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은혜와 진리의 말씀

25강, 왜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는가?

윤주만목사 2019. 5. 2. 03:16


25, 왜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는가?

 

창세기 9:25절을 보면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성경을 보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말씀들이 참 많습니다.

그 가운데 가나안의 저주입니다 사실 노아가 가나안을 저주한다는 것은 우리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가나안은 함의 아들입니다 함의 아들은 여럿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실 잘못은 노아가 했습니다.

그리고 노아의 실수를 가리지 못한 것은 노아의 아들 함입니다. 가나안은 이 사건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저주를 받을 만한 일을 한 일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가나안을 저주했습니다. 노아가 왜 가나안을 저주 했는가를 찾아보겠습니다.

 

창세기9:20-21절을 보면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노아 홍수가 있은 후 노아 가족이 포도 농사를 짓고 그것을 수확한 후에 노아가 그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습니다.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고 말씀을 했는데 홍수 후에 노아는 술에 취해서 옷을 다 벗고 잠이 들 정도였습니다. 사실 이 일을 행한 것은 노아이며 노아가 실수를 한 것입니다

 

물론 노아도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인이지 결코 행위로 말미암아서는 어느 누구도 의인이라 칭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노아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함이 보고 형제들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창세기9:22절을 보면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문제는 가나안의 아비 함입니다.

물론 노아가 술에 취해 있을지라도 그것을 자기가 보았으면 그 허물을 가려 주었어야 하는데 형제들에게 이야기를 해서 그 형제들로 그 아비의 하체를 가리게 했습니다. 어찌 되었든 원인 제공자는 노아입니다 노아가 술에 취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노아가 자기 처신을 잘 했더라면 함이 굳이 노아가 벌거벗고 자는 것을 보지 않았어도 되고 그것으로 인하여 문제가 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 일로 노아가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술에서 깨어난 후에 일어나서 가나안을 저주 합니다

 

창세기 9:24-25절을 보면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런데 아무 잘못도 없는 가나안이 저주를 받게 됩니다.

사실 저주를 받아야 하면 함이 받아야 하는데 왜 가나안이 저주를 받느냐는 것입니다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잠을 잘 때 그것을 본 사람은 가나안이 아니라 그 아비 함입니다. 그런데 노아는 함의 자녀들 가운데 가나안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당연히 저주를 하려면 함을 저주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노아는 함을 저주하지 못하고 그 아들 가나안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왜 가나안을 저주 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왜 노아가 저주를 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물론 노아의 행위는 잘못 되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 아비의 행위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것은 아들로서 당연히 저주를 받아야 하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는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비도 사람입니다

사람의 실수를 보고 특히 부모의 실수를 보고 그것을 가려주지 못하는 아들을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가를 보겠습니다.

 

신명기 27:16절을 보면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부모가 아무리 실수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가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내 부모가 정말 싫을 때가 있습니다. 누구는 매일 술에 취해 들어오는 아버지를 싫어하고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는 부모를 싫어할 수도 있고 또 집에 들어와 가족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를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부모의 잘못입니다

부모는 이런 일을 자녀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자녀가 싫어하는 행동도 조심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부모도 사람인지라 때로는 자기를 절제하지 못하고 자녀가 보기에 못 마땅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탐탁하지 않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기 보기에는 탐탁하지 않을지라도 그것을 내색하는 자녀는 저주를 받을지니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함이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자는 모습을 보고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노아를 존경하고 공경을 했다면 설령 아비가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잘지라도 그 허물을 덮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함은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자는 모습을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고 자기가 그것을 덮어주기 보다는 그 형제들도 와서 보라고 그 형제들에게 그 사실을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노아의 행위를 보고 경홀히 여기면서 술에 취한 아버지의 허물을 드러내는 잘못을 하고 말았습니다.

 

함이 그 아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성경을 통해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잠언 10:12절을 보면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함이 노아를 사랑했다면 당연히 형제들에게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자기가 아비의 벌거벗은 것을 덮어 주었어야 합니다. 함은 자기 아비 노아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비의 행위를 가볍게 여기고 그것을 오히려 드러냈습니다.

 

함이 저주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노아가 실수를 했다 할지라도 함이 그 아비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그 아비가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자더라도 그 허물을 가리워 주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함은 그 아비 노아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가 직접 그 허물을 가리우기보다는 오히려 형제들에게 이야기해서 허물을 들춰내는 일을 하고 말았습니다.

 

에베소서 6:2절을 보면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내 아버지와 부모가 나에게 모든 것을 잘해 주어서 공경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부모가 유산이 많고 또 나를 헌신적으로 보살펴 주어서 공경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은 꼭 성도가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이라도 그 부모를 공경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이 세상의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가 부자라서 내가 그 풍족함을 누릴 수 있어서 공경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부모가 없으면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없습니다. 또한 내가 태어나서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 수 있는 성도가 된 것은 부모님의 은혜입니다 당연히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악인도 자기에게 잘 해 주는 사람에게는 잘 합니다.

성도는 나에게 잘해 준다고 해서 내가 잘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그 부모겠습니까? 나에게 술 취한 부모가 있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인들이 너무 이기적인 생각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는 섭리는 정말 오묘합니다. 그것을 다 깨달아 알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안다고 해 보아야 마치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부모가 완전해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하더라도 때로는 내가 감당하기 힘든 허물이 보일지라도 사랑이 있다면 그 부모를 공경할 수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성도라면 그 부모가 어떤 사람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술에 취해 있는 모습을 보게 하는 것도 때로는 그 부모가 능력이 없어서 오히려 짐이 되게 만드는 것도 모두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있다면 어떻게 그 부모를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함은 노아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가 아비 노아를 사랑했다면 설령 술에 취해 더한 일을 했다 할지라도 그 아비의 허물을 감추어 주었을 것입니다 함은 노아의 믿음을 본 것이 아니라 노아의 행위를 보고 그것이 못 마땅하게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에 그 아비가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잔다면 아마 쳐다 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 나에게는 저런 아버지가 있냐고 원망을 할 것입니다

아니 술 문제가 아니라 다른 문제가 있어 자기가 보기에 못 마땅하면 그 아비를 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용납하시지 않는 다는 것을 노아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함은 그 아비 노아를 공경 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함이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당연히 함이 잘못을 했으면 그 당사자가 저주를 받아야 하는데 왜 그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는 너무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 말씀을 많이 보아왔고 또 들어 왔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그 뜻을 모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바로 성도의 견인입니다

지금 이 시대 성도의 견인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니 성도의 견인을 말하면 오히려 공격을 당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율법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에 성도의 견인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견인을 주장하면 누가 가장 손해를 보게 됩니까?

 

바로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목사들입니다

내가 무엇을 잘하든 못하든 한번 구원한 성도를 하나님께서 끝까지 구원해 주신다고 한다면 율법주의 목사들에게는 너무도 치명적인 교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잘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해도 성도들이 열심을 낼까 말까 한데 한번 구원받은 성도는 잘못을 해도 끝까지 구원한다고 하면 그들의 생각에는 아무 것도 안할 것이라고 오해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생각입니다

성도의 견인을 자세히 가르쳐 주어도 구원을 받은 성도는 더욱 더 헌신적으로 복음을 위해 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누구를 위해 일하느냐의 차이겠지만 성도의 견인을 믿는 성도는 정말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더욱 헌신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성도의 견인과 관계된 말씀입니다

함은 노아와 함께 구원을 받은 성도입니다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 방주 안에 들어갔다는 것은 구원을 받은 성도라는 말씀입니다 그가 노아의 아들이야 아니냐를 논하기 이전에 방주에 들어간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해 주신 사람들입니다

 

함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아만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노아의 부인과 그리고 세 아들 그리고 세 자부가 함께 예수 그리스도 방주 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자의적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방주로 들여보내 주신 것입니다

 

아들이라고 꼭 들어가라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만약 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아들이라도 방주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구원을 받은 성도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한 자를 사람이 저주할 수 있습니까?

 

로마서 8:33절을 보면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함은 그 아비 허물을 가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아비 노아가 술 취해 벌거벗고 자는 것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공경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아로부터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함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방주에 들여보내 주신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노아는 함을 저주할 수 없었습니다.

그 아들 함이 자기를 공경하지 않고 경홀히 여겼기 때문에 저주를 받아 마땅한데 하나님께서 함을 의롭다 하셨기 때문에 인간인 노아가 함을 저주하게 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 아들 함이 분명히 저주를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저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는데 누가 정죄를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노아가 함을 저주한다면 그것은 함을 송사하는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깨달아야 할 것은 한번 의인은 영원한 의인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노아는 얼마든지 함을 저주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의 견인입니다

한번 의인은 영원하기 때문에 노아는 함을 저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을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사람이 저주를 한다 해도 그 저주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게 됩니다. 노아의 저주가 강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축복이 더 강합니까? 노아가 아무리 저주를 한다 해도 함은 저주를 받을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6:17절을 보면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노아의 방주는 약속의 기업을 보증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의 기업을 주신 자에게 절대로 변치 아니하십니다. 사람은 혹시 그것을 잊어버리고 마음을 바꿀 수 있어도 하나님께서 절대로 바꾸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함은 기업을 약속 받은 사람입니다 만약 노아의 저주로 그것이 변해진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맹세로 보증을 해 주셨습니다.

한번 보증한 것이 내 실수로 인하여 변해진다면 우리는 한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입었지만 매일 사는 것이 죄입니다. 만약 그것이 문제가 된다면 우리는 예수를 믿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만약 함과 같은 실수로 우리가 저주를 받아야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실수를 안 하고 산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았지만 우리 육체는 역시 오늘도 함과 같이 저주를 받을 일을 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직 복음의 비밀을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

 

성도의 견인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의롭다 하신 성도는 다시 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미 우리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지고 가셨습니다. 그것을 믿는 성도는 죄가 없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은 의인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 의인을 송사할 수 없으며 저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함과 같은 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방주에 들어간 자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라는 말씀입니다 내 육체는 아직도 함과 같지만 나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성도입니다

 

지금 이 시대 저주를 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그 저주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나를 결코 저주할 수 없습니다. 내가 사람의 예로는 함과 같이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하는 사람일지라도 나를 저주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며 하나님께 송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하는 저주를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로마서8:1절을 보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어느 누구도 나를 정죄할 사람이 없습니다. 만약 나를 정죄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람입니다 설령 내가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 하는 죄를 지었다 해도 나는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습니다. 사단은 지금도 사람들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함부로 저주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정죄해서는 안 되고 또 함부로 저주를 해서도 안 됩니다 왜 안 되느냐면 내가 저주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고 맙니다. 내가 예수 안에 있으면 방주 안에 들어가 있는 성도라면 어느 누구도 저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설령 내가 함과 같이 저주를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 하시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있어 이제는 결코 정죄함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은 설령 누군가 나를 저주한다 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노아는 함을 저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에 아들 가나안을 저주했습니다. 그 아들 함이 한 행위로는 반드시 누군가가 저주를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이 의롭다 한 함을 저주할 수 없어 가나안을 저주 했습니다.

 

우리는 함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저주를 받아야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대신 저주를 받아 주셨습니다. 함의 아들 가나안은 함을 대신해서 저주를 받았습니다. 가나안은 아무 잘못도 없지만 그 아비 함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13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대신 저주를 받았습니다.

함 대신 가나안이 저주를 받은 것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저주를 받아야 하는 것을 대신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들을 너무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죄가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저주 받게 하셨습니다.

 

함은 분명히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나도 또한 분명히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그 저주를 대신 받아 주는 이가 없다면 내가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대신 저주 받는 것을 모형으로 창세기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 저주를 받으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가나안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그가 저주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은 모형입니다 앞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저주를 받아 주실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으로 노아의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함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입니다

살아가면서 설령 실수를 하고 죄를 짓는다 해도 이미 내가 저주를 받아야 하는 모든 죄를 예수님께서 대신 지고 가셨습니다. 그것을 믿는 성도는 설령 누가 나를 저주 한다 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누가 송사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송사 못합니다. 당대의 의인이요 완전한 자인 노아도 함을 송사할 수 없습니다.

 

방주에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노아는 함을 저주해야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함을 저주할 수 없어 대신 가나안을 저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야 하지만 내가 받아야 하는 저주를 대신 예수 그리스도께 돌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종으로 오셨습니다.

마가복음은 바로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은 족보가 없기 때문에 마가복음에는 족보가 나오지 않으며 종으로서 섬기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가는 성경에 기록을 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강과 기쁨을 누리며 하늘의 소망을 든든히 붙잡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