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1.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147-1강, 요한복음11:1절을 보겠습니다. (신 165쪽)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양입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10장에서 양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목축업을 했고 그들은 양을 키우면서 살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유대인들 역시 양을 키우는 목축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양으로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양에 대해서는 성경에서도 많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양은 눈이 나쁘고 청각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눈이 나쁘다는 것은 이미 9장에서 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시고 밝은 눈으로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양입니다
실제 이스라엘이 키우는 양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양을 비유로 무엇에 대해서 말씀을 하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얻는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이 있는 자를 양으로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선한 목자입니다
선한 목자라는 말씀은 주님께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스스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의 말씀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알고 있는 목자를 주님께서 직접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직접적으로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성경에서 보면서도 이 말씀이 무슨 의미를 하고 있는지를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양입니다
그리고 선한 목자입니다. 양들은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양들은 주님께서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라 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은 이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를 받아 믿음으로 해서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 주셨습니다. 이 영생이라는 것은 그저 문자의 단어의 뜻과 같이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양들이 얻는 생명이 어떤 생명인가를 알고 영생을 말해야지 그저 영생이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따라갑니다.
우리 양들은 주님을 따라 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주님을 따라가고 있다고 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유대인들은 유대교라는 종교를 만들었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있고 이방인들도 종교를 만들어서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목자를 따라갑니까?
그들에 대해서 주님께서 이미 앞에서 말씀을 했습니다. 종교에 빠져 있는 모든 사람을 소경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영의 생명에 대해서 소경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소경이 종교 안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주님을 따라간다고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양들이 그러니까 예수의 생명이 있는 자들이 구원을 받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히브리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여 견고하여 휘장 안으로 들어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휘장 안입니다
그 안에는 속죄소가 있고 그 속죄소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의미를 하고 있다는 것을 성막을 통해서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양들은 주님의 음성을 아는 고로 이 길로 따라간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신 목적입니다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양들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양들이 얻는 생명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하는데 이 생명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어떤 생명입니까?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있는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자체가 생명이신데 그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생명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자기들이 양이라고 하면서 어떤 생명을 얻는 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종교의 교리서라고 하는 조직신학 책에서도 이 생명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종교에서 그 유명하다고 하는 신학자들이 이 생명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우리 양들이 태초에 있는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운명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입니다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육체를 입고 오셨다고 해도 어느 누구도 주님의 생명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실제 그렇게 버리셨다는 것을 성경이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에게 주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 양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는 주님의 양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육체인 우리 인생을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생명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방인들은 종교의 교리에서 신체의 구원을 주장을 하고 있고 그렇게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주님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충분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성경에서 증거를 받고 있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방의 종교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이성적 지식으로 성경을 보고 만든 삼위일체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안 믿습니다.
주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는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시는데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우리는 성경 외에 계시를 받으면 안 됩니다. 어느 누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해서 성경에서 증거를 하지 않는 말씀을 가지고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다 거짓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성경에서 전혀 근거가 없는 삼위일체를 믿고 있고 그들은 십계명의 제1계명을 어긴 자들이기 때문에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한 병자가 있었는데, 그는 마리아와 그의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였다.”
주님이 오셨습니다.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시고 있고 또 유대인들이 보는 가운데서도 많은 표적을 나타내시고 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배부르게 먹는 표적을 본 사람들이 많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던 유대인들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세례 요한입니다
그가 와서 세례를 주는 것도 역시 이스라엘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증거와 같이 이제 뒤에 주님이 오셔서 많은 표적을 나타내시고 또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시니까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믿음입니다.
아직 성령이 유대인들에게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구원을 받을 믿음이 있었다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성경을 어려서부터 보면서 산 사람들입니다. 메시아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입니다
물론 다른 복음서와는 약간 다르게 기록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셔서 많은 표적을 나타내셨고 요한복음에서는 특히 생명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그 말씀을 듣고 그 중에서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2:17절을 보겠습니다. (신 55쪽)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 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마가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세리인 마태를 제자 삼으시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가 주님을 영접을 하고 자기 집으로 모셔서 식사를 하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그때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주님이 오셔서 말씀을 하시는 것이나 표적을 나타내시는 것을 보고 일부의 사람들은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시는 메시아라고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보았고 그런 그들이 주님이 말씀을 하시고 표적을 나타내는 것을 보고 일부 믿는 사람이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 성령이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더라도 그들은 주님을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메시아로 받아들였고 그렇게 자기 인생들의 이성을 따라 믿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만큼 어려서부터 성경을 보았고 또 영생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이 오셔서 행하시는 일을 보고 그렇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물론 종교인들입니다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주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대적을 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10장에서 주님께서 양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자 그 말씀을 듣고 그들 중에서 분쟁이 있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자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주님을 처음부터 믿지 않고 주님께서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면서 내가 온 것은 양들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니까 귀신이 들려 미쳤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입니다
귀신이 들린 자가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고 반문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주님을 완전히 대적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그래도 유대인들 중에서 매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은 주님께서 나타내시는 표적을 보고 또 그 말씀을 듣고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믿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 믿음입니다.
아직 성령이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믿음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저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후에 성령이 오실 때 120여 문도 중에 있었을 수도 있고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난 후에 복음을 듣고 믿었을 수도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을 합니다.
10장에서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찌라도 그 일을 믿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되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입니다
성경을 알고 있습니다. 비록 문자적으로 알고 있지만 주님이 오셔서 실제적으로 문자적으로 그 일을 행하셨기 때문에 그 일을 믿을 수는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오셔서 구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말씀의 일을 하시는 것을 보고 그 일을 믿으면 너희가 내가 그리스라는 것을 믿을 수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실제 그렇습니다. 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이 눈을 뜨는 것을 보고 그가 밝은 눈으로 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는 말씀을 알고 있기 때문에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는 표적을 보고 주님을 믿는 사람도 있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셨습니다.
주님이 누구에게 오셨는가를 마가복음에서 말씀을 하고 있고 실제 그런 사람들은 주님을 좇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리인 마태를 제자 삼으시고 그의 집에서 잡수실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주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잡수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죄인과 세리와 함께 먹는가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 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는데 누구에게 오셨는가를 마가복음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자입니다
헬라어로는 강하다, 능력이 있다, 할 수 있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누구를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지금 죄인과 세리와 함께 주님께서 잡수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말을 하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입니다
강한 자가 있습니다. 그 강한 자가 누군가를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바로 율법을 잘 지키고 있는 사람을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주님이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쓸데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강한 자입니다
율법주의를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자를 강한 자로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보고 의인이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왜 오셨습니까?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도 그렇고 이방의 종교 역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면서 강한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교회라는 것을 알고 우리는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병든 자를 말씀을 하고 세상에 강한 자를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비유로 해서 교회 안에 강한 자와 병든 자를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율법을 지키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강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병든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죄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병든 자라야 의원이 쓸데 있다고 말씀을 하시면서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도덕적인 죄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교회고 그 안에는 율법주의자들이 강한 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 그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강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율법을 잘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유대인들도 그들의 종교에서 율법을 잘 지키면서 살았다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사마리아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환경 문제로 율법을 지키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세리입니다
우리나라로 하면 일제 강점기 때에 친일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로마를 위해서 세금을 거두었고 그런 그들을 율법주의자들이 얼마나 멸시를 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리로 살면 아마도 그들의 절기를 지키는 일이나 그런 일에 함께 할 수 없었던 것으로 생각이 되고 있습니다.
세리 뿐 아닙니다.
당시 천대를 받는 사람들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런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들을 보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주님께서 함께 잡수신다고 하면서 제자들에게 말을 하고 있고 그 말을 듣고 주님께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병든 자입니다
물론 실제 병든 자입니다. 나사로가 실제 병이 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을 의미로 말씀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실제 병든 자를 비유로 해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병든 자를 위해서 그러니까 죄인들을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회입니다
바리새인들과 그리고 여러 종파의 종교인들이 있었고 그들과 제사장들은 율법을 잘 지키면서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를 보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실제 그렇습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싶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시대를 보더라도 교회의 벽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돈이 없이 교회에 나가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입니다
병든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죄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제 자기가 죄를 지었으면서도 양을 살 돈이 없어서 그리고 정말 비둘기를 살 돈이 없어서 제사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꺼려하는 사람들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세리를 아주 꺼려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을 믿고 싶어도 그들의 시선이 너무 두렵기도 하고 그것이 부담이 되기도 해서 하나님을 믿을 수 없고 그런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에스겔34:16절을 보겠습니다. (구 1205쪽)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긴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어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멸하고 공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어 주지 아니하며 쫓긴 자를 돌아오게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강포로 그것들을 다스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실제 일을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라고 할 수 있는 그러니까 종교인들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셨을 때는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했고 이 시대는 종교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이미 10장에서 에스겔 34장의 말씀을 한번 말씀을 드렸던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목자가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진리를 전하는 자가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연약한 자가 되었고 병든 자가 되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우리 이방인들의 예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했는가를 보면 이 시대 종교인들이 어떻게 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니 에스겔 선지자의 말씀과 같이 목자가 없어서 진리를 전하는 자가 없어서 이렇게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물론 이제 주님이 오셨다가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속의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올라 가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해서 우리가 진리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에스겔 선지자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역시 이방의 종교인들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주님이 오셔서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긴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어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멸하고 공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실제 그 모든 일을 이루셨습니다.
이제 또 주님이 오십니까?
아닙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은 이 세상에 종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와 이 시대 종교의 영적인 상태는 같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주님이 오셔서 상한 자를 싸매어 주고 병든 자를 강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제 이방입니다
그들도 역시 종교가 되어서 목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뒤에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심으로 해서 진리로 인도함을 받게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진리로 인도함을 받음으로 해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을 깨달아서 믿을 수 있게 하고 그 믿음이 역사를 함으로 해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병든 자입니다
비유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인을 그러니까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을 병든 자로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교회 안에는 율법을 지키고 싶어도 하나님을 잘 믿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실제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위해서 저희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다시 영으로 살아나심으로 해서 그들에게 주님의 영이 거하시게 되었고 그 생명은 강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율법에 대해서 다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반포를 하셨지만 지키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 문자를 보고 억지로 풀다 보니까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키라고 하신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보고 알아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첫 번째는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을 지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은 율법을 다 지키신 부자이십니다. 그 부자에게 우리는 꾸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부요하심을 우리에게 주었다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해서 의롭다 하심을 얻고 그 결과가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인을 불러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면 그들이 믿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보아서 알고 있지만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원수가 되어서 대적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의인을 부르면 그들이 옵니까?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주님이 부르신다고 왔습니까? 그들은 절대로 안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해도 그들은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믿는다고 합니다.
유대인들도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내 양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들은 주님이 아무리 부르셔도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부르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것을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도 주님이 누구를 위해서 오셨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자입니다
상한 자입니다 병든 자입니다. 우리 성도는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자입니다. 그리고 상한 자입니다. 또한 병든 자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양들에게 찾아 오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얻게 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병든 자입니다
강한 자라고 좋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해서 좋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진노를 받게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진노를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진노의 포도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말씀입니다
그냥 기록이 되었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 이렇게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사도 요한이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가 하면 병든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병든 자를 통해서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해 주시는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병든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에스겔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을 해서 주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은 선지자들의 예언의 말씀을 이 세상에 오셔서 그대로 이루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서도 그런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자이고 결국에는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산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산 사람을 주님께서 죄인을 부르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양들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26:6절을 보겠습니다. (신 45쪽)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 실명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승천하시고 난 후에 그들은 다 성령을 받고 진리로 인도함을 받아서 생명을 얻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사는 곳이 베다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동쪽 3㎞의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감람산의 동쪽 경사면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베다니에는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병든 나사로입니다
그가 사는 곳을 우리는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병든 의미를 이제까지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지 못한 죄인을 병이 들었다고 말씀을 하는 것으로 비유로 하고 있고 죄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베다니 마을입니다
사도 마태는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동쪽 감람산 경사면에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로 하면 쉽게 말을 해서 판자촌이라고 할 수 있고 아주 물질적으로도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문둥이가 살고 있습니다.
당시 문둥병이 어떤 병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문둥병은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아서 생긴 병으로 알고 있었고 그들은 문둥병자가 있는 곳을 따로 격리를 했을 정도입니다. 최근까지도 문둥병자는 격리를 해서 살았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 동네입니다
감람산으로 올라가는 경사면에 있는 마을이고 문둥이가 살 정도면 그 동네가 어떤 곳인가를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로도 최 극빈자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이 되고 있습니다. 저도 이스라엘을 가보지를 않아서 경사면이라든지 그 동네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당시와 지금은 많이 변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문둥이가 사는 동네입니다
그런 곳에서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가 살고 있었고 병든 나사로는 그녀들의 오라비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모에 대해서는 말씀을 하지 않고 있고 쉽게 말을 해서 삼남매가 살아가고 있는데 그 오라비가 병이 들었다면 그 집의 형편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남자 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병이 들었다면 그는 천성적으로 약했던 사람이고 거의 일을 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 둘이 있으니까 이 시대는 그래도 여자들이 능력이 있으면 잘 살 수 있지만 당시는 농경사회에 목축을 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그들이 실제 삶에서도 얼마나 가난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병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병은 오래 되었고 치료를 제대로 받지를 못하고 살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율법을 지키고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고 그렇게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싶어도 종교인들의 요구하는 것에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그런 병든 자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아마도 주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을 보고 또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듣고 마리아나 마르다가 주님을 따랐던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자기 오라비의 병도 고침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을 했을 수도 있지 않았나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베다니입니다
헬라어의 의미로도 고통 받는 자들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베다니라는 지명 자체가 그런 곳으로 우리가 알고 있으면 됩니다. 그런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마리아나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는 율법을 지킬 엄두도 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 의미입니다
고통을 받는 자들의 집입니다. 실제 삶에서도 고통을 받으면서 살았기 때문에 그들이 바리새인들과 같이 일반 유대인들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미 병든 자라는 말씀에서 그것을 다 포함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는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양입니다
물론 성경은 영의 일을 비유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를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실제 우리가 세상에서 고통을 받는 삶을 살라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삶을 사는 자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는 고통을 받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비유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주님은 찾아오셨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그들이 의지를 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주님의 표적과 말씀을 듣고 주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next 14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