터 이 나사로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저 나사로라는 인물을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주님께서는 나사로와 같은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의 일을 이루셨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사로입니다.
그것을 에스겔 선지자가 예언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영적인 상태를 말씀을 하고 있고 그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나사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시는 일까지 에스겔37장에서 예언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입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우리 인생 전체가 영생에 대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것을 이스라엘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뼈입니다.
잠언에서도 이 뼈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고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다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어느 누구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면서 영생에 대해서 근심을 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뼈로 마르는 것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그저 이스라엘의 일로만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있는 일을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굳이 구약 성경을 볼 필요도 없고 하나님을 믿을 이유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창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성경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고 단지 옛날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일로만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는 창조에 대해서 전혀 깨달을 수 없고 영의 일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는지를 전혀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그 예언을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시는 일을 증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요한복음을 보아야 합니다. 나사로가 무덤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우리 인생들이 영적으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고 그것을 에스겔 선지자는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나사로 개인의 일로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나사로의 사건은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고 우리 인생 전체가 영적으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을 뼈가 마른 것으로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른 뼈입니다.
우리 인생의 영적인 상태가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당시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있는 이스라엘을 말씀을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지 마시고 그들은 실제 바벨론이라는 나라에 포로가 되어 있지만 이방인들 역시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있다는 것을 그래서 다 사망의 길로 가서 무덤에 있는 자 같다는 것을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시고 있다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아담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미 아담이 범죄를 해서 하나님께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말씀을 하실 때 우리 인생 전체는 다 그렇게 흙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인생의 철학적 지식으로 생각을 하니까 도무지 깨달을 수 없는 말씀과 같이 들릴지 몰라도 저는 성경에서 그렇게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로마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망입니다.
우리는 아담이 범죄 했을 때 이미 사망이 왕 노릇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도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다 죽었다는 것을 과거형으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살아 있습니까?
그것은 인생의 철학적 지식이고 시간적 개념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창조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고 하나님 나라가 다 이루어졌다는 것을 우리 성도는 믿고 있습니다. 그렇게 믿는 성도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말씀을 믿고 있습니다.
인생의 지식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저 역시 지극히 과학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있고 그래서 비록 과학적으로는 제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하면 저는 그렇게 믿음으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의 말씀입니다.
예언의 말씀이 응하는 것을 우리가 요한복음11장부터 해서 계속해서 보고 있습니다. 그런 성도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시는 구속의 일을 믿을 수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보면서도 인생의 철학적 지식으로는 영의 일을 도무지 깨달을 수 없어서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이 어떻게 응하고 있는지를 그리고 성경에서 무엇을 말씀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성경을 인생의 철학적 지식으로 아는 것으로 그 언어를 아는 것으로 주장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하고 그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완전케 하시고 선지자들의 예언의 말씀을 응하게 하신 일을 증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1장부터입니다.
그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일을 지금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요한은 분명히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입니다.
왜 그들이 깨닫지를 못했는가 하면 인생들은 다 철학적 지식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에 그들도 인생이기 때문에 깨달을 수 없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시고 오순절이 임하매 성령이 오시고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고 믿음으로 역사를 할 수 있다는 말씀이며 그 믿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 결과로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얻은 자 되어 주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 믿음으로 역사를 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편지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말씀을 보고도 믿음으로 역사를 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성령이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길 자에게는 성령을 보내 주신다는 것을 믿고 있고 그들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역사를 해서 예수의 생명을 얻어 그 생명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요한일서5:9절을 보겠습니다. (신 393쪽)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찐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성경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에 대해서 우리 인생의 언어로 기록하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기초를 모르고 성경을 보게 되면 그 언어를 아는 것으로 마치 그 언어가 하나님의 말씀인 것으로 생각을 하게 되어 있고 언어를 가지고 주장을 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8장에서 보았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입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하지만 모세의 율법은 이 세상의 함무라비 법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면 함무라비 법전과 같이 보고 현장에서 간음하다 집힌 여자를 끌고 주님 앞에 와서 모세의 율법에 기록이 된 언어를 아는 것으로 이 여자를 돌로 쳐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언어입니다.
저 역시 모세의 율법을 알고 있습니다. 간음하는 여자에 대해서 어떻게 하라는 것을 알고 있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주장을 하는 말이 모세의 율법대로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의 철학적 지식이라는 것을 잘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모세의 율법입니다.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구속의 일을 이 세상의 함무라비 법전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간음하는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는 말씀은 실제 생리적인 여자를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요한계시록에서 증거를 받는 것과 같이 큰 음녀의 받을 심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간음입니다.
지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있고 유대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간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고 모세의 율법에서 말씀을 하는 여자가 누구를 비유로 하는지도 모르고 마치 초등학생이 성경을 보는 것과 같이 보고 실제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주님께 끌고 왔습니다.
증거를 합니다.
이것이 증거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성경을 보고 인생의 언어로 기록이 된 문자를 아는 것을 가지고 자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성령이 오셔서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았다면 절대로 이 여자를 끌고 주님 앞에 오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 성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보고 하나님을 증거를 한다고 하는 인생들의 지식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유대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시대 이방의 종교인들 역시 모세의 율법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실제 돌로 쳐 죽이지는 않고 있지만 여자가 간음을 하는 말씀을 지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보는 것과 같이 조금도 다르지 않게 보고 있고 그것을 종교 안에서 전하고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증거 하는 것입니까?
성경에서 언어를 보고 아는 것으로 그저 인생의 지식으로 마음대로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저 증거라는 단어만 보고 마치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아 증거를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 시대 역시 너무도 많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나사로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 있는 나사로를 살려 주셨다는 말씀을 전하는 것이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까?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도 그저 인생의 언어로 기록이 된 증거라는 단어만 보고 증거를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뭐가 다릅니까?
모세의 율법을 인생의 언어로 보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주님께 끌고 와서 모세의 율법을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증거를 하는 것이나 무엇이 다르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아마 제가 이렇게 말씀을 하면 도무지 이해를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인생들입니다.
유대인들도 그렇고 이방의 종교인들 역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들이 증거를 하고 있다고 하면서 전하고 있지만 무엇을 증거를 하고 있는가 하면 바로 이렇게 인생의 언어를 아는 것을 가지고 그리고 표적을 보고 그것을 증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증거입니다.
결국 현대 사회에 와서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을 하게 되어 있고 그것이 현대 철학의 기초가 되어 있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종교 안에서 이런 증거를 하다 보니까 철학적 지식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고 지금 유럽의 국가들에서 종교가 어떻게 되고 있는가를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증거라는 단어입니다.
인생들은 성경을 보면서 이 말씀에서도 거의 증거라는 단어만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치 유대인들이 복음을 증거를 한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그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지금 이 증거를 옳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증거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요한복음 11장부터 해서 계속해서 모세의 율법과 그리고 선지자들의 예언의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시는 일에 대해서 증거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증거를 받아야 모세의 율법이 완전케 되고 선지자들의 예언이 말씀이 응하게 된 것을 증거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고 그 믿음이 역사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저 죽은 나사로입니까?
11장에서 주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은 실제 주님께서 오셔서 나타내신 표적입니다. 제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증거를 하려면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하려면 먼저 에스겔 37장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그리고 모세의 율법과 여러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이 응하는 것을 증거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의 언어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한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생은 다 같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주님 앞에 와서 모세의 율법을 자기들의 언어를 아는 것으로 주장을 하는 것과 같이 모든 인생들이 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사도 요한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찐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 하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먼저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증거를 받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신 후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을 하나님의 증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산 일입니다.
그것을 증거를 한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까? 단지 그 사건 하나로 그 표적 하나를 안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라고 말씀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고 있는 성도들은 깨닫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입니다.
먼저 복음을 듣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것을 사람들의 증거를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단지 성경의 언어를 증거를 받는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고 지금 요한일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증거는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복음은 모세의 율법을 주님께서 완전케 하시고 선지자들의 예언의 말씀을 응하게 하신 일에 대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로부터 먼저 증거를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복음을 들은 사람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신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렇게 성령이 오시면 그가 나에 대해서 증거를 하실 것이라고 요한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만 보고는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증거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성령을 보내주시고 있고 그가 오시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를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아들입니다.
늘 말씀하고 있지만 인생의 철학적 지식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아닙니다. 독생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형상을 입고 오신 것을 비유적으로 아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 아들에 대해서는 이사야9장6절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고 영존하시는 아버지시라고 평강의 왕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해가 안 됩니까?
기초가 되는 말씀은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어지지가 않으면 지혜를 구하고 성령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증거를 하는데 인생의 철학적 지식으로 이해가 안 된다고 하면서 그것을 부정을 하게 되면 성경 전체는 절대로 해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찐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 하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합니다.
성경을 보고 있습니까? 그 언어를 아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언어를 전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하고 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사도 요한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표적을 보고 증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sns를 가끔 봅니다.
그러면 종교인들이 성경의 언어를 적어 놓고 있고 그것을 보고 아멘이라는 댓글을 달아 놓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마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안다고 하면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끌고 오는 행위를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인생의 언어로 안다고 하면서 전하는 사람이나 아멘이라고 하는 사람이나 같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단순합니까?
그 정도는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왜 잠언에서 지혜와 지식과 명철에 대해서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하는데 그저 인생의 언어를 아는 것으로 마치 자기들이 지혜가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나사로입니다.
그가 무덤에서 살아서 나온 표적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성도는 성경에서 모세의 율법이 그리고 선지자들의 예언의 말씀이 응하는 것을 증거를 받음으로서 믿음으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정말 다시 말씀을 하지만 성경의 텍스트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달달 외울 정도가 된다고 해서 그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17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