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은혜와 진리의 말씀

64강,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윤주만목사 2019. 5. 21. 06:18


64,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야고보서 1:26-27절을 보면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경건하다

경건이라는 뜻은 어떤 행위 보다는 마음에 담겨져 있는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은 외적인 경건에는 참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만 사실 내적인 경건을 잘 모르고 그저 경건의 모양만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경건하기 위해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 그리고 교회 안에서 성도와의 교제 중에 경건한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서 자기 자신이 구별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구별이라는 말을 참 좋아하고 그렇게 살아가야 경건에 힘쓰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구별된 삶을 산다고 경건해 집니까?

그렇게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구별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가를 한번 묻고 싶습니다. 아니 구별이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구별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구별된 삶을 살아가라고 가르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구별된 삶입니까?

경건하기 위해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정확이 어떻게 살아가야 구별된 삶을 살 수 있는가 하는 기준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겠습니까?

 

한 마디로 교만입니다

구별된 삶을 살겠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도 실패한 율법을 자기들이 다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율법을 다 지키겠다고 하는 말이 얼마나 교만한 말입니까? 또 그 말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거절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자기들이 구별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또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면 자기도 모르게 율법주의 사상에 미혹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자기가 하는 행위가 어떠한가를 모르고 미혹이 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단 한사람도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는데 조금 지키는 율법을 보면서 마치 자기가 구별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오해를 하고 또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구별이라는 단어는 내 쪽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스스로 어떤 행위를 하면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자체가 성립이 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구별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내 집에 강아지 열 마리가 있는데 그것을 내 마음대로 구별해 놓는 것을 구별이라고 합니다.

 

경건하기 위해서 내가 구별된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이 말씀을 하고 있는 뜻을 전해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조금 행하는 율법의 의를 보고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구별된 삶을 살아가고 있어도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구별해 놓느냐에 따라서 내 영혼이 결정이 된다는 것을 입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구별된 삶을 살았다고 자부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을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진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는 버리는 쪽으로 구별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시 이스라엘보다 행위의 모양으로 경건할 수 있다고 꿈에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그들도 하나님께서는 버리는 쪽으로 구별을 해 놓았는데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은 구별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는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죽어야 할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조금 더 경건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모두 죽어야 할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이 자기가 구별된 삶을 살았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어떻겠습니까?

 

교만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개는 개입니다. 집에서 기르는 개 한 마리가 자기는 주인의 말도 잘 듣고 다른 개들과 구별된 삶을 살았다고 주장을 한다면 여러분이 그 개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개 주재에 구별되면 얼마나 구별되겠습니까? 그 개가 구별되게 살아서 주인이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이 없이 사랑해서 구별을 하고 예뻐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지금 이 말씀은 그렇습니다.

개가 자기는 구별되게 살아서 경건하다고 생각을 하면서 주인 앞에서 자기가 경건하다고 주장을 하니까 이 경건은 헛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경건은 내가 무엇을 해서 경건한 것이 아닌데 이 개는 자기가 무엇을 해서 경건하다고 입으로 떠드니까 그 혀를 재갈 먹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경건할 수 없습니다.

경건할 수 없는 사람이 자기는 경건하다고 하면 그것은 자기 마음을 속이는 것이요 그런 경건은 헛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진짜 경건을 아는 사람은 자기가 경건하다는 말을 못 합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개 열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구별해서 경건하다고 했다면 그 개가 감히 주인에게 내가 경건합니다. 말할 수 있습니까? 은혜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마음에 새겨져 있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경건하다고 떠드는 것입니다

 

구별된 삶을 살아서 내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다 죽을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 중에서 나를 불쌍히 여기심으로 내가 다른 세상 사람들과 구별이 된 것이지 내가 무엇을 행해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경건하다 하지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혀에 재갈을 물리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떠들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은혜를 입은 사람은 감히 자기를 경건하다고 말하지 않고 또 그렇게 말하는 것이 얼마나 악한 일인가를 깨닫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미련한 사람들은 자기가 경건하기 위해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혀에 재갈을 먹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심하기 까지 합니다. 자기가 세상 사람들과 같이 술 안 먹고 담배 안 피우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마치 구별되고 경건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니 자기 마음을 속이는 자입니다

마음에는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면서 겉으로 나타나는 아주 작은 율법의 의를 보면서 마치 자기 마음이 경건한 것으로 포장을 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경건이 아니라 헛된 것으로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씀을 드려서 내가 경건하다고 하는 그 말을 하는 자체가 거짓이고 헛된 경건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구별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체가 혀에 재갈을 먹이지 않아서 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은혜를 안다면 감히 그 말을 할 수 없는데 은혜를 아는 사람은 혀에 재갈이 먹여져 있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데 은혜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경건하다고 떠드는 것입니다

 

교회 나온 사람의 삶은 거기서 거기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천국을 소망하고 사는 사람이라면 그 행위가 거의 대동소이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가난한 자를 도왔으면 교회 안에 있는 다른 사람도 역시 가난한 자를 돕고 살고 있으며 또 불쌍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똑 같이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분명히 차이가 납니다.

재갈을 먹인 사람과 재갈을 먹이지 않은 사람은 분명히 차이가 나고 그들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 가를 성경을 통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5:35-39절을 보면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마태복음 25:42-44절을 보면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교회 안에 있는 두 사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왼편에 있는 사람들도 예수님을 주라고 칭하는 것을 볼 때 이들도 분명히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대답하는 것을 보면 아주 대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대동소이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영이나 염소나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생활을 할 때는 그 행위가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양은 자기가 한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구별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기가 한 행위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염소는 자기가 한 행위에 대해서 분명히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양은 그 입에 재갈을 먹여서 자기 스스로 경건하다고 하지 않고 있지만 염소는 그 입에 재갈을 먹이지 않아서 내가 언제 그렇게 했느냐고 주님께 따지듯이 묻고 있습니다.

 

양은 자기가 한 행위를 기억하지 못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분명히 네게 그 일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혀에 재갈을 먹이고 살았기 때문에 그런 일들을 했다고 해도 굳이 기억할 필요도 그것을 가지고 스스로 경건하다고 주장할 필요도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염소가 양 보다 잘 못 살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감히 심판 날에 주님께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내가 언제 안 했습니까? 하고 대답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실제 이들이 얼마나 경건하게 살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양과 염소의 차이는 그 행위가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똑 같이 신앙생활을 했지만 한 사람은 입에 재갈을 먹였고 다른 한 사람은 입에 재갈을 먹이지 않아서 자기가 경건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그것이 헛된 것이 되고 말았다는 말씀입니다

 

똑 같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 구별은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입에 재갈을 먹인 사람은 양의 위치에 놓고 입에 재갈을 먹이지 않아서 자기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 산 사람은 염소의 위치에 구별해 놓았습니다.

 

염소의 경건은 헛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경건하게 살았다고 자부를 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양과 염소로 구별을 했을 때 당당하게 내가 무엇을 잘 못했느냐고 따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입에 재갈을 물리지 않은 염소의 경건은 헛것이 되었고 결국 심판을 받게 되는 그런 위치로 구별이 되고 말았습니다.

 

공동번역입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 혀를 억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셈이니 그의 신앙생활은 결국 헛것이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나왔다고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기가 하는 신앙생활에 취해서 마치 자기가 잘 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고 또 자기는 천국에 갈 수 있을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자기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을 남들과 비교하면서 착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내 신앙생활 헛것입니다

그것을 마치 헛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마치 자기가 경건한 것으로 착각에 빠지는 순간 예수님께서 염소에 위치에다가 구별해 놓게 됩니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도 들에 핀 백합화보다 못하다고 말씀을 하는데 자기가 조금 하고 있는 신앙생활에 취해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한 것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감히 이 시대 어느 누구도 그렇게 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솔로몬의 모든 영광도 들에 핀 백합화 만 못하다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염소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신앙생활을 보면서 그것에 취해 헛된 것인 줄을 모르고 스스로 경건하다고 입에 재갈을 먹이지 않고 떠들고 있습니다.

 

사람의 입이 문제입니다.

내 입에서 내가 한 신앙생활이 나오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자연스럽게 가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했네 하고 주장하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는 은혜가 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을 자랑하고 싶어서 입에 재갈을 먹이지 못 합니다

 

경건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3:16절을 보면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경건의 비밀입니다

이 경건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하늘에 오르셔서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지금 이 세상에 전파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것이 경건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는 그것이 경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믿는 그것이 경건이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없는 경건이 헛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한 마디로 헛된 경건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교회에 나온 사람은 다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냐고 말할 것입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처럼 다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믿는다고 했지만 그들은 자기 신앙생활을 의로 삼았기 때문에 경건의 비밀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 혀에 재갈을 먹이지 않았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기가 하는 행위를 자랑하는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가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낸다고 떠드는 그 말이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은혜 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혀에 재갈을 먹일 수 없습니다.

 

어떻게 내 신앙생활을 자랑 할 수 있겠습니까?

물에 빠져 죽게 된 사람을 구해주었더니 당신이 나를 구해 줄 때 나도 발을 움직여서 당신이 구해 주는 것을 도왔다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주었다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마 다시는 그의 얼굴을 마주 하는 것조차 싫어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신앙인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는 물론 감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난 후에 나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에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서 애쓰지 않았습니까? 내가 언제 주님을 돕지 않았습니까? 하면서 염소들과 같이 자기들이 한 신앙생활에 대해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혀가 망하게 만듭니다.

혀를 통해서 나오는 그 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거절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자기 신앙생활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목사라는 사람이 자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정직하게 살았다고 그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 혀가 그를 망하게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경건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물론 육적으로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 경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육적인 것은 육적인 경건입니다 내 육체로 하는 경건은 더러움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아본다고 하나님 앞에 더러움이 없는 경건입니까?

욥은 자기가 어떤 신앙생활을 했는가를 말하면서 자기가 고아의 아버지가 되었고 과부의 눈을 실망케 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욥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당했습니다. 고아의 아버지가 되었고 과부의 눈을 실망케 하지 않은 욥도 경건하지 못해서 하나님으로부터 고난을 당하게 되어서 아들들이 다 죽고 부인이 욕을 하면서 나가고 자기는 병이 들어서 기와로 자기 몸을 긁었다고 성경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와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았습니다.

어느 정도로 환난 중에 돌아보았느냐면 고아의 아버지가 되어 줄 정도로 돌아보았고 과부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 눈을 실망케 하지 않을 정도로 돌아보았습니다. 이런 일들은 모두 육적인 일입니다 그런 것으로는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는 과부의 남편 되십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사단에 의해서 환난을 당하고 있으며 영적인 아버지를 잃은 고아며 또한 영적인 남편을 잃은 과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아버지를 찾아주고 또 남편을 만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도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육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일을 하는 것도 물론 필요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을 채워주지 못하고 그 영혼을 구원하지 못 한다면 그가 행하는 경건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은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영혼이 구원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영혼 구원이 없다면 다 헛된 것입니다

내가 고아의 아버지가 되어 주고 과부의 눈을 실망케 하지 않을 정도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할지라도 그 영혼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내가 한 모든 행위는 다 헛된 것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내 신앙생활을 통해서 아직 아버지를 모르고 남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가르쳐 주고 남편을 소개해 주어서 그들이 평안을 누릴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라는 말씀입니다

 

육적인 경건에 대해서는 너무 힘을 씁니다

그러나 영적인 경건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합니다. 교회로 전도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이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가 구원을 받으려면 나 역시 먼저 복음의 비밀을 알고 구원을 받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경건은 먼저 내 영혼이 구원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는 경건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영혼의 구원의 확신도 없는 사람들이 열심만 있어가지고 이단인지 삼단인지도 모르고 그저 교회에 한 사람이라고 끌어드리면 마치 자기가 경건한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교회에 아무리 많은 숫자의 고아와 과부를 인도했다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 경건은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이 않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자기가 세속화가 되어 있는지 아닌지 조차 분별을 하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나온 것으로 마치 자기가 세속화에 빠지지 않은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성경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경건에 대해서 모르고 또 세속화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야고보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말씀입니다 교회 밖에는 세속화를 논할 필요도 없습니다. 거기는 어차피 세상이기 때문에 세속화가 되어 있는 곳이지만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는 자기를 지켜 세속화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세상적인 것이 세속화입니다

지금 교회 안에 세상적인 것들이 얼마나 많이 들어와 있습니까?

세상에서 주장하는 것과 교회 안에서 주장하는 것이 별로 다르지 않다고 하면 내가 세속화 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사상이 내 이성에서 별로 거부감이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면 세속화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어느 누구도 나를 지켜 줄 사람은 없습니다.

이미 초대 교회에 세속화가 되어서 갈라디아 교회는 율법주의에 빠져 버렸고 다른 교회들도 세속화 바람에서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 세속화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지키지 못하면 영혼이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나를 늘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너무 안주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천국을 침노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나를 돌아보고 영적으로 세속화에 빠지지 않게 내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경건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오시는 그 날에 양의 위치에 있어 염소와 구별이 되어 영원한 축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