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은혜와 진리의 말씀

28강, 너는 나와 항상 함께 있으니

윤주만목사 2019. 5. 4. 06:15


28, 너는 나와 항상 함께 있으니

 

누가복음 15:31-32절을 보면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탕자의 비유는 모두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탕자와 같은 사람이라 해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아무리 모법적인 신앙생활을 한 사람도 한번쯤은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에 내키는 대로 살아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경험이 있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더욱 은혜가 되고 그 은혜에 감사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도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지만 청년 시절에는 잠시 교회를 떠나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아쉬운 것이 있다면 가장 좋은 때에 교회를 떠나서 배워야 할 것들을 바로 배우지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오늘은 탕자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기 보다는 그 형제 대해서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탕자의 비유에는 두 명의 주인공이 나옵니다. 그 하나는 탕자고 다른 하나는 탕자의 형입니다 성경을 보면 물론 탕자가 더 주인공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그 형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게 말씀을 하고 싶었던 것이 있는 줄 믿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거의 모든 말씀은 탕자에 대해서 나오지만 뒷부분에서는 오히려 탕자 보다는 그 형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탕자 같은 사람이 있고 또 형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두 사람을 모두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신앙을 물려받은 성도들은 어찌 보면 탕자라기보다는 그 형에 가까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변에 보면 탕자와 같은 사람도 있지만 그 형과 같은 사람도 많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더구나 나이가 들수록 탕자 같은 사람 보다 형 같은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탕자가 될 수도 그 형이 될 수도 있습니다.

탕자가 되느냐 그 형이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두 아들을 어떻게 사랑하시고 있는 가를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아버지가 결코 집을 나간 탕자를 더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온 그 형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이 비유를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탕자에게 행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에게 불평을 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본문 말씀에서 보듯이 그 형이 아버지를 얼마나 정성껏 섬기고 살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마음까지도 헤아리면서 집을 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 앞에서 잔치를 할 수 없었을 정도로 참 마음이 깊은 아들입니다

 

누가복음15:29절을 보면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형의 대답입니다

탕자의 형은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고 살았습니다.

물론 그 명령이 행위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영적인 구원에 대한 명령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탕자가 돌아와서 구원을 받은 것으로 우리가 해석을 함으로 그 형 또한 구원에 대한 명령을 어기지 않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구원을 사모하고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로서 이 세상에서 복음을 위해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늘 천국을 사모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지 않고 살았는데 탕자가 돌아오니까 아버지께서 그 탕자에게는 잔치를 베풀어 주시고 자기에게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염소 새끼도 내어 주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서 화가 난 것입니다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지 않게 하다가 어느 날 다시 교회를 나왔는데 그 사람이 성공을 해서 아주 잔치를 하는 듯이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하고 나는 정말 교회 안에서 복음을 위해 헌신을 했는데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즐거워할 만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형의 심정이 딱 그렇습니다.

탕자와 같이 세상에서 마음대로 살다가 온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대우를 받고 또 잔치를 베풀듯이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자기는 한 번도 하나님의 명령에서 떠나 본 적이 없는데 사는 것이 늘 그냥 그대로 인 것입니다

 

누구나 화가 날 일입니다

형의 입장이라면 어느 사람이라도 그 잔치에 끼어들고 싶은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목사인 저라도 그런 잔치에 끼어들어 즐거워 한다는 것이 솔직히 인간적으로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아니 도리어 하나님께 화를 내고 싶을 것입니다

 

누구는 세상에서 누릴 것 다 누리다가 어느 날 예수 믿는다 해서 보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축복을 내려 주고 있습니다. 아주 잔치를 베풀 정도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다면 사실 마음이 좋을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촌이 노력해서 땅을 산 것도 배가 아픈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더구나 구원을 사모하며 살아온 나보다 자기 마음대로 세상에서 즐길 것 다 즐기다 온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더 축복을 해 주신다면 마음이 아픈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화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형이 화를 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형이 나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어쩌면 실수를 했다고 봐야 합니다. 우선 그 형에게 먼저 그 사실을 알리고 형을 설득을 하고 난 후에 잔치를 베풀었다면 몰라도 형에게는 아무 한마디도 상의하지 않고 아버지 기분에 따라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사실 탕자 보다 형이 아버지의 사랑을 더 많이 받고 있었다는 것을 형이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탕자가 돌아 온 후 아버지가 잔치를 베푼 것에 대해서 화를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형은 늘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잔치를 해 주는 외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형이 얼마나 사랑을 받고 있었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늘 형과 함께 있었습니다. 사실 함께 있는 다는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함께 있는 것 보다 자기 재산에 더 관심이 많은 것이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지금 탕자도 그랬지만 형도 마찬가지로 자기 것에 대한 관심과 그리고 그것을 마음대로 사용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너무도 컸습니다.

 

아버지가 함께 있는 사람이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시편23:4절을 보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모든 인생은 사망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형이 아무리 아버지를 잘 섬겼다 할지라도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잘 섬겨서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함께 있어야 천국에 간다는 것을 형은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을 잘 섬기면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잘 섬긴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지 않는다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잘 섬겨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셔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아무리 잘하면 무엇 할 것입니까?

신앙인들이 착각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잘하면 하나님께서 무조건 받아 주실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인간적인 생각인가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는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아무리 함께 하고 싶어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해 주시는 것이 더 중요합니까? 그러나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형과 같이 자기가 아버지를 잘 섬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그는 사망을 당하게 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내가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내가 사망의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사람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물론 육적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영적인 시대입니다 다윗과 같이 모든 싸움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이기게 해 주시는 그런 시대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사자 밥이 되고 순교자가 되게 그냥 내 버려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탕자와 형의 차이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즐거움을 누릴 것이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수고와 고생만 따를 뿐입니다 형이 만약 자기가 아버지를 잘 섬기는 그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면 그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가 이 세상에서 즐거움을 누리게 하기 보다는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주었습니다.

 

잔치를 좋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버지가 탕자를 위해 잔치를 베풀어 준 것과 교회 안에 들어 와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는 사람이 잔치를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잔치를 누리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잔치를 누리는 것이 자기 영혼을 파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누가 잔치를 누렸습니까?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부자는 연락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자기 마음에 좋은 것을 다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누리고 산 그 잔치로 말미암아 그는 음부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성도는 잔치를 누리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직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초대할 때 잔치가 필요한 것이지 성도들의 모임이 잔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 잔치를 누려서는 안 되냐면 성도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모두가 나그네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이 처음에 정착하던 가나안은 이미 거주하던 사람들이 있어서 나그네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와 같이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나그네들이 잔치를 베풀고 있습니다.

 

탕자는 돌이킨 자입니다

하나님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위해서는 성도들이 잔치를 베풀어 주어야하지만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성도들은 잔치를 해서는 안 됩니다 신약 교회에 누가 교회에서 잔치를 베풀었습니까?

 

그들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다시 돌아온 영혼을 위해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더 기뻐하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로 탕자와 같은 사람을 위해서는 성도가 잔치를 베풀어 주어야지만 성도를 위해서는 잔치를 베푸는 것은 한 마디로 부자가 되어 연락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형은 자기 것을 몰랐습니다.

지금도 교회에 나와서 자기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것은 이 세상에서 잔치를 누리고자 하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 내 것이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 것이 무엇입니까?

천국입니다 이미 탕자의 형은 아버지의 것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동생이 이 세상 것으로 잠시 잔치를 누리는 것에 화를 내고 있습니다.

 

내 것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내 통장에 1조원이 저축이 되어 있어서 때가 되면 그것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작은 것으로 잔치를 누리는 것에 대해 부러운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아니 부러워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잠시 잔치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잔치를 누리며 살 수 있는데 지금 누리는 잔치가 무엇이 그리 부럽겠습니까?

 

그러나 교회 안에는 부러워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부러워하는 이유는 믿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것이 내 것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잠시 누리는 잔치에 모든 마음이 빼앗겨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것이 내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은 동생이 누리는 잔치에 화가 날 필요도 그리고 그것을 부러워하지도 않습니다.

 

성도는 하나님과 함께 사는 자입니다

천국은 이 세상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곳입니다 만약 그런 곳이 아니라면 무엇 하러 우리가 예수를 믿고 이 세상에서 고난과 환란 속에서 인내를 하겠습니까? 예수를 믿는 것은 이 세상에서 잔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는 고난 속에서 인내를 하지만 천국에서 누릴 기쁨을 생각하면서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히브리서11:26절을 보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애굽의 모든 보화가 무엇입니까?

내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보화입니다 그 당시 애굽은 모든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고 그 애굽의 왕자로 산 모세는 세상에서 연락을 하면서 모든 것을 누리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믿음으로 그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하늘의 것을 더 사모 했다는 말씀입니다

하늘의 것을 이 세상 모든 보화 보다 더 크게 보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 사람들은 하늘의 것은 바라보려 하지 않고 그저 이 세상에서 연락을 하고 싶어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성도는 다릅니다.

아버지 것이 다 내 것인데 무엇이 부럽겠습니까?

세상에서 잔치를 못하면 어떻습니까? 천국을 믿는 성도라면 아버지 것이 다 내 것인데 그것을 사모하고 있다면 굳이 남의 잔치를 부러워 할 필요도 화를 낼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6:20절을 보면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욕심을 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를 얻었으면 하나는 버리시기 바랍니다. 탐욕은 우상 숭배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천년 동안 아니 그 이후에도 영원히 천국에서 왕 노릇 하면서 살 성도가 이 세상에서도 왕 노릇하면서 매일 잔치를 하고 싶어 한다면 그것은 탐욕입니다

 

아버지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 줄을 모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잠시 잔치를 누리는 것에 마음이 빼앗기는 것입니다 정말 마음에서 천국을 믿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성도라면 사촌이 땅을 사서 부자가 되도 또 교회에 이제 나온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는 것을 보아도 전혀 부럽지 않는 것입니다

 

아버지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내 것인데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이 세상에서 잔치를 못 했다고 불평을 한다면 그는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그네는 자기 집에 들어가서 잔치를 하는 것이지 잠시 머무는 남의 집에서 잔치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골로새서3:5절을 보면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성도는 천국을 얻은 사람입니다

아버지 것이 다 내 것인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부족해서 아직도 다고다고 하면서 매일 무엇을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다 얻는다 해서 그 사람이 만족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절반을 얻는다 해도 사람은 결코 만족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재벌이 나는 돈을 벌을 만큼 벌었으니까 이제 그만 벌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이 생각할 때는 몇 십 억만 있어도 욕심 안 내겠다고 하지만 실제 그것을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손에 그것이 쥐어지고 나면 그것은 너무도 하잘 것이 없는 것으로 보여서 다시 또 더 큰 것을 바라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에 우리는 자족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것 천국을 가졌는데도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천국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것이 내 것으로 믿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조금 더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야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성도는 탐심을 버려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잔치하고자 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버지 것이 다 내 것인데 또 세상 것에 탐을 내는 것은 결국 사단에게 미혹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누구 것입니까?

아담이 범죄를 한 후에는 사단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십일을 금식하신 후에 사단이 이 세상 만물을 다 보여주면서 내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미혹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사단은 지금도 끊임없이 이 세상 것을 가지고 시험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것이 내 것인 것을 모르게 미혹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것을 가지고 그것을 주면서 진짜 내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게 만들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35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하나님의 것은 모두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것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부부는 한 몸이며 재산을 같이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부가 한 집에 살면서 남편 것 따로 내 것 따로 가지고 산다면 그것은 남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는 자기 것을 자기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신부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천국에 있는 것을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

 

목숨이 귀합니까?

아니면 재산이 더 귀합니까? 천국은 재산입니다 그 천국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목숨이 더 귀하다고 믿는 성도는 이 세상 잔치에 그리고 이 세상에서 연락하는 삶을 사는 것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탕자가 돌아와 아버지가 그를 위해 잔치를 베풀어 주시면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마땅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을 주셨지만 탕자는 이제 하나님께 돌아 온 사람입니다 그를 위해 하나님께서 잔치를 해 주신다는 것은 내가 기뻐해야 할 일이지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섬겼는데 하고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형과 같은 사람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인내하면서 참고 견디며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가야 합니다. 때로는 잔치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상할 때도 있겠지만 그러나 아버지 것이 다 내 것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있다면 그것을 보고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 기쁨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그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것이 다 내 것이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그것을 아는 성도는 탕자를 위해 하나님께서 잔치를 베풀어 주시는 것에 화를 내거나 마음이 상하지를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성도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늘 나와 함께 하시고 있고 또 하나님의 재산 천국이 내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성도는 비록 세상에서 연락하는 삶을 살지는 못할지라도 하늘의 것을 바라보면서 함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영접함으로서 예수님의 것이 다 내 것이 된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을 섬기고 그 명령 구원을 사모하면서 살아갈 때 성도는 잔치를 한 번도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나와 함께 하시고 또 아버지 것이 다 내 것이라고 믿는 성도는 그것을 바라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