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은혜와 진리의 말씀

63강,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윤주만목사 2019. 5. 21. 06:17


63,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누가복음 21:1-4절을 보면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마가복음 12장에도 똑 같이 나옵니다.

거의 한 글자도 안 틀리게 누가와 마가가 기록한 것을 성경을 통해서 확인을 할 수 있습니다. 아마 교회를 나가는 교인들 치고 이 말씀을 모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귀가 달토록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마음에서는 너무도 큰 부담감이 있고 이 과부와 같이 자기 생활비 전부를 드리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혹시 내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닌가를 스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연보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성도들의 연보를 통해서 교회가 운영이 되어 지고 또 복음만을 전하기 위해서 일하는 사역자들을 도와야 하며 이 세상에는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성도가 헌금을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재물이 없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움직이는 것이 돈이라는 말이 있듯이 재물이 없이는 사실 아무리 복음이 있다 해도 그것으로 인하여 지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아도 초대 교회에 삼천 명이 회개를 하고 나서 교회 재정이 어려우니까 사람들이 자기 집과 밭을 팔아서 사도들 앞에 내 놓아 그것을 가지고 구제를 하고 또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사용되었습니다.

 

헌금은 해야 합니다

만약 교회에 나와서 헌금을 한 사람도 하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더 이상 유지가 될 수 없고 잠시 후에는 문을 닫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교회에 나오면 당연히 헌금을 하고 또 하나님에 대한 열심으로 최선을 다해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헌금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없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더 많은 헌금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더 많이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보며 안타까워하지 하나님께 헌금을 하는 것을 아까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내 모든 것을 다 드렸을 때 내일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목사인 저도 예배를 드리러 가서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드릴 수 없습니다. 당장 내일 해야 하는 일이 있고 또 지금 내가 가진 모든 돈을 다 드리고 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입니다

 

믿음이 없다고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이 있으면 오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말로는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 자기가 내일 밥을 굶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면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하루를 벌어서 오늘 먹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에게 그 모든 것을 헌금으로 하는 것은 한 마디로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꾀임에 빠진 것입니다

 

헌금에 실족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한편에서는 믿음이 없어서 그런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믿음과 내가 헌금을 드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본질의 것입니다 믿음은 내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구속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헌금을 하는 것은 내가 감사를 하는 일입니다

 

만약 헌금을 하는 것이 믿음이라면 지금 교회에 나온 사람들 중에는 한 사람도 믿음이 있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자기 생활비 전부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혹시 그런 사람이 있다 해도 그것은 한 마디로 믿음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나타내고자 하는 선을 행해고자 하는 정욕에서 나온 것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9:10-11절을 보면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연보는 감사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성도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임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받은 것을 복음을 가르치는 자와 함께 나누고 그것을 또 복음을 전하는데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 많은 축복을 받았으면 그것에 따른 연보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해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연보는 감사함으로 해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부담이 되거나 강요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구약에는 제사를 드리기 때문에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일을 전적으로 하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제사 제도가 폐하여 지고 난 후에는 이제는 감사함으로 연보를 하고 그것을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후서 9:7절을 보면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연보의 기준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바로 각자의 마음에서 정한 대로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집사님 얼마를 하세요.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정한 그대로 행하는 것이 참 연보라는 말씀입니다 만약 그 연보의 기준을 교회나 목사가 정한다면 그것은 억지로 하는 연보입니다

 

법은 강제성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것이 믿음에서 하는 것이라고 주장을 해도 정해서 하는 연보는 모두가 억지로 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억지로 연보를 하면서도 자기가 그것을 낼 수 있는 형편이 되니까 그것을 억지라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인색 하겠습니까?

차라리 교회를 안 나오고 말지 인색하게 할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인색하게 연보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사람의 심리를 이용하여 자기 이익을 취하려 하는 자이지 복음을 아는 성도라면 결코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 것을 다 드려도 아깝지 않는데 인색하게 할 수 있습니까?

정말 자기 먹을 것 안 먹고 또 자기 자식들에게 해 줄 것 안 해주면서 아껴서 연보를 하고 있는 것이 교회 나온 모든 사람들의 마음인데도 그렇다고 주장하는 것은 한 마디로 연보를 통해 이익을 취하려 하는 자들의 악한 생각입니다

 

연보는 내 마음에서 정한 대로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어떤 강제성을 띠고 있다면 그것은 절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연보가 될 수 없습니다. 각자의 마음에서 정한 대로 즐거이 내는 것이 참 연보지 누가 지정을 해서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연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억지로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자체가 죄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하셔서 사람들에게 억지로 연보를 내게 하시겠습니까? 다만 사람들이 정욕에 빠져 하나님께 열심을 내려 하다 보니까 헌금을 정해서 하고 그것이 억지가 되고 있습니다. 왜 억지가 되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물론 형편이 되면 억지가 안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편이 안 되고 정말 한 달이 100만원도 안 되는 수입을 가지고 월세를 내고 생활을 해야 하는데 남들이 십일조를 하니까 거기서 어쩔 수 없이 십일조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 그 마음이 즐겁겠습니까? 아니면 억지로 어쩔 수 없이 내겠습니까?

 

즐겁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가식입니다 또 그렇게 하면 축복을 받기 때문에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더욱 고통을 당하게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돈이 많으면 많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1000만원 버는 사람과 100만원 버는 사람에게 똑 같이 십일조를 내라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강도짓을 하고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으며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악행을 저지르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서 과부를 본받으라고 합니다.

자기 생활비 전부를 드린 과부의 마음을 본받아서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어야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 합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과부의 두 렙돈을 예수님께서 지금 칭찬을 하시는 것입니까?

아마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과부가 되고자 노력을 하고 그 과부처럼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 정죄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이 말씀을 가지고 은근히 성도들에게 보아라! 과부도 자기 생활비 전부를 드리는 믿음이 있는데 너희는 풍족하면서도 드리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부를 보면 나는 정말 믿음이 없는 자입니다

자기 생활비 오늘 번 돈 두 렙돈을 다 드릴 수 있는데 나는 믿음이 없어서 오늘 번 돈 전부를 내 생활비 전부를 드리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에 커다란 짐을 지게 됩니다. 솔직히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정죄를 받고 있고 스스로 정죄에 빠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과부와 같이 두 렙돈 생활비 전부를 내라고 하기 위해서 지금 이 말씀을 하셨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 또한 강도와 다를 것이 전혀 없습니다. 제가 심하게 표현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 어떻게 하든지 교인들의 가산을 삼키려 하는 자들을 보면서 또 그로 인하여 실족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렇게 까지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냉정하게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결코 이 과부를 칭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부자들이 풍족한 중에 헌금을 하고 과부가 자기가 오늘 일해서 벌은 생활비 전부를 연보로 드린 것을 보면서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을 칭찬을 할 때는 최소한 그가 누구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더구나 자기 생활비 전부를 드린 과부인데 그 과부가 누구인가를 말씀을 하고 있지 않다면 이 말씀은 과부의 연보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연보를 가장 많이 한 과부입니다

그런데 그 과부에 대해서 한 마디도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귀한 일을 했다면 자기 생활비 전부를 드릴 정도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즐거워했다면 예수님은 이 과부에 대해서 밝히 셨어야 하고 그가 최소한 어느 지역에 사는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즐거이 내는 자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말씀을 하시는데 더구나 자기 생활비 전부를 드렸는데 그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씀을 하고 있지 않다면 이 과부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과부인데 더구나 자기 생활비 전부를 연보로 드렸는데 그가 누구인가를 말씀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 사건은 너무 중요합니다.

더구나 마가복음, 누가복음 두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사건인데 이 과부에 대해서 한 마디도 말씀을 하지 않고 그냥 과부라고만 했다는 것은 정말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과부를 칭찬하고자 이 말씀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과부의 삶이 얼마나 구차하겠습니까?

그런 과부가 만약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자기 생활비 전부 두 렙돈을 연보를 했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과부를 사랑하시고 또 그 신상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사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자기가 믿음이 좋다고 자부하는 사람도 사실 이 과부와 같이 자기 생활비 전부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물론 혹시 이 말씀에 감동을 받아서 가끔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목사인 저도 한 번도 그렇게 해 보지를 못 했습니다

 

아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치 이 과부가 굉장한 믿음을 가진 것처럼 이 과부를 본받으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본받아야 할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얼마나 악한 가를 경계로 하신 말씀입니다

 

구차한 중에 생활비 전부를 연보한 사람이 있습니까?

만약 그것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리석은 사람들은 아마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자기도 한번쯤은 생활비 전부를 드리고자 노력을 할 것입니다

 

비교가 안 됩니다

부자가 넉넉한 중에 헌금을 하는 것과 과부가 자기 생활비 전부를 연보하는 것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굳이 예수님이 아니더라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과부가 더 많은 연보를 했다고 말할 것입니다 물론 금액으로는 부자들이 더 많이 했을지라도 누구라도 이 과부가 더 많은 연보를 했다고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과부를 칭찬하셨다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칭찬을 하신 것이 아니라 과부가 이용을 당하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있는 말씀입니다 과부가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이용을 당하고 있는 것을 말씀을 해 주시는 것이지 이 과부가 연보를 많이 했다고 칭찬을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20:46절을 보면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과부의 말씀을 하시기 바로 전에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을 삼가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긴 옷은 종교지도자들의 상징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오셨을 당시에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어디를 다닐 때 꼭 긴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자기가 그만큼 거룩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을 너무 잘 섬겼기 때문에 당연히 시장에 나가면 문안을 받았습니다.

 

모두가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아니 사람들이 그들을 따라 하고 싶어 했습니다.

서기관들이 율법에 의해 정확히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고 또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따라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람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문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회당의 상좌에 앉았습니다.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교회에서 헌금도 제대로 못하고 하는 사람들은 상좌에 앉고 싶어도 못 앉을 것입니다 아니 스스로 아래 자리에 구석에 앉아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서기관들은 자기들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기 때문에 상좌에 앉아서 자기를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서기관들이 예수님과 대적을 했다고 해서 그들이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로서 모든 것에 모본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서기관을 존경을 했고 또 그들을 보면 당연히 문안을 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면에서 완전하게 보였습니다.

그런 그들의 행위를 따라하고 싶어도 사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루하루 살기가 버겁던 그 시대에 그들을 따라 한다는 것은 보통 작심을 하지 않고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 당시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우리나라도 일제시대가 있었지만 일본에 타협을 한 사람들은 부를 누리고 살았지만 사실 민초들은 너무도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나라에만 세금을 내는 것도 어려운데 일본이 침략을 해서 수탈을 해 가려할 때 그 형편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은 모두 로마에 협력을 했습니다.

그 대가로 자기들이 종교 지도자로서 누릴 수 있는 것은 모두 누렸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구차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런 서기관들은 그것을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적절하게 이용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바로 자기들이 누리는 있는 종교적 지도자의 삶을 영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들에게 영혼에 대한 관심은 없고 자기들의 권위를 나타내려 하다 보니까 종교적인 행위를 많이 강조를 했던 그 시대였습니다. 바로 그런 그들로 인하여 과부가 가산을 빼앗기는 일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0:47절을 보면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서기관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외식을 하면서 길게 기도를 하면서 종교적 행위를 사람들에게 요구를 하면서 연보에 대해서 축복을 해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과부가 구차한 가운데서 연보를 하면 길게 기도를 하면서 마치 그 연보로 인하여 축복을 받을 것처럼 하니까 과부는 자기 생활비 전부라고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연보를 하면 축복을 받습니까?

만약 그렇게 주장을 하고 있다면 그는 복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바로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 있는 서기관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돈 놓고 돈 먹기를 하고 있습니다.

 

내는 만큼 축복을 해 주신다고 말 합니다

물론 어는 사람은 헌금을 잘 내고 하면서 이 세상에서 축복을 받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헌금을 많이 해서 축복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복을 받기 위해서 헌금을 하는 것은 한 마디로 도박을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 과부를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것입니까?

지금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들의 행태를 예수님께서 비판을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과부에게 생활비 전부를 연보로 내게 기도를 하고 있는 서기관들의 종교적인 타락을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과부는 이용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 있는 서기관들에게 이용을 당하고 있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지 우리에게 이 과부처럼 자기 생활비 전부를 연보로 드리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풍족합니다.

그 가운데서 자기들이 과시를 하려고 연보궤에 보이면서 넣는 것입니다

그런 연보를 보는 과부는 그들이 내는 연보를 보면서 차마 부끄러워서 조금이라도 그들을 따라 가려고 하다 보니까 자기 생활비 전부를 연보궤에 넣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모두들 10만원을 연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부는 오늘 번 돈이 만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와서 예배를 드리려고 하는데 모두 십만 원을 연보하는 것을 보니까 거기서 천원을 내지를 못하고 그나마 자기 가진 모든 것을 다 내어 놓게 된 것입니다

 

과부의 가산을 삼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그 받는 판결이 더 중하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먹기에는 너무도 달콤하겠지만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 받는 판결이 얼마나 중하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어리석은 과부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축복을 가지고 복음을 위해 연보하는 것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내 헌금이 과연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것인가 아니면 억지로 내는 것인가를 냉정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 과부와 같을 수 있습니다.

서기관들이 행하는 그것을 자기도 따라 하려고 하다가 하루를 굶어야 하는 괴로움에 처해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자기 생활비 전부를 연보하는 것은 절대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즐겨 내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위해 성도는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연보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용은 당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서기관들에게 이용을 당하는 이 과부는 자기 가산을 다 빼앗기고 또 자기 영혼까지도 빼앗기고 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세요.

성도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들에게 미혹 당하지 않을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해 주신 그것을 가지고 즐거운 마음으로 복음을 위해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런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